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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없는박영감 Jul 18. 2024

[소설] 석원과 상제의 어쩔 수 없는 이야기

어쩔 수 없이 제3화 : 그에게서 듣는 그의 이야기 (2)

어쩔 수 없이 할 수 있는 게 없는 (There is nothing I can do)


    아이스크림 사러 갔다 돌아올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굳게 닫힌 현관문에는 도어록 비밀번호 누를 기미조차 없다. 머리로는 '혼자 마음 추스르고 들어오게 내버려 둬야지'라고 생각하지만, 불안감은 가시지 않는다. 안절부절못하여 폰 화면에 통화를 누를까 말까 한참 고민하고 있는데, 휴지통 뚜껑으로 살짝 삐져나온, 찢긴 포스트잇 메모가 눈에 들어온다.


 「...... 치료할 수 있대...」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한 충격에,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찢겨 버려진 메모를 찾아서 이어 붙여 본다. 단단해 보이는 글씨체가 상제 어머님이 쓰신 듯한 메모였는데, 그 안에는 그의 억장을 무너뜨릴 내용들로 가득했다. '성적지향은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다'가 정설로 받아들여진지 이미 오래다. 그래서 정신질환이 아니라는 것이 동성애를 대하는 공식적인 입장이다. 그런데 '전환치료라니... 입원이라니... 아직도 이런 데가 있나?' 더 이상 그를 혼자 둘 수 없다. 바로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데, 현관문에서 드디어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나 왔어~!"


    현관문으로 들어서는 그의 모습을 보자 안심이 되면서 안도감에 맥까지 풀린다. 신발을 정리하고 있는 그를 향해 돌진한다. 그리고 그를 돌려세워 있는 힘껏 끌어안는다. 목덜미로 갑작스러운 포옹에 놀라 어리둥절해하는 그의 호흡이 느껴진다. 그리고 당황한 나머지 목석처럼 뻣뻣하게 굳은 그의 몸도 느껴진다. 아마도 팔은 어찌할 바를 몰라 그냥 늘어뜨리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가슴이 맞닿은 부분에서 그의 외로움과 아픔이 심장박동으로 전해져 온다. 눈물이 와락 쏟아진다.


 "어~! 어! 왜, 왜?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어? 왜 그래 갑자기?"


 "잘 돌아왔어. 잘 돌아왔다 상제야. 미안해. 그동안 많이 외로웠지? 그동안 혼자서 애끓느라 지금 속이 네 속이 아닐 거야? 정말 미안해 상제야. 너랑 더 빨리 만났어야 하는데..., 더 빨리 알아봤어야 하는데... 더 빨리 찾았어야 하는데... 미안해... 미안해..."


 "형~! 진정해 봐! 왜 그래? 응? 무슨 일인데 그래? 또 드라마 봤어? 이리 봐봐. 얼굴 좀 봐봐! 어휴~ 뭔데 이렇게 울고 그래?"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순식간에 벌어진 격한 감정표현 때문에, 여전히 상황파악이 안 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려 자신을 꼭 끌어안고 있는 흐느끼고 등을 감싸고 토닥인다. 그의 손길에 조금 진정이 되고 나서, 와락 끌어안았던 팔을 풀어 손에 쥐고 있던 이어 붙인 포스트잇 메모를 그에게 보여준다.


 "이거~!...... 미안해 읽으려고 읽은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까 휴지통에서... 흑흑흑"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가운데서도, 지금 가장 마음 아픈 사람이 그 자신일 텐데도, 금방이라도 또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상대방의 표정을 살피며 환한 미소로 도리어 달래는... 그는 그런 사람이다. 이렇게 어리광 부리는 것 말고는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속상해하는 마음을 도리어 토닥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 보면 10살 나이차이가 무색하게 그는 참 의젓하고, 어른스럽다. 이런 말 듣는 것을 싫어하지만, 그는 옆에 있는 것만으로 든든하다.


