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상대성 (마지막)
퇴색
시간은 에너지가 없지만 강력한 힘이 하나 있는데, 선명하던 것을 희미하게 만드는 힘이다. 학창 시절 필기구를 쥐었던 오른손 중지 손톱 옆에는 흔히 '연필 굳은살'이라고 불리는 굳은살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훈장 같은 거지만 손이 못생겨 보여서 손톱 깎을 때마다 항상 피가 날 정도로 굳은살을 잘라냈다. 하지만 점점 크고 딱딱해질 뿐이었다.
연필 쥐고 공부해 본 지 30년 가까이 지나서 손톱을 깎는데 연필 굳은살이 많이 희미해졌다. 굳은살을 제거하는 길도 잘 나있어서 이제는 피보지 않고 깔끔하게 제거하는 기술도 늘었다. 여전히 본바탕은 못생긴 손이지만 못생김이 많이 희미해졌다. '이 정도면 봐줄 만 한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손뿐만이 아니다. 단점밖에 안 보이던 옛날 앨범 속 교복 입은 모습의 사진은 이제 장점이 더 많이 보인다. '예뻤어'
'퇴색'이라는 시간의 이 강력한 힘 때문에 기록을 하고, 사진을 찍고, 무언가를 남겨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매년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에 선물을 주며 축하하고, 연인들은 몇 백일의 만남을 기념하고, 여행지에는 기념품이 가득하고, 나라에서 인정한 기념할 만한 날은 공휴일로 지정되기도 한다.
기념 (紀念/記念) : 어떤 뜻깊은 일이나 훌륭한 인물 등을 오래도록 잊지 아니하고 마음에 간직함.
네? 뭐... 뭘... 뭐를 기념한다고요?
"전쟁기념관"?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여럿 있나 보다. 국립국어원에 문의를 해서 받았다는 답변도 인터넷에서 검색이 된다. '(전략) 틀린 표현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그냥 쓰기로 한다'같은 뉘앙스다. 그래도 이건 아닌 거 같은데... 어떤 "전쟁기념관" 홍보기사에는 '기념'이라는 낱말의 사전적 의미까지 달아놓고 오래도록 잊지 않겠다는 이상한 논리를 편다.
뭐... 승전을 기념한다고 하면 씁쓸하지만 '그럴 수 있어...'라고 넘어가겠는데... '전쟁을 기념한다고?' 이건 뭔가 아닌 것 같다. 아마도 전쟁이라는 것도 퇴색이 되었나 보다. 대한민국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가장 최근의 전쟁은 '베트남전쟁'이 아닐까 싶다. 최근까지 파병한 곳도 있지만 직접적인 전투를 위해 청춘들이 희생된 곳은 거기일 거다. 아직도 참전 군인들이 고엽제 피해를 호소하는 전쟁이기도 하다.
전쟁은 원인이 무엇이 되었든 반대한다. 침략전쟁은 두말할 것도 없다. 전쟁을 기념하는 것이 틀린 표현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30년 가까이 받아들여진 것이 무섭다. TV속 전쟁의 참상을 그냥 뉴스거리로 보아 넘기는 자신이 무섭다. 게임처럼 전쟁에 덤벼드는 끓는 피가 무섭다. 전쟁을 기념하기 싫다. 뭘 해야 될지 모르겠는데... 그냥 모르는 채로 변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도 크다. 지금도 굳은살은 희미해지고 있다.
시간은 하염없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