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거 있잖아... 그거...
"훈제오리, 머스타 소스 찍어먹으면 얼마나 맛있는데..."
"요즘은 행주 삶을 필요 없어. 치킨 타올로 쓱 닦고 버리면 되는데 뭐..."
얼마 전까지 부모님이 단어를 이상하게 말하면 속으로 웃으면서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그냥 넘기곤 했다. '스마폰, 테레비, 거시기' 모든 단어를 3글자로 줄여버리거나, 친숙한 단어로 바꾼다. 그런데 마흔이 넘어서기 시작하면서 나도 새로운 말친구가 생겼다. '그거...' 가끔 '남자가 그런 것도 알아'라는 소리가 부끄러워서 '아 그거 있잖아... 그거... 그거...'라면서 일부러 상대방에게 단어를 유도해내기는 했지만, 요즘은 진심으로 생각이 안 난다.
"그거 있잖아... 왜... 저거 하는 거... 아... 그거... 그거 그거... 아... 왜 생각이 안 나지? 날 듯 말 듯... 하..."
그래도 예전에는 '저거 하는 거'까지는 아니고 무엇에 쓰는 것인지, 어떻게 쓰는 것인지, 어디에 쓰이는 것인지 설명이라도 했는데, 마흔도 중반이 넘어가니 설명도 못한다. 문맥상 알아서 생각하라는 귀차니즘도 발동한다. 중간중간 하나씩 빼먹고 얘기해도 '상대방이 알아서 잘 알아듣겠지...', '나는 개떡같이 말해도 상대는 찰떡같이 알아듣겠지...'라는 귀차니즘! 그랬으면서 반대로 상대방이 못 알아듣게 이야기하면 짜증 내며 "똑바로 좀 얘기해."라며 성질을 낸다. 이쯤에서 귀차니즘이 아니라 이기심이라고 고쳐야겠다. 가족, 친구 간에야 그렇게 짜증 내도, 돌아오는 '정신 차려라!'라는 정색에 뻘쭘해져서 사과하지만, 가게나 계산대에서 그러면 친절한 주인은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울고 있다.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반성합니다."
회사에서 제일 듣기 싫은 말 중에 하나가 "무슨 말하는지 알아들었지?"였다. "아니요"라고 몇 번 대꾸해 봤는데 "그것도 못 알아듣냐? 대학 나온 거 맞냐? 정신 안 차리냐?"가 돌아왔다. 짧은 3글자 대답에 몇 마디의 잔소리를 들은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이번엔 "네"라고 해봤다. "진짜 알아들은 거 맞아? 나한테 다시 설명해 봐!"라고 돌아왔다. 아찔해진다. 진짜 어쩌라는 거야. 나도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울고 있다. 그래서 후배들은 이런 고생하지 않게 매뉴얼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팀원들에게도 업무는 항상 매뉴얼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내가 한 번 고생하고 말자'라는 생각으로 업무프로세스를 문서로 작성해서 선배들과 팀장에게 컨펌받았다. 그리고 추가, 변경된 것들은 그 위에 차곡차곡 켜켜이 쌓았다. 기존 것들을 지우지 않고 취소선만 긋는 방식이었다. 나중에 인수인계할 때 그것만 정리하면 될 수 있게... 그렇게 해서 하나의 업무 역사책을 만들었다. 퇴사할 즈음 팀장 업무를 할 때, 신입사원 때 작성했던 업무 매뉴얼이 아직도 신입사원을 교육자료로 사용되는 것을 보고 뿌듯했다. 후배들과 팀원들이 물려받은 매뉴얼에 자신만의 취소선을 하나씩 늘려가면서 발전하는 모습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했다.
팀원으로 일할 때도 남들은 그냥 넘기는 자료를 잘 모아서 정리해 뒀다. 가끔 급하게 본사에서 혹은 팀장들이 자료작성을 요청한다. 그러면 정리해 뒀던 자료를 기반으로 빠르게 작성해서 답신했다. 내가 바쁠 때는 정리자료를 넘겨줬다. 내가 긴 시간 동안 모아서 정리한 자료가 누군가 급하게 필요할 때 요긴하게 쓰이는 것을 보면 매우 보람됐다. 말은 빨리 이해해서 바로 대답해야 하는데, 글은 깊게 고민해서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고 차분하게 적는다. 나이가 들수록 말은 줄이고 많이 들으라는 조언에 나는 한 가지 더 추가하고 싶다. 많이 쓰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