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내 길을 찾아가야 할 때인가 봐...
“너 왼손으로 칼질하니? 나는 우리 아들 왼손으로 칼질하는 줄 처음 알았네...”
왼손칼질을 아버지가 보면 뒷걸음질을 칠 정도로 깜짝 놀란다. 집에서 요리를 자주 하는 데도 볼 때마다 같은 반응이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100번은 들은 거 같다. 그럴 때마다 집에서 손하나 꼼짝 안 하는 아들로 보는 것 같아 속상할 때도 있다. 그만큼 오른손잡이 연기를 잘했나 보다. 그렇다 나는 원래 왼손잡이다. 어릴 때 아버지 앞에서 왼손으로 젓가락질을 하자 그때도 칼질때와 똑같은 반응을 보이며 젓가락질은 오른손으로 하는 거라고 했다. 나도 아버지 말씀이니까 아무 의심 없이 오른손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그런데 왼손잡이가 오른손으로 젓가락질을 하려니 아무래도 모습이 영 어색했다. 아버지는 오른손으로 하는 게 어디냐며 어색함까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나도 특이하다고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나이가 좀 들어서 알아차렸는데 '왜 나는 젓가락으로 김치를 못 찢을까' 고민하다가 다른 사람과 젓가락질을 다르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젓가락을 모아 쥐고 했는데 지금은 재현할 수도 없는 이상한 젓가락 질을 했더랬다. 이번에는 큰아버지 눈에 띄었다.
“젓가락질을 그렇게 밖에 못하냐?”
옛날 어르신들은 젓가락질로 가정교육이 잘되었는지 판단했다. 아마도 큰아버지는 집안 최고 어른이라서 가문을 중시하다 보니 나의 특이한 젓가락질이 눈에 띄었나 보다. 그래도 혼내고 벌준 것은 아니어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김치를 찢을 때는 양손에 젓가락을 하나씩 들고 하면 됐고 이미 익숙해졌고 크게 불편한 점도 없어서 그냥 생긴 대로 살았다. 그러다가 대학교 때, 정확히 상황은 기억나지 않는데 이번엔 교수님에게 걸렸다. 같이 식사를 하다가였는지, 강의 중에 젓가락질 얘기가 나온 거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이번 학기에 젓가락질을 제대로 하면 'A+' 주겠다고 했다. 그때 아마 일주일도 안 돼서 고쳤을 거다. 그렇게 'A+'를 받고 지금 모습으로 살고 있다. 그런 식의 엉뚱한 동기부여로 나는 하나씩 하나씩 고쳐졌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렇게 고쳐져서 편하긴 하다. 왼손전용 가위를 안 써도 되고, 학교에서 필기하다가 짝꿍과 어깨 부딪힐 일도 없었다. 한 손으로 김치도 찢을 수 있었다. 오른손잡이 세상에서 잘 살 수 있게 편해졌다. 칭찬까지 받고 점수도 잘 받았다. 남들 눈에 거슬리는 것이 없어졌다. 모난 돌이 점점 조약돌로 변했다.
그런데 지금은 깎여나간 부분이 그립다. 정확히는 깎여나간 가능성이 너무 아깝다. 요즘도 하는지 모르겠는데, 중학교 때 IQ검사 결과 비공식이지만 150을 넘었다. 담임선생님이 통지표에 써줬는데 생활기록부에 남아있는지는 모르겠다. 중학교 생활기록부를 볼 일이 없으니까... 선생님들이 멘사를 거론하며 엄청나게 기대했던 기억이 난다. 음악도 잘하고, 미술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다만 체육은 못했다. 특히 축구, 농구, 배구 같은 공놀이를... 몸싸움을 싫어하고 예술가적 기질이 많았던 것 같다. 만약 젓가락질을 오른손으로 바꾸지 않았다면 체육도 잘하지 않았을까라고 헛소리를 해본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IQ가 130대로 떨어졌다. 머리가 굵어져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동안 깎여나간 가능성이 그만큼이 아닐까라고 생 떼를 부리듯 주장해 본다. 그렇게 점점 깎여 가면서 겉은 모범적이고 반듯하게 성장한 했지만 속은 혼자서 엄청나게 방황을 했다. 정체성이 지금도 흔들리는 것을 보니... 칼질은 마지막 남은 왼손스킬이다. 이상하게 이것만은 안 고쳐진다. 동기부여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아버지는 칼질할 때마다 처음 본다고 하니, 문제의식조차 없었던 것 같다. 칼은 잘못하면 다칠 수도 있으니 설사 동기부여가 있다 하더라도 쉽게 고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면 나의 본능이 이것만은 끝까지 붙잡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지금은 그나마 칼질이라도 왼손으로 하고 있어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최근에 골프를 시작하면서 엄청나게 고민을 했다. 왼손으로 해야 하나? 오른손으로 해야 하나? 왼손으로 하면 연습장에 왼손전용 라인이 거의 없고, 스크린 골프도 왼손잡이 모드가 거의 없어서 힘들 거라고 했다. 그리고 골프채를 바꿀 때 기존 채를 중고로 팔려고 해도 왼손은 잘 안 팔리고 처음 살 때도 비싸게 줘야 한다고 했다. 모든 상황이 오른손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른손 골프를 시작하고 처음에는 어느 정도 수준까지 실력이 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실력이 답보상태에 머물면서 연습을 할 때마다 왼손 본능이 살아났다. 일이 잘 안 풀릴 때는 본능이 눈을 뜬다. 아! 그러고 보니 스크린 야구에서 배트를 휘두를 때 아직 왼손으로 친다. 칼질과 배팅, 두 가지 왼손스킬이 남아있다. 어쨌든 왼손 본능 때문에 밸런스가 무너지며 골프샷이 무너졌다. 특히 긴 채를 사용할 때, 난리가 났다. 드라이버는 공도 못 맞춰서 필드에서 항상 2 벌타를 먹고 OB라인에서 시작했다. 그러니 재밌을 리가 만무하다. 그래도 잘해보겠다고 계속 본능에 거슬러 연습을 하다가 오른쪽 갈비뼈에 금이 갔다. 왼쪽 갈비뼈였나? 하여튼 그렇게 골프를 접었다. 채를 중고로 팔려고 하니 나이키 골프가 골프채 사업을 접으면서 시세가 없다고 한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오른손 시작이었나… 동생이 골프를 새로 시작한다고 해서 그냥 줘버렸다.
남들 가는 길을 따라가면 ‘더 멀리, 더 쉽게, 더 효율적으로'갈 수 있다. 그런데 언젠가는 순위가 매겨지며 같이 가던 이들이 하나 둘 사라진다. 그러다가 나도 중간에 낙오되면 내 길을 찾아가게 되어있다. 지금 내 상황은 왼손 칼질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내 길을 찾아가야 할 것 같다. 그렇게 ‘덜 지치게, 덜 힘들게, 덜 스트레스받게’ 내 인생길을 ‘더 신나게, 더 재밌게, 더 여유롭게’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