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직업병 (9)

36,500권

by 철없는박영감
사람이 100살까지 산다고 가정했을 때,


태어나면서부터 하루 한 권씩 책을 읽는다고 하면 평생 읽을 수 있는 책이 삼만육천오백 권이다. 100살까지 사는 건 어렵고, 100살까지 책을 읽는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게다가 매일 한 권씩 읽기는 웬만한 정신력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태어나면서부터 읽는다는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단 수명을 80으로 줄이고 그중에 초년 10년, 말년 15년을 제외한다. 그러면 책을 읽을 수 있는 기간이 55년으로 준다. 그럼 대략 앞의 계산에서 절반이 된다. 매일 한 권씩 책을 읽는다는 가정하에 약 이만 권의 책이 사람이 평생 읽을 수 있는 최대 권수라는 결론이 나온다.


지금 우리 집에 있는 책은 총 87권


물론 중간에 중고서적으로 팔아버린 책도 있고, 이사 다니면서 버린 책도 있지만 지금 있는 책 권수는 87권이다. 이 중에서 안 읽은 책이 약 20권, 읽었지만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도 안나는 책 약 27권, 기억은 나지만 저걸 왜 읽었지 후회하는 책이 10권, 좋아하는 작가 컬렉션 13권, 성우 관련 책이 10권, 실용서가 7권이다.

제일 좋아하는 작가 미우라 시온의 소설 컬렉션과 성우 지망생 시절 공부했던 책들.


인생 80이라는 가정하에 절반을 훌쩍 지났는데 집에는 겨우 87권의 책이 있다. 퍼센트를 계산해 보면

1위 : 기억 안 남 (31%)

2위 : 안 읽은 책 (23%)

3위 : 컬렉션 (15%)

공동 4위 : 읽은 것을 후회함, 꿈에 도전 (11.5%)

6위 : 실용서 (8%)

이 비율을 표본으로 성급하게 일반화의 오류를 범해 보면, 인생에 영향을 주는 책은 38~46% 정도가 된다. 즉, 절반이 안 된다.


독서 챌린지


만 권 읽기 챌린지라는 것이 있다. 성공했다는 후기가 별로 없는 것으로 보아 만만하지 않은 챌린지임이 분명하다. 도전자들 중간보고에도 대부분 전자책으로 도배되어 있거나 어학공부용 실용서를 포함시킨 것으로 봐서는 굉장히 달성이 어려운 챌린지임이 틀림없다.


특이한 독서 챌린지가 있다. '책육아'. 미취학 아동이 만 권 읽기에 도전한다고 한다. 동화책과 그림책이긴 하지만 보통 한글을 배우고 책을 읽는다고 치면, 한글을 빨리 배워도 6~7살이고, 학교를 8살에 들어가니까 많게는 2년 적게는 1년이 안될 수도 있다. 하루에 열 권을 읽어도 3,650권 하루에 열 권 이상을 읽는다는 말인데... 음... 과연... 책을 좋아하는 아이라면 가능한 거겠지? 요즘은 '독서 지도'라는 사교육도 있는 것 같던데... 과연 아이가 커서도 책을 좋아할는지 의문이다. 어떤 목적의 사교육인지 궁금하다. 과연 이런 식의 읽기가 독서라고 할 수 있는지도 궁금하다.


얼마나 읽었을까?


초등학교까지의 독서는 빼고, 중학교에 올라가서 시험에 나오는 문학작품을 엮은 책을 읽었다. '감자', '운수 좋은 날', '날개', '메밀꽃 필 무렵' 등 아직도 이야기와 소설 속 장면이 머리에 그려지는 작품들이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처음으로 '제3의 물결'이라는 인문학 책을 어렵게 읽었다. 물론 읽기라는 행위만 했을 뿐 너무 어려워서 기억에 남는 것은 없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그래도 한 달에 한 권을 읽었으니까 6년간 약 72권의 책을 읽었을 것이다. '쥬라기 공원', '앵무새 죽이기' 같은 책을 라디오 광고에서 듣고 읽기도 했다. '쥬라기 공원'은 유전공학을 전공으로 선택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소설이기도 하다.