 "어휴~! 이걸 봤어~요. 우리 형이? 그래서 이렇게 날 위해, 대신 눈물 흘려주는 거에~요? 어~후~ 고마워라."


 "어흑~ 어흑~! 그게~ 어흑! 그동안 네가 얼마나 외로웠고~! 어흑! 얼마나 아팠을지~ 생각하니까~ 어흑~ 나도 모르게... 그만... 어흑흑..."


 "음... 괜찮아 괜찮아... 이제 그만 뚝~! 나 괜찮아... 형... 이제 형이 계속 내 옆에 있어 줄 거잖아~ 그래서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우와~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 이렇게 있으니까 기분이 훨씬 빨리 홀가분해진다. 짜잔! 봐 이렇게 방긋방긋 잘 웃잖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 뚝 그치자~, 뚜욱~"


 "...... (꿀꺽)뚜욱......, 아휴~ 진짜... 속상하게 이게 뭐야? 어디 좀 봐! 왜 또 이렇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카맣게 입고 나갔었어? 모자에 마스크까지... 안 답답해? 아 진짜 속상하다! 둘이 있을 때는 이렇게 밝고, 잘 웃고, 잘 떠들고, 애교도 많은 애가... 왜 밖에만 나가면 가리고, 위축되고, 경계하고, 의심하고 그래? 응?"


그렇다. 그는 집에 있을 때와 밖에 있을 때, 온도차이가...


극과 극이었다.


    그는 중학교에 올라가게 되면서, 여자 아이들 무리와 떨어진다는 사실에 그나마 조금 숨통이 트였다고 했다. 하지만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사라지지 않는 죄책감 때문에 자기혐오는 극에 달했다고 했다. 게다가 중학교에는 초등학교에서는 잘 볼 수 없었던, 젊은 남자 선생님들이 꽤 많았다고 했다. 특히 체육 선생님들과, 겨우 두 살 차이인데도 성인 남성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성숙했던 형들이 그를 시험에 들게 했다고 했다. 그는 특단의 조치로 방을 온통 여자 연예인 사진으로 도배했다고 했다.


    혹시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아니면 혹시 일반적인 남학생 코스프레를 계속하다 보면, 비정상적인 게 좀 나아지려나, 고장 난 게 좀 고쳐지려나 기대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당시 그의 욕정의 대상은 사진 속에서 그를 향해 웃고 있는 그녀들이 아니었다고 했다. 햇빛에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윤기 나는 피부와 헐렁한 트레이닝복으로도 숨길 수 없는 근육질 몸매를 가진 체육 선생님들과 하굣길 운동장에서 땡볕에 구슬땀을 흘리며 연습하는 축구부 형들이었다고 했다.


    그런 날들이 계속될수록 그는 점점 더 죄책감에 빠져들었다고 했다. 동시에 감춰둔 금단의 욕망에 대한 갈망 또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고 했다. 이런 극과 극의 감정 때문에, 그는 지금 다시 생각해도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방법으로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가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 15살의 그는 '파블로프의 개'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여성의 나체 모습에 조건반사적으로 발기가 될 수 있도록 사진 앞에서 자위 훈련을 했다고 했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어린양은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정상처럼 보이고 싶었나 보다. 아니 비정상을 들키기 싫었나 보다. 원래부터 비정상이 아닌 것을... 원래부터 죄가 아닌 것을...


    초반에는 무척 힘들었지만, 몇 번 해보니까 슬슬 몸에 반응이 오더란다. 어느 순간, 여성의 나체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조건반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했다. 처음 성공했을 땐 드디어 정상이 되었다는 기쁨과 남자가 되었다는 자부심에 내면의 짐을 조금 내려놓은 듯, 몸도 마음도 가벼워졌다고 했다. 자기 안에 있던 성적 낙인도 노력으로 깨끗이 지울 수 있다는 성취감에 '정말 노오력하면 안 되는 게 없구나'라는 자신감도 붙었다고 했다.


