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남자의 엄마 (제13화)

윗 집 빌런! 아랫집 상전! 앞 집 꼴통 (Spin-Off)

by 철없는박영감
제13화


"저... 실례지만, 혹시 오세여...엉... 팀... 어! 맞죠? 팀장님 맞으시죠? 우와~! 하하하 이게 얼마만이에요~ 팀장님! 저예요... 저!"


여간해서는 잘 놀라지 않는 세영이었지만, 아파트 단지에서 뜻밖의 얼굴과 마주치자 어안이 벙벙해졌다. 다행히 실례되는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봐서 인지... 아니면 마치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갑자기 튀어나와서인지... 사고는 정지되었고, 그러면 안 되는데 배척하는 마음이 먼저 흘러나와버렸다. 그가 주저하고 있는 사이, 어떻게든 반가움을 표현하려고 발버둥 치는 듯한 부자연스러움이 상대의 입에서 먼저 흘러나왔다.


"팀장님 안녕하세요. 어! 저예요. 저... 못 알아보시겠어요? 앗! 모자를 써서 그런가? 자 이제 알아보시겠어요?"


"아... 어... 여상제 씨..."


"하하하. 네! 저 상제예요, 상제. 막내 상제...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어... 어쩐 일로... 여기는 어떻게...?"


"갑자기 말 걸어서 놀라셨죠? 죄송합니다. 저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 그러니까... 그게..."


"......"


"어... 그러지 마시고... 팀장님! 저 커피 한 잔만 사주시면 안 될까... 요...?"


회사를 나온 세영은 한동안 두문불출했다. 그러다가 거의 한 달 만에 외출하는 건데, 이렇게 거추장스러운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지금 앞에서 히죽히죽 웃고 있는 저 남자는 분명히 아는 얼굴인데 낯선 표정이었다.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아무리 떠올려봐도 그의 기억 속 사진첩에는 그에게 붙임성이라고는 일도 없었다. 왜 하필 이 남자란 말인가? 그를 놀라게 만든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한 명인...


커피숍에 마주 앉았지만, 둘 사이에 대화는 10분째 한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상제의 레퍼토리가 다 떨어졌는지, 세영의 무관심하다는 듯한 방어적인 단답형 때문인지... 둘 사이에 공기의 진동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런 반응이 익숙할 만도 한데,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은데, 계속 빙빙 돌아가는 둘 사이의 기류는 굽이치고 둘러쳐져 단단하던 반가움조차 점점 닳아 없어지게 만들고 있었다. 세영은 제발 그 얘기만은 아니길 바라고 있었다.


"팀장님!"


세영은 저 '팀장님'소리가 아까부터 불편했지만, 또 막상 상제에게 뭐라고 불려야 할지 애매했기 때문에 그냥 놔뒀다.


"...... 팀장님...! ...팀장님! 저도 팀장님 따라서 회사 그만두고 나왔습니다!!"


세영은 오늘이 세상에 태어나서 놀랄 일이 전부 한꺼번에 몰려오는 날인 것 같았다. 그는 마시던 커피를 차분히 뿜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상제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그는 그가 그런 일을 벌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네? 뭐라고요? 왜요? 왜 그랬어요?"


닳은 (Worn Out)


군기가 바짝 든 모습으로 서투르게 매어진 듯한 커다란 넥타이 매듭이 인상적이었다. 큰 덩치에 안 맞게 한껏 움츠린 자세로 앉아있는 상제의 모습은 거대한 바위 같았다. 좋은 인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자세히 보면 순둥순둥한 얼굴에 짧은 머리와 뽀얀 피부, 구김 없는 셔츠에 손수건을 쥐고 있는 모습이 청결한 분위기를 풍겼다. 여린 듯하면서 아직 애티를 덜 벗은 애송이로도 보였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바위같이 단단해 보였다.


그런 바위가 닳고 닳아 짱돌이 되고, 자갈이 되어, 모래알로 산산이 부서지는 데는 석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개발자의 삶이라고 하면 다들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오지만, 사람인지... 로봇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실제 업무강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정신을 차려보면 '난 누구, 또 여긴 어디?'라는 상황이 다반사이고, 새벽까지 이어지는 철야근무는 당연시되어 추가근무, 추가수당의 '추가'라는 말은 사치가 되었다.


원래 좁은 개울에서 넓은 바다로 나가려면 모래가 돼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나이가 조금씩 들어갈수록, 흔하디 흔하게 널려있는 모래알 중에 하나가 되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인가, 의미 있는 삶인가라는 의문이 커졌다. 하지만 마땅히 가져야 할 가장 큰 덕목이 '체력'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점점 닳아 없어지는 자신의 정체성을 더 이상 잃지 않고 지켜야겠다는 생각마저 닳아 없어지고 있었다.


막내가 할 일이라며 시키는 온갖 잡 일은 그나마 할만했다. 하지만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떠넘기듯이 넘어온 업무는 '선배, 선임, 사수, 상사'라고 이름 붙여진 이들이 조금만 신경 썼다면 쉽게 진행될 일들이었다. 마치 하수구 거름망에 음식물 찌꺼기가 쌓이는 것처럼 뒤죽박죽 섞여 온 업무를 보고 있으면, 자신도 그 속에서 같이 곰팡이가 슬 것만 같았다. 그런 상제의 버팀목이 되어준 사람은 세영이었다.


오세영 팀장님은 떠넘기는 업무는 물론, 막내라며 잡 일을 시키는 경우도 없었다. 상제가 실수를 해도, 실수는 너도 하고, 나도 하고, 누구나 하는 거라는 듯, 탓하기보다는 해결책을 찾는데 집중했다. 상제는 출근 일수가 쌓일수록 점점 팀장님을 존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자신이 거름망이 아니라 분쇄기가 된 것 같이 힘이 솟았다. 자기 안에서 공을 들여 성심성의껏 처리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평가도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상제는 세영을 도와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힘이 나는 존재는 부모한테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다. 의미 없던 날들에 의미를 부여해 줬고, 맞는지 의심되는 것들에 확신을 더해줬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사라졌다. 닳아서 없어진 듯, 분명히 저기에 있었는데 어느새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다. 입사한 뒤 처음으로 책상 칸막이 너머로 고개를 들었다. 어느 누구도 그의 증발에 관심이 없는 듯했다. 상제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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