대학에 와서는 도서관이라는 신세계를 만나면서 한 달에 5~6권은 읽었을 것이다. 그때는 교양수업시간에 알게 된 박완서 소설가를 너무 좋아해서 작품을 찾아가며 읽었던 것 같다. 졸업까지 대략 500권 정도 읽었으려나? 그 뒤로는 이전 글에서도 밝혔듯이 불안한 다독을 했던 터라 일 년에 100권이 좀 못되게 읽었던 것 같다. 대충 계산해 보면 취직하기 전까지 1,000권 정도를 읽었나 보다.


그 뒤로의 독서 실적은 전무한 수준이다. 일도 하고, 연애도 하고, 퇴사도 하고, 이직도 하고... 아무튼 바빴다. 그래도 첫 월급을 타서 부모님 선물과 함께 지금은 없어진 '반디&루니스'에 가서 책에 플렉스 했던 때는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 중에 하나였다. 아 그러고 보니 전무한 수준은 아니다. 기억에 안 남아서 그렇지 서점에서 책을 사기는 많이 샀었다. 전부 자기 계발서와 에세이라서 그렇지... 뭐 그때도 일 년에 2~30권 정도는 읽었을 거다. 일 년에 한 번씩 서점에 가서 플렉스를 했으니까... 그럼 15년 잡고 20권으로 치면 300권 정도 되겠다. 그럼 지금까지 1,300권의 스코어를 기록 중이다. 많이 읽은 줄 알았는데 세어보니 별로 안된다. 갑자기 창피해진다.


퇴사 후 작년에 읽은 책이 대략 200권 정도 된다. 명절 연휴를 빼고 일주일에 4권씩 꽉 채워 대출했으니까 맞을 거다. 그래도 아직 1,500권이다. 만권이 가능한 숫자인가?


함정은 인생에 영향을 주는 책은 절반도 안된다는 사실.


비율의 함정이고 숫자 놀음이기는 하지만, 되돌아보니 생각보다 기억에 남는 책이 별로 없다. 어떤 책은 내용보다, 같이 들었던 음악만 생각나기도 한다. 독후감을 써야 하나? 그래서 브런치에 그렇게 책 리뷰가 많은 건가? 아 참 숫자놀음에서 벗어나기로 했었지…


내 인생의 첫 책


'어느 꼬마의 마루밑 이야기'. 13~14살에 직접 서점에 가서 돈을 주고 산 첫 책이다. 아직도 기억난다. 라디오에서 광고하던 책 제목에 끌렸고, 감수성 풍부한 사춘기 시절에 딱 읽기 좋은 책이었다. 그때는 내용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니 이해는 했으나 표면적인 이야기와 '마루 밑'이라는 장소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컸다. 처음 산 책이라고 엄청 소중히 했던 것도 기억난다. 포장지로 책을 싸고, 끼고 자고, 나중에 표지에 코팅이 벗겨져서 일일이 스카치테이프로 감싸고...


인생에 영향을 주는 책이 절반 밖에 안된다는 추론은 어쩌면 사춘기 중고등학생 때 읽었던 책들이 그랬다는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바로 어제 읽은 책 보다 30년 전에 읽었던 책들이 더 기억에 남는 것을 보면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추론이 아니고 사실이다.


앞의 '책육아'에 대한 생각은 '몇 권 읽기 챌린지, 독서 지도'같은 부모의 입김이 작용한 것에 대한 궁금증이다. 독서가 아이들에게 좋다는 것은 공감한다. 얼마 전, 7살 때 정말 좋아했던 '디즈니 명작동화'가 재출간 됐다는 소식에 잃어버렸던 가족을 다시 만난 것 마냥 기뻤다. 조카도 똑같이 좋은 추억을 갖기를 바라며 나중에 전집을 사주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아이에게는 책을 읽히기보다 엄마, 아빠가 읽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아빠들이...


독서는 책 쌓기보다, 추억 쌓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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