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남자의 엄마 (제15화)

윗 집 빌런! 아랫집 상전! 앞 집 꼴통 (Spin-Off)

by 철없는박영감
제15화


미영의 폭탄선언에 주변에서 말리고 나섰다. 6년간 열심히 공부해서 면허를 따고, 인간이길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던 인턴도 끝냈다. 근무성적도 좋아 이제 돈 잘 버는 전도유망한 과로 가기만 하면 됐다. 꼭 돈이 아니더라도 원하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 가면 됐다. 그런데 정신과 전문의가 되겠다는 것도 아니고, GP*로 개원 하는 길도 전부 포기하고 심리학 공부를 하러 유학을 가겠다고 하니, 어느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미영은 확고했다. 사실 그녀는 얼마 전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처음 든 생각은 '치료하면 되지 뭐!'였다. 하지만 의료진이라는 이름으로 병원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치료한다'는 이 능동형태의 말이, 점점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다. 이치에 맞지 않았다.


'대체 무엇을 치료한단 말인가? 눈에 보이는 상처? 상처는 자연히 아문다. 아무는 시간 동안 덧나지 않게 하는 것 외에 뭐가 더 있단 말인가? 상처가 남기는 흉터는? 흉터도 보여야만 흉터인가? 생명연장? 수술로 암을 제거하고, 봉합하고, 재건하고? 그게 치료란 말인가? 진짜...? 살아있는 시간을 늘리는 것이 살리는 것인가? ...예방! 말이 좋아 예방이지 이것도 확률 싸움일 뿐이잖아. 비약하면 우연의 산물 아닌가?'


일단 '선택한 길'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명감은커녕 목적이나 목표도 없었다. 그저 주변의 동경하는 시선이 좋았던 적도 있다. 잘 닦인 탄탄대로를 고급차로 달리는,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 뜬 구름에서 언제 추락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커졌다. 그리고 미영은 지난날의 후회와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괴로워서 도망치고 싶었다.


미영은 자신 같이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의사가 되어 생명을 다루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했다. '치료한다'의 주어는 의사인가? 환자인가? 아니 조금 더 깊이 파고들어서 신인가? 인간인가? 그녀는 장례를 치르고, 친척들과의 유산분쟁을 끝내고, 조용히 수술대에 올랐다. 그리고 회복을 하면서 세영을 데리고 대학 원서를 쓰러 다녔다. 그의 합격 소식을 듣고, 그녀도 곧 유학길에 올랐다. 동생에게는 모든 것을 비밀에 부친 채...


미영은 과거를 떨치고 싶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조금이라도 덜어내고 싶었다. 정말 그러고 싶었다. 그래서 꼭 동생만큼은 능동적으로 치료하고 싶었다. 그녀는 '치료한다'는 능동형태가 말이 될 수 있도록, 진짜 치료를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했다.


다시 (re:)


"지금까지 너한테서 들은 증상들을 카테고리에 대보면, 망상장애가 심해진 조현병이라고 할 수 있겠지..."


세영은 일단 미영의 입을 통해 들은 병명이 알츠하이머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환자라는 낙인을 찍어서, 증상을 특정 병이라는 틀에 끼워 맞추면 그렇다는 것이지...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증상의 원인을 찾아 인과관계를 찾고, 증상을 억제시키려고 약을 쓰고, 입원을 시키고, 행동을 구속하는 것은 좀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세영은 자신의 누나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니 분명히 방금 전까지 같이 보지 않았는가? 못 알아보는 건 둘째 치더라도, 갑자기 사라져 엄동설한에 맨발로 눈길을 헤매질 않나... 여태껏 몰랐던 처남이라는 존재가 갑자기 튀어나오질 않나... 도대체 어떡하라는 것인지... 그가 생각하는 최선의 방법은 집에서 못 나가게 잘 감시하는 것뿐이었다. 아니면 병동에 입원을 시키든가...


"세영아... 표준화를 통해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것은 치료가 아니라는 거야. 음... 좀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과학이라고 하는 것들은 인과관계가 명확해진 법칙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100% 통제된 환경에서 재현이 가능하다는 것이지, 원상태로 복구시킨다는 뜻이 아니라는 거지... 그러니까 아휴...! 그냥 툭 까놓고 얘기하자... 네가 어머님의 증세를 악화시키고 있는 걸지도 몰라!"


(계속)


*GP (general practitioner) : 일반의. 전문의가 아닌 의사를 모두 일반의라고 한다. 보통은 개업의사들 중에서 전문의가 아닌 사람을 보통 일컫는다. [출처 : 의학, 간호 약어해설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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