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남자의 엄마 (제11화)

윗 집 빌런! 아랫집 상전! 앞 집 꼴통 (Spin-Off)

by 철없는박영감
제11화


선택되기를 기다리며 뒤섞여 있는 다양한 공허한 눈빛들 사이에서 세영은 단번에 은주를 알아봤다. 다른 사람이라고 오인할 수 있을 정도로 외모가 많이 바뀌어있었지만, 눈빛만큼은 그대로였다. 아니 전보다 더 오묘하고 비밀스러워 보였다. 어쩌면 다시 만나게 된 상황과 장소가 너무 뜻밖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녀가 스스로 의도한 짙은 화장과 성형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특유의 야릇한 분위기는 못 본 사이 분명히 몇 배는 더 짙어져 있었다. 그는 알아볼 수 있었다.


대학교 과 환영회에서 처음 본 은주는 다른 신입생들과 많이 달랐다. 복학생들과 비슷한 나이지만 처음 대학문턱을 넘어 본 세영과 다르게 다른 학교를 다니다가 왔다고 했다던가 그랬는데, 그래서인지 몰라도 눈빛이 아주 오묘했다. 얼핏 보면 그와 비슷하다고 하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나른한 눈빛이었지만, 어른의 눈빛이라고 할까, 안에는 분명 무언가 숨겨진 것이 꽉 차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서 풍기는 공허하고 나른하면서도 은밀한 분위기는 오묘하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선배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환영회 자리에서 과하게 행동하는 이른바 동기라고 불리는 아직 어린 녀석들은 그런 그녀의 눈빛에 꼬리를 내렸고, 풋풋함을 어필하려고 입은 듯한 짧은 치마가 영 어색한 어린 숙녀들은 마음이 맞을 것 같아 보이는 무리끼리 삼삼오오 모여 뒤에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캠퍼스에서 방귀 꽤나 뀌어봤다는 복학생들과 대학원생들만 그런 그녀의 분위기에 끌려 추파를 던졌다. 그때 그들은 그것을 캠퍼스의 낭만이라고 말했다.


세영의 눈으로 본 그때의 낭만은 '먹고 대학생'의 그것이었다. 입학만 하면 혈연, 지연에 버금간다는 학연이라는 끈으로 서로를 마치 칡덩굴처럼 얽히고설키게 엮었다. 그리고 끌어주고 밀어준다며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다른 편을 배척하며 정치질을 했다. 대학은 학문을 쌓는 상아탑이라기보다는 인맥을 쌓는 인간탑이었다. 그렇게 졸업만 하면 취직은 당연했고, 그다음은 정년까지 쭈욱 한 회사에서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들에게 직장은 그야말로 자아실현의 장(場)이었다. 그 초석이 바로 대학이었다.


뒤섞인 (Jumbled)


은주는 항상 돈이 필요했다. 가족을 버리고 떠난 아빠, 그런 아빠를 등에 업으려다 먼저 떠난 오빠, 두 남자의 상실로 술독에 빠진 엄마. 그렇게 혈연, 지연을 기대할 수 없는 그녀가 살 길은 학연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떻게든 대학에 들어가려고 발버둥 쳤다. 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일이 알아서 잘 풀릴 줄 알았다. 명문대만 들어가면 장학금으로, 과외나 아르바이트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악착같이 대학 입학금을 모았다. 입학만 하면 되는데, 그러기만 하면 되는데, 세상은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놔두지 않았다.


은주의 손에서 그녀의 운명을 양연이 뺏어 든 날. 모든 것이 뒤죽박죽 뒤섞여 도무지 분간이 되지 않게 되었다. 이후 그녀를 겹겹이 싸고 있던 소란함이 잦아들고 나서, 그녀는 주변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음을 문득 깨달았다. 멍했다. 적막했다. 그리고 외로웠다. 집에 가만히 있으면 이명소리만 가득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 감추지 않기로 했다. 자기 안의 모든 것을 꺼내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주변을 채우고 싶었다. 그녀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돈을 벌었다. 발악을 했다. 돈은 쉽게 벌렸다. 스스로를 버리자...


은주의 인생은 여러 명이 뒤섞이게 되었다. 낮에는 여대생으로, 밤에는 술집으로, 백화점에서는 부잣집 외동딸로, 호텔에서는 만인의 연인으로, 그녀는 점점 인생이 만만해졌다. 그날 세영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녀는 단번에 그를 알아봤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처음 본 진짜로 텅 빈 눈을 가진 사람. 꺼낼 것조차 남아 있지 않은 초점 잃은 눈으로 그녀를 꿰뚫었던 사람. 그래서 묘한 감정이 일었던 사람. 빈 곳을 채워주고 싶은 욕망이 들끓어 숨겨뒀던 비밀을 살짝 알려줬던 사람. 그래서 동시에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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