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 집 빌런! 아랫집 상전! 앞 집 꼴통 (Spin-Off)
제14화
은주는 두 눈을 의심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지정헌혈을 했는데, '매독항체 판정보류'라는 결과지를 받았다. 믿을 수 없었다. 믿기지 않았다! '병이라니, 병이라니! 그것도 이런 더러운...! 신은 대체 나한테 왜 이런단 말인가? 내가 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단 말인가? 난 행복해지면 안 되는 건가? 나 대신에 그렇게 많은 사람을 데려가 놓고, 내가 대신 좀 행복하겠다는데, 왜 가만 두질 않느냔 말이다! 도대체 왜! 왜!'
자신의 몸으로 그런 몹쓸 것이 언제, 어떻게 들어왔는지 은주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고 싶지도 않았다. '도대체 왜 나한테만...!' 그녀는 어디든 따져 묻고 싶었다. 분노했다. 전부 불 질러버리고 싶었다. 오빠랑 너무 닮아서 밥 한번 같이 먹어줬던 지질하게 굴던 그 자식인가? 죽이고 싶도록 엄마가 밉다며 어리광 부리고 졸졸 따라다니던 그 어린놈 때문인가? 딸처럼 귀엽다는 말에 홀려 마음이 살짝 동했던 앞 집 사는 그 변태 새끼...?
'그런데... 그 사람은? 그 사람은 괜찮은 건가?' 생각이 세영에게 미치자, 다 불태워버릴 것 같던 은주의 분노는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어쩌지? 그 사람은 어쩌지? 그 사람한테 뭐라고 해야 하지?' 그녀는 도망이 먼저 떠올랐다. 그런데 어디로 도망쳐야 할지, 도망갈 데가 있기는 한 건지, 도망칠 수는 있는 건지 무서워졌다.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생기자 이성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는 바로 산부인과로 향했다.
은주는 이후로 집 밖에 나가지 않았다. 만약 꼭 나가야 하는 일이 생기면 한 여름이었지만 긴 팔 옷으로 온몸을 가리고, 장갑을 끼고, 모자를 푹 눌러썼다. 집안에서는 항상 목까지 올라오는 옷을 입고 카디건이나 외투를 걸쳐 2중, 3중으로 몸을 가렸다. 암막 커튼으로 창문을 전부 가리고 빛조차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아니 사실은 그 어떤 것도 새어 들어오지 못하게 걸어 잠그고 막았다.
"제 소견으로는 이상이 없어요. 그래도 계속 의심이 되시면, 어려우시겠지만 남편분과 상의를 하셔서 같이 내원해 보시는 게 나을 수도 있어요. 헌혈에서 판정보류라고 뜬 게 확실히 양성이라는 뜻은 아니니까요..."
은주는 이미 수차례 같은 소리를 들었지만, 또 다른 병원을 찾았다. 마치 자신은 꼭 그 병에 걸려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 뒤로도 몇 차례 헌혈의 집을 찾았지만 '매독항체 판정보류'로 거부당했고, 결과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눈에 띄게 예민해졌음은 인지하지 못한 채, 세영이 무슨 일 있냐고 묻는 가벼운 질문에 크게 신경질을 내고 말았다. 그녀는 더 빨리 지우고 싶은 조바심만 커지고 있었다.
다행히 은주와 세영은 잠자리를 자주 갖는 부부는 아니었다. 개발자인 그가 야근을 자주 하는 탓에, 그녀는 밤이면 혼자 집에 남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의 성격상 그녀가 뭘 하고 다니는 지도 크게 궁금해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런 그의 성격이 숨 막힐 정도로 답답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 대신에 찾아 나섰던 수많은 행복들이 이렇게 불행이 되어 돌아오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대신에 (Instead)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남자들의 은밀한 눈길을 즐기던 은주는 다른 남자들과는 다르게 자신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4층의 그 남자에게 계속 눈길이 갔다. 게다가 이상하게 아파트 단지에서 그 남자와 자주 마주쳤다. 보면 볼수록 훤칠한 키에 흰 피부, 특히 깨끗한 건초 냄새가 아주 매력적인 남자였다. 계속 마주치다 보니 어느새 눈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됐고, 그녀가 먼저 용기 내 말을 건 이후로는 친해지기까지 했다.
남자의 이름은 공석원이었다. 그는 착하고 순진했다. 다른 놈팡이들과는 남다른 구석도 있었다. 말도 잘 통했고 공감도 잘해줬다. 은주는 점점 그를 마음에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친구가 됐다. 그의 어머니가 수술로 수혈이 필요해서 헌혈증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에 그녀는 자원해서 지정헌혈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에게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녀는 더 이상 그의 앞에 나타날 수 없게 됐다.
은주는 석원이 보고 싶었다.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날은 세영의 생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리움을 못 이기고 술기운을 빌려 그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술 냄새를 풍기며, 무슨 말을 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단 하나 경멸하는 듯한 그의 그 눈초리는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집으로 돌아왔다. 더 이상 여기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이곳에 머무는 것은 더 큰 죄를 짓는 것 같았다.
은주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밤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 세영이 집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그를 현관에 세워둔 채, 그동안 왜 자신이 계속 이혼을 요구해 왔는지, 실상은 뭔지 그에게 모두 이실직고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듯 조용히 그에게 단호하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이혼해 줘!"
(계속)
※ 제가 주말, 다음주 월요일까지 일이 좀 생겨서 미리 발행합니다. 많은 이해 부탁드립니다. 계속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꾸벅 - 이모티콘이 뭔가 안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