슈만 Kinderszenen Op.15 - 7 "꿈(Träumerei)"
* 부제에 있는 음악과 같이 감상하시면 더 재밌습니다.
https://youtu.be/hrEw3gAKrVw?si=j1HhejNkl5G_3DZz
그 남자는 행복하고 싶었다.
그 남자는 청년이 청운의 꿈을 품고 들어선 동네에서 하늘과 가장 맞닿은 곳에 살았었다. 거기에서 등용문해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그 남자는 서둘러 하늘로 오르려고 했었다. 조금만 손 내밀면 별에 닿을 만큼 가까워졌지만 꿈은 구름처럼 흘러가버렸었다. 그렇게 그 남자의 무대는 막을 내렸다. 지금 의연한 뒷모습으로 노을을 향해 걷는 그 남자의 품에는 소년이 도저히 읽을 자신이 없었던 편지가 있었다.
그 남자는 다시 피아노 앞에 섰다. 아니 피아노 앞으로 이끌렸다. 그 남자는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노을을 배경으로 다리 위의 피아노 앞에 앉았다. 뚜껑을 열고 조심히 'A4(라)'음을 눌렀다. 그 울림은 그 남자를 중심으로 도시의 소음을 한 겹 한 겹 포용하며 퍼졌다. 그 남자는 다시 한번 어떤 의지의 힘을 느꼈다. 그 남자를 이곳으로 이끈 것은 알 수 없는 어떤 의지였다. 처음에는 품속에 있는 편지 주인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몰래 연습하고도 마지막 길에서 조차 들려주지 못했던 곡을 연주하며 마침표를 찍으려 했다. 43년 만에 그 남자의 연주가 시작됐다. 그 남자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어디서 이런 힘이 나는 걸까?' 그 남자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눈을 감고 피아노 연주에 집중하면서도 눈물이 날 것 같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가슴에 난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갈 뿐이었다. 연주가 끝날 무렵 그 남자는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소녀의 얼굴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리고 떠오른 얼굴이 바로 옆에 앉아있었다. 안녕이라고 반가운 인사를 하면서...
그 남자는 두 눈을 의심했다. 그녀가 43년 전 모습 그대로 옆에 앉아 웃고 있었다. 그 남자는 양볼을 꼬집었다.
"꿈 맞을걸. 꼬집어도 안 아프지? 내가 옆에 있는 것 자체가 꿈이 아니면 불가능하잖아."
그녀의 입이 움직이며 말을 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맞았다.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던 그 남자는 겨우 말을 건넸다.
"그동안... 잘... 지냈어... 요?"
한동안 로봇처럼 형식적인 말만 반복하다가 진심으로 안부가 궁금해서 말을 하려니 어색함에 더듬거렸다.
"누가 할 소리를? 나 너한테 따지러 왔어. 왜 내 편지 바로 안 읽었어? 그리고 왠 존댓말? 흐흐흐"
그녀가 장난치듯 너스레를 떨었다.
"...... 그게..."
소년은 소녀의 편지를 읽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소녀의 편지를 부적처럼 간직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유난히 햇살이 눈부신 날이었다. 소년이 하늘로 뛰어들기로 결심한 날이기도 했다. 소년은 새벽같이 등교해서 옥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난간에 올라섰다. 멀리 산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가을바람을 맞고 있으니 결심이 더 선명해졌다. 소녀와도, 세상과도 작별하려고 했다. 그전에 품에서 편지를 꺼냈다.
"그때 얄미워서 일부러 네 손에 있는 편지를 뺏어서 던져버렸어."
그녀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미안해..."
그 남자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뭐 잘못했는지 알면 됐어. 용서해 줄게."
갑자기 바람에 날아간 편지를 따라가 주우려다 옥상난간에 사람을 발견하고 놀라서 쫓아온 경비아저씨에게 잡히지 않았다면 그 남자는 그녀에게 용서받지 못했을 거다. 그녀가 일어나서 그 남자의 손을 끌며 가야 할 데가 있다고 했다. 그 남자는 꿈같은 상황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점점 납득되고 있었다.
"네가 진짜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따로 있어."
그녀의 손길에 이끌려 그 남자는 뒤따랐다. 가는 내내 그녀는 바보같이 헤헤거리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둥, 네 옆에 있으면 자기는 항상 어린애가 된다는 둥 43년 전과 똑같이 재잘거렸다. 두 사람 주변의 배경이 하나씩 사라지는 듯하더니, 곧 길도 사라졌다.
이윽고 그녀도 사라지고, 새하얀 공간에 그 남자 혼자만 남겨졌다. 멀리서 피아노 소리만 아득히 들려왔다. 그 남자는 소리를 따라 계속 걸었다. 그리고 어떤 문 앞에 도착했다. 문 앞에는 거울 속 저 남자가 청년의 모습으로 미소 짓고 서있었다. 자세히 보니 피아노 학원 레슨실 문 앞이었다. 청년이 말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그 안에는 소년이 행복한 표정으로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소년이 연주를 멈추고 문 쪽을 바라봤다.
"어서 와! 오랜만이야! 드디어 내 소리를 들었나 보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그래도 결국 듣게 돼서 다행이다. 그동안 계속 기다렸거든…"
그 남자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양손을 바닥에 대고 고개를 떨군 채…
"미안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여기서 계속 기다리게 만든 거구나…"
그제야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 남자는 가슴속에 구멍이 메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남자를 이끈 의지가 무엇인지 알았다. 그 남자는 행복하고 싶었다. 뭐든지 될 수 있고, 뭐든지 할 수 있던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괜찮아. 이제라도 알아줘서 고마워. 이리 와서 옆에 앉아! 같이 피아노 치자...."
그 남자는 소년 옆에 앉았다. 그리고 「슈만 Kinderszenen Op.15 - 7 "꿈(Träumerei)"」를 연주했다. 소년과 그 남자가 연주하는 피아노의 울림은 점점 퍼져가며 주변을 빈 캔버스처럼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창조할 수 있게 새하얗게 만들었다. 그 남자는 고단한 짐을 벗고 평온하고 행복한 표정으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꿈속에서 계속...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