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하면 싫증은 날 수 있지만 배척까지는...
클리셰 ([프랑스어] cliché) : 명사, 진부하거나 틀에 박힌 생각 따위를 이르는 말. 규범 표기는 미확정이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클리셰'에 관해서 고민하면서 국어사전에 없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낱말의 뜻과는 반대로 엄청난 반전이다. 정확히는 표기법 미확정이다. 그래서 사전에 등재되지 않았다. 하지만 '클리셰'라는 낱말은 이미 널리 쓰이고 있다. 이제는 클리셰라고 말하는 것이 클리셰라고 느껴질 정도다.
사전에도 없고, 검색창에도 영화용어로 설명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중에 본래의 뜻을 소개한 자료가 있다.
클리셰는 본래 인쇄 연판(鉛版)을 뜻하는 프랑스어 어휘이다. [출처 : 나무위키]
연판(鉛版)? 이것은 또 뭐란 말인가?
연판(鉛版) : 명사, 활자판을 지형(紙型)으로 뜨고, 여기에 납·주석·알루미늄의 합금을 녹여 부어서 뜬 인쇄판 [출처 : 민중서림 엣센스 국어사전 제6판]
연판 (stereotype) : 흔히 스테레오판(stereo版)이라고도 하는데, 어원은 그리스어의 ‘한데 붙은 활자’라는 뜻이며, 인쇄 기법의 하나로 1800년경에 발명되었다. 같은 활자조판으로 반복 인쇄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 손쉽게 할 수 있는 복판법(複版法)으로 지형연판법(紙型鉛版法)이라고도 불리며, 널리 이용되고 있는 방법이다. 이 지형연판법이 발명되기 이전에는, 활자의 원판이 평면이기 때문에 인쇄기의 형식에 제한이 있어 고속화할 수 없었지만, 지형의 발명으로 평면의 판을 원통 모양의 곡면(曲面)으로 된 원연판이 만들어지게 되었으며, 인쇄기의 압동(壓胴)과 판동(版胴)을 일정한 방향으로 회전시켜 인쇄하는 실린더 형식의 윤전인쇄기를 발명하게 한 것은 인쇄술의 역사상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연판 [stereotype, 鉛版]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쉽게 말해서 팔만대장경에서 프린터로 진화하는 획기적인 발명품이다.
그런데 이런 획기적인 발명품이 왜 진부하다는 뜻으로 쓰일까?
연판은 인쇄기의 롤러에 감아 고정시키며 회전하면서 종이에 인쇄한다. 연판이 마모되면 지형을 이용해 다시 연판을 주조한다. 연판은 활판과 달리 한번 주조하면 수정할 수 없으며 한번 만들어진 연판으로 수천 장을 인쇄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연판을 뜻하는 영어 단어 스테레오타입(stereotype)이 원래의 뜻보다는 고정관념, 정황화된 생각 등의 뜻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위키백과]
stereotype : 1. 고정관념 2. 고정관념을 형성하다. [출처 : 네이버 영어사전]
단어 검색만으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판에 박은 듯하다.
'아... 이 뜻이구나!' 그런데 판에 박은 듯하다고 하면 되지 왜 클리셰라는 어려운 단어를 쓸까? '판에 박은 듯하다'라는 표현이 판에 박은 듯해서 그런가? 불어라서 유식해 보여서 그런가? 미장센, 오마쥬 뭐 그런? 하지만 이유를 발음에서 찾아본다.
'~셰 / ~쉐'
비속어에 흔히 사용되는 발음이다. 그래서 발음이 주는 타격이 강하다. 그리고 문장으로 은유하는 것보다 명사형 낱말이 간결한 것도 한몫한다. 간혹 영화리뷰나 평론가들의 글을 보면 '클리셰 범벅'이라며 감독이나 작가를 비판하는 경우가 있다. 한 줄 글로 관심을 끌려면 강하고 간결한 낱말이 최고의 무기이다. (최고의 무기라는 말도 클리셰?)
클리셰 밭에서 클리셰 아닌 것 찾기
책에 있는 관용구, 속담, 은유, 비유는 거의 클리셰이다. 어떻게 보면 클리셰는 '이런 말은 이런 뜻으로 이해합시다'라는 일종의 약속이다. 인쇄를 빠르게 대량으로 해내는 것과 같이 의미전달을 효율적으로 하는 수단이다. 전개도 그렇다. 흔히 말하는 기승전결. 이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는 이야기는 별로 없다. 만약 그런 참신한 이야기 전개방식이 있다면 너도나도 달려들어 결국은 클리셰가 될 것이다. 익숙한 표현이고 전개라서 싫증 난 것은 이해하지만 마녀사냥식으로 배척하는 것은 섣부르다고 감히 말한다.
