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자의 강박증
Born to Be 유리멘털
겁이 많아졌다. 아니 원래부터 겁이 많았다. 신중한 성격이라고 좋게 표현할 수 있지만, 겁쟁이라는 충격요법을 써본다. 가뜩이나 유리멘털 겁쟁이인데 하루하루 나오는 강력범죄 뉴스는 바깥활동을 더 위축시킨다. 길거리에서 분위기가 좀 이상한 사람이 다가오면 숨거나 다른 방향으로 돌아간다. 길 가다가 뒤를 돌아보는 버릇도 생겼다. 장우산은 필수로 들고 다닌다. 예전에는 길에서 모르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살짝 눈인사하고 지나갔는데 이제는 혹시나 쳐다본다고 시비 걸까 봐, 아니 더 무서운 건 몰래 따라올까 봐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모자를 눌러쓰고 양산으로 되도록 시야를 가린다.
우울증으로 상담을 다닐 때, 이런 겁쟁이(유리멘털) 성향에 대해 물어봤더니 강박증에 기인하는 경우라고 했다. 그렇다 필자는 보통 강박증이 아니다. 가장 센 증상이 길에서 절대로 선을 안 밟는 강박이다. 만약 밟으면 그 선을 따라 필자의 발이 잘리는 공포에 사로잡혀버린다. 너무 끔찍해서 혹시나 실수로 선을 밟으면 두발을 보도블록 안으로 모으고 잠시동안 서있는다. 그런 일이 안 생긴다는 확신이 들면 발걸음을 옮긴다. 예전에는 보도블록이 좀 컸는데, 요즘은 보도블록이 촘촘해져서 길을 가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두 번째로 센 증상이 계단을 오르내릴 때 반드시 왼발을 마지막에 디뎌야 한다는 강박증이 있다. 이 룰을 지키지 않으면 건물이 무너질 것 같은 공포가 밀려온다. 그래서 자주 가는 건물에는 모든 계단마다 어느 발부터 시작해야 왼발로 끝나는지를 외우고 다닌다. 처음 만나는 계단에서는 우선 오른발로 시작해서 끝날 때 왼발로 안 끝나면 두 칸을 오르거나 내려간다는 규칙도 생겼다. 하지만 찝찝함은 남아서 뭔가 사고가 날 것 같은 불안함에 심장이 마구 뛰며 안절부절못한다.
세 번째 증상이 손에 땀이 많다. 다한증과는 다르다 혼자 있을 때는 괜찮은데 일을 하거나 누군가와 같이 있으면 긴장해서 손에 식은땀이 난다. 그래서 악수를 싫어한다. 어쩔 수 없는 경우는 상대방에게 먼저 양해를 구하고 악수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사코 괜찮다고 손을 잡는 분들의 순간적인 표정변화는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큰 상처가 된다. 그리고 이 모든 증상들 뒤에는 심장박동이 빨라지며 호흡이 가빠지는 증상을 동반한다. 부모님이나 친구들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면 바보 같다고 놀려서 이제는 말도 안 한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다. 실제로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기분을 절대로 알 수 없다.
완벽주의자들이 강박증을 많이 겪는다고 한다. 되돌아보니 완벽주의자였다. 학교에서 사회과목 암기를 할 때, 앞에 외웠던 거 까먹지 않았나 확인하려고 항상 1번부터 점검하며 외웠다. 과제를 할 때도 순서대로 진행해서 앞 단계가 완수가 되면 다음으로 넘어갔다. 시험도, 일도, 요리도, 취미도 모두 그랬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잘못되거나 실패·실수할까 봐 심장이 뛰었다.
그렇게 서른 중반까지 스스로를 겁쟁이로 알고 살았다. 그러다가 성우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늘 심장 뛰는 일만 해오다가 가슴 뛰는 일을 해보니 신세계였다. 사회생활의 독이라고 억눌렀던 완벽주의 강박증 성정이 가슴 뛰는 일에서는 재능이 되었다. 유리멘털이라고 놀림받던 여린 소녀감성은 촉촉한 감수성이 되었다. 스트레스받아 고치고 없애고 싶었던 단점들이 물 만난 고기처럼 펄쩍펄쩍 뛰어오르며 장점이 되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하품 나온다던 쓸데없이 진지한 성격은 글감을 안겨주는 시선을 주었고, 잘못된 권위의식에 못 참고 들이받던 인내심 부족한 성격은 의식을 주었다. 장점으로 승화된 재능으로 가슴 뛰는 일을 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다. 가끔 누가 좀 알아줬으면 하는 욕심도 한 번씩 고개를 들지만 이제는 슬쩍 누를 줄도 안다. 욕심을 부리면 다시 심장 뛰는 일이 돼버릴지도 모른다. 가슴 뛰는 일로 행복하게 살아간다.
심장 뛰는 일은 사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