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남자의 엄마 (에필로그)

윗 집 빌런! 아랫집 상전! 앞 집 꼴통 (Spin-Off)

by 철없는박영감
에필로그


그날 세영은 오랜만에 꿀맛 같은 낮잠에 빠져 있었다. 어느새 살짝 다가온 봄기운이 꽃향기를 가득 머금은 포근한 바람을 살랑살랑 실어 나르고 있었고, 그 속의 향긋하고 몽롱한 취기가 온몸의 힘을 빼앗아감과 동시에 품 안에서 쌔근대는 쫑이의 체온이 눈꺼풀에 노곤노곤한 무게를 더하고 있었다. 그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정말 잠깐 감았다 떴는데, 집안으로 걸쳐진 꽃나무의 그림자가 훌쩍 자라 있었다.


세영은 창문을 닫고 정수기로 냉수를 따라 마셨다. 물을 마시며 둘러본 집의 느낌이 싸했다.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느낌을 되짚어갔다. 양연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화들짝 놀라 서둘러 현관을 나섰다. 다행히 바로 문 앞에 그녀가 있었다. 하지만 섬뜩한 눈빛과 함께 가만히 서서 딸의 이름을 되뇌고 있었다. 그는 얼른 그녀의 손을 잡아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얌전히 잡아 끄는 대로 이끌려오는 양연의 몸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뚝뚝 떨어지는 미련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는 신경이 곤두섰다. 또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은 아닌가 걱정됐다. 곧 시끌시끌한 소리가 복도에서 들려왔다. 현관문 앞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가만히 상황을 살피던 그가, 얼굴만 빼꼼히 문 밖으로 내밀자 밖에서 웅성거리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쳐다보며 질문들을 쏟아냈다.


"아...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저희 어머니가 그러신 것 같은데... 저도 자다가 일어나 보니 어머니가 안 계셔서 깜짝 놀라 나와보니 문 앞에 계시더라고요. 얼른 모시고 들어왔는데... 이런 일이 있었는 줄은 몰랐네요. 죄송합니다. 저희 어머니가 좀 편찮으세요..."


현관문 너머 그의 집 안쪽에서는 커다란 TV소리와 쫑이의 짖는 소리만 들려왔다.


술주정


축 늘어진 세영이 정육점 강사장과 제과점 안사장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왔다. 양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그녀의 안색에 화가 많이 났다고 생각한 두 사람은 벌 받는 듯한 난처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아이고, 어머님.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 이상하게 초장부터 오사장이 막 달리더라니... 조금 전만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오는 길에 갑자기 정신을 잃고 길바닥에 넘어지는 바람에 결국 이 사달이 났네요. 아이고 잘생긴 얼굴이 이렇게 돼서 어째! 쯧쯧. 오사장이 아무래도 상가번영회 일로 요새 많이 힘들었나 봐요. 어머님. 아휴~ 옆에서 잘 말렸어야 하는데, 이거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두 사람이 그들 사이에 매달려 있는 세영의 얼굴을 흔들어 깨우자, 그가 현관문도 열어놓은 채 아파트가 떠나가라 큰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아~! 형님들! 우리 사랑하는 형님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내가 우리 형님들을 안 사랑할 수가 없어요. 그렇죠?"


그러다가 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양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 앞에 서서 푸념을 늘어놓으려고 하자 두 사람이 얼른 앞을 막아서고, 토닥이고, 말렸다.


"이봐~ 동생. 아니 오사장... 오늘 많이 취했네 그려. 어머님이 많이 걱정하시니까 그만하고 얼른 자자... 응?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내일 맨 정신에 다시 얘기하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세영을 보면서 양연은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 날마다 술에 취해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 지르며 어머니를 괴롭히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점점 그녀의 표정이 돌아왔다.


"엄마! 앞 집에 문... 예? 그걸 또...! 예?......"


그는 무슨 정신이었는지 인사불성이 된 상태에서도 입 밖으로 꺼내려던 말을 도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부축하고 들어온 두 사람에게 더 의지해 축 늘어졌다. 어찌어찌 겨우 소파에 눕히자 이내 코를 골며 곯아떨어졌다.


"오사장, 이제 잠들었나 보네요. 어머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는 이만 갑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들이 돌아간 뒤에도 세영의 술주정 같은 잠꼬대가 한동안 계속됐다.


"음냐음냐...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거예요 정말...! 예? 음냐... 왜! 음냐...."


양연은 소파에 누워있는 그의 옷과 양말을 벗기고, 따뜻한 물수건을 가져왔다. 얼굴을 닦아주려는데, 쓸린 상처가 나있었다. 그녀는 조심조심 정성을 다해 그의 얼굴을 닦고 약을 발라주었다. 그러면서 혼잣말을 시작했다.


"그러게 왜 그랬을까? 그때 하루아침에 가족을 먹여 살리지 못하게 된 아버지의 무너지는 마음을 왜 외면했을까? 전쟁통에 부모를 일찍 여의고 늘 엄마의 사랑이 고팠던 은호 아버지의 마음을 왜 외면했을까? 아버지 없이 자란 아들의 그리움과 애틋함을 왜 외면했을까? 그때 외로웠던 은주의 마음을 왜 외면했을까? 난 그저 그 사람들한테 용서를 받고 싶었나 봐. 그리고 앞집에 가면 왠지 그들이 다 있을 것 같았어... 난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 있을 때 잘할걸... 외면해서 없어지고 난 후에야 후회하며 그것들을 되찾으려고 좇으며 살아온 것 같아. 미안해 오서방... 아니 늘 내 앞에 있어주는 우리 아들 세영이... 엄마가 미안해."


세영의 거친 숨소리가 점점 평온해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