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저는 아니지만, 내 인생은 충분히 황금빛으로 채워져 있다. (1)
딩동
주말 저녁에 초인종이 울렸다. '올 사람이 없는데...' 우리 집 초인종은 석 달에 한번 울릴까 말까 하다. 비데나 정수기 같은 구독서비스가 아니면 일 년 내내 없을지도 모른다. '또 서명받으러 왔나?' 요즘 아파트 단지에 주민대표단이 공사 계약을 잘못했는지 크게 시끄러웠다. 비상대책회가 꾸려지고, 공사 반대와 대표단 해명을 요구하는 서명을 받고 다녔다. 소유주가 아니고 세입자라고 몇 번 설명했지만, 잊어버리고 또 왔나 보다.
"누구야? 누구세요?"
혼자 살면 혼잣말이 는다. 그냥 인터폰 화면 보면 되는데... 꼭 앞에 추임새를 넣는다. 화면에는 낯선 낯익은 얼굴이 서 있었다. '아버지'다. 눈으로 볼 때는 진짜 보고 싶은 대로만 봤는지, 카메라 렌즈에 객관적으로 잡힌 '아버지'라는 피사체는 머릿속 모습보다 훨씬 늙고, 작고, 비어 보였다. 사람의 '기억, 추억'이라는 필터가 얼마나 주관적인지 다시 한번 느꼈다.
'어서 오세요...' 이 한마디가 어색해서, '추운데 웬일이세요...'라고 퉁명스럽게 문을 열었다. 아버지도 혼자 아들집에 방문한 게 영 어색했는지 문 밖에서 주춤주춤 못 들어오고 서 계셨다.
"들어오세요... 밖에 서 계시지 말고..."
해라도 떠 있던 낮에는 뭐 하고, 춥고 쌀쌀한 밤에 이렇게 오냐고 속상한 마음을 먼저 꺼내놓았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왜 그렇게 인색했는지... 시간이 지나 글을 쓰는 지금에서야 후회된다.
아침에 한 숟가락 씩 챙겨 먹거라...
부자 사이는 더 어색해졌다. 아버지는 현관에 겨우 발만 들이고, 신발도 벗지 않은 채 까만 봉지에 싸인 들기름 한 병을 내미셨다.
"직접 농사지은 거로... 몸에 안 좋을까 봐 볶지도 않고 생으로 짠 들기름이야... 아침에 밥 먹기 전에 한 숟가락 씩 먹으면 몸에 좋데..."
원인 없이 자꾸 아픈 큰아들을 위해 손수 준비하셨나 보다.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볼 때마다 '의사도 모른데요'라고 짜증만 내는 아들을 보면서 뭐라도 해야겠다 싶으셨나 보다. 피검사에서 콜레스테롤이 높게 나온다는 소리를 듣고 유튜브를 뒤져 좋다는 것을 찾으셨나 보다.
그런데 '고맙습니다'하고 넙쭉 받으면 될 것을... 꼭... 이상하게... '어색'이라는 귀신에 씌어... 고생한 사람 김 빠지게 하는 말을 던지고 말았다.
"아! 저는 올리브유 먹고 있는데... 고생스럽게 뭐 이런 걸 다 하셨어요... 앞으로 하지 마세요... 괜히 이런 거 하시다가 병나면 그게 더 큰일이에요..."
참 뉘 집 아들내미인지 '이쁜 말'만 골라하는 못 된 놈이다. 기껏 생각해서 가져왔더니... 현관에 세워 놓고 한다는 말이... 저런 말이나 내뱉고 있으니... 가시려고 돌아서는 아버지를 붙잡고 한마디 더 보탰다.
"물이라도 한잔 드시고 가세요"
이게 말이야 방귀야? 그래도 붙잡는 아들의 말에 잠깐 화장실만 갔다 가마라고 하시며 신발을 벗으셨다.
지금 아침에 일어나서 한 숟가락 먹으려고 꺼내 놓은 들기름병을 보니 황금빛이 영롱하다. 뚜껑을 열면 고소한 냄새가 코를 먼저 자극하고, 한 숟가락 먹으면 온몸에 퍼지며 세포 하나하나가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 들게 한다. 이게 바로 아버지의 사... 사... 사... 에잇! 아직은 '어색'이라는 귀신이...
썩 물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