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직업병 (4)

가라사대

by 철없는박영감
"독서의 세계에 오신 것을 매우 환영합니다." 이런 멘트에는 대개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


멍하니 살아가는 느낌이 싫어서 자기 계발서와 성공한 유명인들의 에세이를 읽기 시작했다. 기똥차고 주옥같은 말들이라며 '언젠가 써먹어야지'라는 생각으로 기억에 남길 문장을 베끼어 쓴다. 그래놓고 덮어버린 노트는 저~기 어디 옷장 아래로 숨었는지, 아니면 우리 집에 산다고 전해 들은 도비가 마법을 걸었는지 어느 순간 존재했다는 사실도 까마득히 잊힌다. '그들처럼 성공한 인생을 살아야지'라는 생각이 전부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영원할 것 같던 젊음이, 부지불식간에 신음 소리를 내지 않으면 앉고 일어서기가 어색해지는 순간, 갔음을 인식한다.


'다 거기서 거기인 특별할 것 없는 시간 축내기용 책에 왜 그렇게 돈을 갖다 바쳤을까... 나는 읽으면서 뭘 남겼나... 출판사, 저자, 카페사장 배만 불려줬네...' 이런 후회가 밀려오면 자기 계발서 혐오증이 찾아온다. 단지 그들보다 늦게 태어났고, 지금 당장 돈과 명예 그리고 권위가 없을 뿐, 나아 보이는 것도 별로 없다. 그래서 성공한 이들의 이야기는 사는데 잠깐 자극을 줄 수는 있으나 삶에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그들의 인생은 그들의 것이고, 내 인생은 내 것이다.


이야기 속으로 GO! GO!


자기 계발서의 시련을 통과하면 다음 단계는 대부분 문학으로 시야를 넓힌다. 시와 소설이 대표적인데... 시는 마음에 여유가 넘치거나 감성이 촉촉할 때나 잘 읽히지, 출퇴근 지옥을 겨우 탈출하고 전쟁 같은 현생을 살아내는 늘 기진맥진한 상태로는 시를 읽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역시 재미있고 읽는 보람이 있는 것은 소설이다.


주말마다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신작과 화제작들을 살펴보며 책을 고르는 문화생활을 즐기고 있으면 그동안 몰랐던 나의 지적 욕구에 새삼 놀라기도 하고, 동료들과의 대화 중 슬쩍 유명 소설가의 신간, 혹은 국제 문학상 수상작에 대한 감상평을 이야기하는 모습은 상상 속의 바람직한 지식인像 그 잡채다. 하지만 역시 픽션은 픽션일 뿐이고, 작가의 상상력과 문체에 감동하며 다 읽고 나면 또 다른 인생작을 만날 때까지의 지루한 시간에 슬슬 지쳐가며 페이지를 쉽게 넘기기 시작한다.


권위 없음을 한탄하다.


자기 계발서로 시작된 독서는 소설책이 술술 읽히기 시작하면 슬슬 어려운 책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동료들과의 지적인 대화를 넘어서서 이제는 토론을 하기 위한 배경지식이 필요해진다. 요즘 각 계의 전문가(?)... 라기보다는 유명인들을 모아서 한 주제에 대해서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썰'說'을 푸는) 프로그램이 인기다. 이런 유행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지대넓얕'같은 괴상한 제목의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다.


또한 권위 없음을 한탄하며 자신의 생각에 힘을 실어줄 후견인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러면서 각 종 철학서들에 손대기 시작한다. 저 머나먼 고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시작으로, 근대 철학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데카르트, 정언명령과 가언명령을 구분하여 윤리규범을 정립한 칸트,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철학자 '신은 죽었다'의 니체. 그 외에도 각 종 아포리즘(잠언)을 섭렵하며 진리를 찾아 나선다. 요즘 가장 인기리에 인용되는 철학자는 아마도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이지 않을까? 얼마 전까지 '알랭 드 보통'이었는데…


문자를 쓰다


철학도 공부했겠다. 철학자와 그들의 명언도 섭렵했겠다. 안타깝게 이때부터 현학적으로 돌변하여 그들만의 세상으로 빠져드는 우(愚)를 범하기 쉽다.

"가라사대……"

종교도 아닌 것이 권위자의 견해를 앞세워 뒤에 숨거나, 전문용어나 전공어..., 예전에는 영어였으나 요즘은 라틴어나 불어, 독어를 사용하여 전문성을 드러내려는 의도도 많이 보인다. 부끄럽게도 지금 이 단계에 들어서려는 것은 아닌가 반성 또 반성한다. 각 주가 달리고, 해설이 따라오지만 알아보기 힘든 것은 매한가지다. 너무 쉽게 읽히는 종이 낭비도 문제요, 너무 어렵게 읽히는 아니 어려워서 읽을 수 없는 종이 낭비도 문제이다.


현학의 늪에서 빠져나와 쉽고 유익한 생각을 발굴하는 것도 읽고 쓰는 사람이 할 일이다.


어렸을 때는 100m를 14초에 못 뛰는 것이 부끄러웠다. 지금은 당연히 전력질주는 불가능하고, 되지도 않을 기록단축에 정신이 팔려 안 듣고 뛰는 것이 더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앞으로 뛰는 것은 고사하고 걷기도 힘들 정도가 되어 못 알아들을 궤변을 늘어놓고 다닐까 봐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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