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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없는박영감 Apr 25. 2024

세상이 열리고, 그 안에 갇히다

2024년 04월 셋째 주

문자생활


    이름을 쓰고, 알파벳을 읽으며 점점 문자생활로 접어드는 조카를 보고 있으면 참 대견하면서도, 앞으로 고생길이 훤하다는 생각에 안쓰러운 마음도 듭니다. 길에서 간판이나 매체의 자막으로 보는 문자들이 아이의 머릿속에서 형태를 잡아가며 규칙을 알게 되고, 마침내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 아이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문자의 의미는 한번 파악하기 시작하면, 다시는 몰랐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못 알아보고 싶어도 그냥 보는 즉시 이해가 되는 디폴트 값이 됩니다. TV, 영화를 보면 기억상실증에 걸려도 글자는 읽을 수 있습니다. 많은 불편한 것이 해소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문자의 힘 덕분에 혼자서 많은 것들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아이의 문자생활은 실생활에 기반하여 진행되다가, 커가면서 점점 추상적인 것들로 관심이 옮겨가겠죠. 사랑을 알게 되고, 우정을 알게 되고, 도리, 예절, 규칙, 법을 알아갈 겁니다. 


    그때가 되면 저도 나이가 들었구나라는 생각보다 늙었구나라는 생각이 들 겁니다. 아이와도, 혀 짧은 소리로 같이 깔깔대고 웃기보다는, 토론을 하거나 질문을 하거나 질책을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아예 말을 안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아이는 새로운 세상에서 체면을 배우게 되면서 아마 자신을 점점 속이게 될 겁니다. 배가 고파도 참을 줄 알고, 울고 싶어도 입술 꽉 깨물고, 슬퍼도 웃고, 힘들어도 내색 안 하는... 어른이 되겠죠?


    아이는 살아갈수록, 나이가 들 수록, 점점 세상이 좁고, 답답하게 느껴질 겁니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해서 이런저런 사고도 치고, 실수도 하고, 상처받고, 상처 주고, 좌절하고, 보람도 느끼겠죠. 그러다가 한참 뒤에 스스로의 한계를 아는 날이 올 겁니다. 좁고, 답답하던 세상이 실은 무서운 데였다는 것을 깨닫겠죠. 아마 그때즈음엔 저는 세상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을 열어 줬지만, 갇히게 했습니다. 


아이는 그렇게 한 단계 더 성숙해져 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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