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보면 안다.
내가 써도 이보단 낫겠다.
특히 무협지, 판타지, 웹소설, SF소설 등 흔히 장르소설이라고 하는 책을 읽는 사람들이 많이 하는 말이다. 이 분야 독서 애호가들은 책을 사선으로 읽는다. 서점에서 제목에 끌려 집어든 책을 대충 훑어보는 속도로 이들은 정독을 한다. 지금이야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처음 목격했을 때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중학교 때 책에 빠져 사는 친구가 그랬다. 친하진 않았지만 방학 보충수업 때 자리배치가 가까워서 알게 되었다. 수업 중에도 그 친구는 책에 빠져있었다. 어쩜 한 번도 안 들키고 1교시부터 4교시까지 내리 앉아서 책 한 권을 읽어냈다. 그때 옆으로 슬쩍 보니 페이지 넘기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너무 궁금해서 물어봤다. 만화책이냐고... 아니란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읽냐고 했더니, 많이 읽다 보니 사선으로 쭉 읽힌다고 알려줬다. 그 친구 말에 따르면 처음엔 눈 길 한 번에 한 줄씩 읽히다가 차츰차츰 한문단, 한 페이지씩 읽혔다고 했다. 그 친구가 20권이 훌쩍 넘는 시리즈물을 다 읽으면 항상 자기도 모르게 입으로 내뱉는 말이었다. '내가 써도 이보단 낫겠다.'
이건 말로만 듣던 초능력 아니야?
너무 신기한 나머지 주변 친구들에게 이 친구의 능력을 알렸다. 그랬더니 '주변에 그런 초능력자 한 명쯤 다 있는 거 아니야?'라는 식의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너무 신기하고 생전 처음 보는 부러운 능력이었다. 그 뒤로 그 친구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비밀을 풀어냈다. 비밀의 실마리는 책 내용이었다.
신통방통한 능력에 호기심이 폭발하며 내용을 진짜 알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읽은 책들에 대해 물어봤다. 신기하게도 줄거리와 등장인물들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계속 대화를 하며 네 번째 시리즈를 얘기할 즈음 슬슬 앞의 세 가지 시리즈와 등장인물과 디테일이 조금 다를 뿐 묘하게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섯 번째 시리즈 얘기에서 그 친구도 기시감을 느꼈는지... '말하다 보니 다 똑같네...'라고 했다.
그렇다 뻔한 스토리에 뻔한 등장인물 뻔한 결말까지... 그 친구는 요즘 사람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클리셰 범벅을 읽고 있었다. 그러니 책 읽는 속도는 빨라질 수밖에 없었고, 한 시리즈를 읽을 때마다 똑같은 감상평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에 이문열 삼국지가 중고생들 사이에서 필독서로 읽히던 때이다. 나도 읽고 있었는데 10권인가 11권으로 이뤄져 있었다. 그때는 모르는 단어나 이해가 안 되는 한자어가 있으면 사전을 찾아서 이해하고 단어장에 적어가며 넘어가던 완벽주의자 성향이 짙었던 시절이다. 인터넷도 없어서 거의 3~4개월은 족히 걸려서 다 읽었던 것 같다.
그 친구에게 삼국지를 빌려줬다. 물론 그동안 해왔던 가닥이 있어서 3~4개월까지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속도는 이전에 비해 줄었다. 그리고 그 친구는 삼국지의 맛을 알아버렸다. 그리고 무협지에서 드디어 탈출하여 아마도 '퇴마록'을 읽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때가 우후죽순으로 책대여점이 생기다가 점점 PC통신으로 넘어가던 시절이었을 거다.
저자 탓하지 말고 직접 한 번 써보는 건 어때?
회사를 들어오고 비슷한 부류의 사람을 만났다. 현장 감독자인데 늘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책상에 발을 올리고 앉아 무협지를 읽고 있었다. 직책은 낮았지만 나이는 많은 선배였다. 이 분도 책을 사선으로 읽고 있었고 역시나 끝에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중학교 때 친구가 생각나서 다른 장르 좀 읽어보시라 했더니 책대여점은 이미 도장을 깼고, 웹소설까지 모두 섭렵한 진정한 덕후였다.
한 번은 술자리에서 책이야기가 나오며 요즘 책들은 내용이 다 거기서 거기라 읽을 게 없다고 한탄하길래 그러지 말고 직접 써보시라고 권했더니 그건 또 아닌 것 같다고 손사래를 쳤다. 아니 공장에서 물건 제조한다는 사람이 생산적인 일을 해야지 그렇게 소비적인 행태만 보이면 쓰냐고 술기운에 반문했다가 맞을 뻔하기도 했다. 그동안 사 먹는 음식에 익숙해져 있는데, 갑자기 식재료를 재배하고 직접 수확해서 요리까지 해 먹으라고 하는 격이니 화가 날만도 하다.
써보지 않으면 모른다.
그렇다 독서를 많이 한 사람들에게 책을 직접 써보라고 하면 소비자에서 생산자가 되라는 말로 들리는지 우선 화를 낸다. 평소에 '작가님, 작가님...' 하면서 꼬랑지를 흔들길래, 직접 써보라고 하면 '작가 아무나 하나?'라고 손사래를 친다. 그리고 피고름으로 쓴 작가의 책을 읽고 나면 '작가 뭐 아무나 되나 보네..., 내가 써도 이보단 낫겠다...'라는 마음에 안 든다는 평을 적나라하게 내뱉는다.
읽었나? '읽기'를 했나?
책이 오락거리 중에 하나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음악이나 미술과 마찬가지로 드는 노력에 비해 평가는 훨씬 잔인하다. 이는 독서를 많이 했다는 사람일수록 더 노골적이다. '내가 책을 많이 읽어봐서 아는데...'식의 아는 자랑과 비아냥거림... 많은 독서모임이 깨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 읽고 책을 덮고 나면 조용히 음미해 보자.
썼나? '쓰기'를 했나?
쓰기도 오락거리 중에 하나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책 쓰기를 그렇게 하는 사람이나 너무 많이 쓰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게 대접하기 전에 잘 숙성시켜야 배탈 나지 않고 더 맛있다. 설익어 시고 떫은 것들을 모아 잘 숙성시키고 정제해서 내놓는 것이 마땅하다. 다 쓰고 손을 놓고 나면 조용히 음미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