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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없는박영감 Mar 12. 2024

논문 읽기를 시작했습니다

세상아, 한 발 다가가도 되겠니? (1)

외면


    알고 있었다. 의도적으로 모른 척한 것은 아니다. 정말 잊고 있었다. 


 "나도 대학교 다녔지? 졸업 논문 썼지?"


여기 브런치스토리나, 다른 작가들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요즘 무언가를 읽는다는 행위를 하고 있으면, 훨씬 1차원적인 질문이 떠올랐다.


 '제대로 읽고 있는 거 맞지?'


    최근에 구매한 책을 보니 '마이클 샌델' 저서 시리즈, '총균쇠', '군주론', 그리고 '인비저블'이 꽂혀있다. 아! 아주 좋은 책들이다. 아니 일 것 같다. 왜냐하면 아직 못 읽었다. 아니 안 읽었다. 책꽂이를 그럴싸하게 보이려고, 이 훌륭한 책들을 장식품으로 전락시키는 죄를 짓고 있다. 만날 진리를 찾겠다고 다짐하면서, 시간 부자라는 게으름을 핑계로 책을 드는 동시에 그동안 그럴듯하게 떠벌려놨던 딴생각을 먼저 펼쳤다.


    '어디를 더 광나게 청소해 볼까? 정신 차리게... 모아놓은 설거지를 할까? 이제 겨울옷 정리하고 봄 옷을 꺼내야 할 땐가? 산이 제법 푸릇푸릇하네... 등산을 시작해 볼까? 그럼 등산화를 사야 되는데... 백화점을 가볼까? 아! 아버지가 자전거 주신다고 했으니까 그걸 타고 중랑천변을 쌩하고 달려야겠네... 이걸 글감으로 쓰면 되겠다. 아~ 배고파. 커피 한잔 먼저 마시고 시작해야겠다.' 이렇게 내 좁은 세상에 더 집중하게 된다.


    재미없다는 핑계가 제일 잘 맞을 것 같다. '서울대생들이 제일 많이 읽은 책이라던데, 지식인이라면 이 정도는 상식으로 알아야지, 이런 고민정도는 해봐야 작가가 되지...'라는 생각으로 호기롭게 집어든 책인데, 솔직히 내 세상과는 많이 동떨어진 이야기였고 재미가 없었다. 요즘 재미있게 보고 읽는 것은 브런치스토리와 영화, 드라마 홍보를 위해 출연한 연예인의 인터뷰뿐이다. 이게 조금 더 와닿는다.


4족 보행


    나는 세상에서 점점 멀어짐과 동시에, 그 속에 갇히고 있음을 모르고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혼자 대장이 되어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같이 놀던 친구들은 자동차로 신작로를 달리는데, 나 혼자 다 늙어서 목에 보자기를 두르고 슈퍼맨 행세를 하고, 뒤가 훤한 고무줄 가면을 쓰고 아이언맨이 되기도 했다. 조금만 힘주면 부러지는 마른 나뭇가지를 엑스칼리버라며 휘두르고, 슈뢰딩거의 고양이들로 가득 찬 TV를 보며 세상을 평가했다.


    세상과 다시 친해져 보겠다는 생각에 자전거를 구하고자 했을 때, 아버지가 주워놓은 것이 있다면서 상태를 확인하러 본인의 일터로 한번 오라고 했다. 하지만 또 허리 디스크와 왕복 차비가 아깝다는 핑계를 댔다. 그러다가 순례길 걷는 사람들처럼 양손에 스틱을 짚으면 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집에 안 쓰는 등산 스틱 한 쌍도 있었다. 그렇게 중랑천변을 따라 나만의 순례길을 시작했다. 


    다녀와서 확인해 보니 건강앱에 왕복 15,000보가 찍혔다. 오랜만에 보는 숫자였다. 그동안 두문불출하며 3~4,000보 정도의 가벼운 산책만 하며, 엄두도 못 냈는데, 회룡역에서 녹양역까지 1호선 3~4 정거장거리를 왕복으로 다녀왔다. 양손에 쥐어진 스틱 덕분에 가능했다. 지원해 줄 무언가가 생기니 안심도 되고,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마주치는 타인들도 전보다 덜 무서웠다.


    분명히 걸을 수 있다. 걸을 줄 안다. 2발이 안되면 4발로 기어 다닐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외면했다. 오래 걸을 수 없는 몸상태와 아마 어디서 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불안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 좁아진 내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점점 약해지는 경제력과 그에 따른 돈벌이에 대한 압박과 불안함이 커지고 있다. 그래서 우선 등산 스틱을... 그다음에는 자전거를 찾고 있다. 그리고 논문을 읽기 시작했다. 


    궁금한 키워드들을 검색창에서 검색하는 대신에... 나무위키, 위키피디아 같은 편리함을 추구하는 대신에... 논문 사이트에서 검색하니 15,000보를 걸을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어디를 걸어야 할지 불안해하던 마음이 조금 느슨해졌다. 책장에 장식하지 않아도 되고, 오래된 논문이라도 그 안의 명확함과 잘 정리된 통계자료들은 이제는 무엇을 읽고 있는지 보다 제대로 읽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논문 읽어볼 만하다. 주제도 다양하고, 영감도 얻을 있다. 


무엇보다 '카더라'에서 해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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