클리셰 하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갛게 달아오른다.
성우공부를 하면서 학원을 한번 옮긴 적이 있다. 오랫동안 사사해주시던 선생님이 개인사정으로 출강을 그만두시고, 또 당시 회사 때문에 살던 지방에서 남부터미널로 다니는 버스가 집 앞으로 다니면서 사당 근처 학원으로 옮겼다. 한 달을 다녔는데, 수업이 계속 늦게 끝나면서 항상 막차를 놓치게 되고, 그때는 부모님과 의절까지 생각할 정도로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에 본가로는 가지 않던 때였다. 그래서 여러 번 터미널에서 첫 차를 기다리며 밤을 새우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쳐갔다. 그래서 독학을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사당 학원에서 수강생 한 명이 '클리셰'라는 낱말을 썼는데, 옆에 있던 친구가 갑자기 뜻이 뭐냐고 물어왔다. 문맥상으로 대충 이해하고 있던 터라 설명을 하자니 뭔가 모르는 데 아는 척을 하는 것 같고, 그렇다고 많이 들어본 낱말이라서 정확하게 모를 뿐이지 전혀 모르는 뜻은 아니고 뭔가 애매했다. '판에 박은 듯하다' 이 말 한마디면 설명이 되는데... 좀 더 잘 알려줄 수 있었는데, 어휘력이 부족해서, 한다고 한 설명이
"뭔가... 그 이미 알고 있는... 그... 복선이라고 해야 할까...?"
말끝을 흐리며 얼토당토않은 '복선'이라는 낱말까지 썼다. 차라리 그냥 같이 모를걸... 지금도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갛게 달아오르는 부끄러운 일화다.
클리셰 둘.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이다.
성우공부를 하면서 듣기 좋으면서도 싫은 말이 '현직 성우 OOO 같아요'라는 말이다. 흔히 말하는 '성우삘(feel)'이 날 정도로 훈련이 잘됐다는 말도 되면서 동시에 개성 없는 성대모사 같다는 말도 되기 때문이다. 누구누구 같다는 말은 성우공채시험 면접에서 성대모사 장기자랑 정도로 끝나는 수준이다.
하지만 시작과 발전을 위해 롤모델을 두고 따라하는 것은 다르다. 성우지망생들은 어느 정도 훈련이 되면 롤모델을 추천받는다. 그리고 죽어라고 판다. 그러면서 선생님들께서 하시는 말씀이 "한번 따라 해 봐라. 따라 한다고 똑같이 되나..." 맞는 말씀이다. 그런데 비슷한데 똑같지 않다. 이것이 바로 개성이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기본기가 확실히 갖춰진 다음에는 현직 성우들을 따라 해 보는 것도 매우 중요한 훈련방법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진부해진다.
시간이 멈추지 않는 이상 이 세상에서 클리셰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건은 순환한다. 돌고 돌아 다시 돌아오면 기성세대들은 경험해 봤던 것이라서 뜻뜨미지근해진다. 신세대들이 아무리 복고풍, 레트로 열풍이라며 신기한 듯 트로트를 부르고, 필름카메라, 워크맨을 들고 다녀도 기성세대들은 '구닥다리 갖다 뭐 하게?'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신세대들이 지금 참신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일 뿐이다. 이미 한 Cycle을 돌고 온 사람들에게는 '해본 것'이다. 그래서 조금 덜 열광하는 대신 조금 더 현명해진다.
하지만 처음 해보는 사람이 주인공
그렇다. 기성세대는 두 번째 돌아가는 세상이고 이미 주인공을 해봤다. 그러니 처음 해보는 그대들이 주인공이다. 드라마도 주인공은 계속 바뀌는데 잘 나가는 조연은 여기저기 다 출연한다. 이것저것 다 해봐서 이렇게 저렇게 캐릭터 바꿔가며 나와도 식상하지 않다. 도리어 연기에 깊이감이 더해져 심금을 더 잘 울린다. 또 자주 보니 반갑다. 조금 더 자주 나와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친근하던 연예인의 갑작스러운 작고 소식은 추억의 책 한 권이 덮이는 것 같아서 안타깝기도 하다.
클리셰, 진부함은 위대한 정신을 품으면 명품으로 거듭나고 클래식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