    그렇게 정상적인 자신을 되찾는가 싶었는데... 그날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훈련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고 했다. '팔 아프다'는 생각이 들면서, 땀이 많이 나고 찝찝해서 '샤워나 할까'라는 생각이 들더니, 잠시 딴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의문이 들었단다.


 '그냥 여자가 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럼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거잖아? 나 여자가 되고 싶은 건가? 난 여자인가? 어라~...... 그건... 아닌데...!? 난 남잔데... 나 남자 맞는데... 여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요만큼도 없는데...! 난 그저 남자가 좋을 뿐인데!'


그동안 그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고 했다. 전환점이었고, 새 출발의 시점이기도 했다고 했다. 다시 괴로움의 날들이 시작됐지만, 예전과는 달랐다고 했다. 괴롭기보다는 허무해졌다고 했다. 그래서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대신 책을 읽고 사색을 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깊은 고민 끝에 정체성에 대한 한 가지 확실한 결론을 내리고 그는 방안의 모든 사진을 떼어버렸다고 했다. 그리고 더 이상 자신의 몸을 괴롭히는, 이름만 위로인 훈련도 그만뒀다고 했다. 그때 그가 내렸던 결론은...


난 나야


    그렇게 그는 육체적 욕정에서 조금 자유로워졌다고 했다. 말하자면 성숙해진 것이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이보다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했다. 이전까지는 선생님이나 선배, 혹은 연예인 같은 성숙한 남자 어른에 대한 동경이었다면,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는 이제 2차 성징이 어느 정도 완성 단계에 이르면서 정서적 교감을 나누게 되기 시작했다고 했다. '사랑'이었다.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으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한 교실에서 같은 공부, 같은 운동을 하며 반친구들과 정이 들었고, 소풍, 수학여행, 체육대회 등 학교 행사를 통해 동급생들과의 교감을 나누기 시작했다고 했다. 물론 그들에게는 '우정'이었지만, 그에게는 '사랑'이었다. 그의 사랑은 100% 짝사랑이었다. 동시에 여러 명을 사랑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나 좋자고 상대방이 싫어할 만한 것을 강요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홀로 마음 접고 돌아선 대상이 한 트럭은 될 거라고 했다. 물론 자신의 치명적인 비밀을 고백할 용기가 없었음이 더 큰 이유였을 수도 있다.


 '만약 그때 용기를 냈더라면 지금은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까?'


    그가 지금도 가끔 상상하는 일이라고 한다. 통계적으로 남성 인구의 5%는 동성애자라는 보고가 있다. 만약 그때 5% 의 다른 한 명을 그가 만날 기회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5%의 대부분은 그들의 정체성을 꼭꼭 숨긴 채 평생을 살아간다. 혹자는 이성애자인 척 자신을 속이며 살아가기도 한다. 자기들만의 폐쇄적인 공동체를 형성해서 살아가거나 대중에게 정체성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사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게다가 생긴 대로 살겠다고 커밍아웃했다가 신변의 위협이 가해지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면 5%라는 통계치는 적게 잡힌 것이라고도, 혹은 그가 운명의 상대를 만날 행운의 확률이 5%가 채 안 될 수도 있다고도 해석될 수 있다.


    만약 5%가 정확하다고 해도, 그 안에서 운명적인 누군가를 만나서 가족이 될 확률을 따지자면, 단순히 산술적으로만 계산해도 5%끼리 모이는 확률과 같을 테니, 5% X 5% = 0.25% 가 된다. 동성 간의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종교적, 관습적 관념에 의한 것뿐만 아니라, 이런 극악의 확률 때문에 고독하고 불행한 미래가 뻔히 보이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이런 낙천적인 해석도 가능하다.


우리는 무려 0.25% 밖에 느낄 수 없는 행복을 거머쥐었다.


    그렇게 찬란하지만 슬펐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어서는 단체보다는 개인을 중시하는 생활을 하며, 그동안 무리 속에 끼어서 겪어야 했던 고뇌와 방황에서 어느 정도 해방됐다고 했다. 물론 '커밍아웃'까지 할 용기는 없었고, 그저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 여유가 좀 더 생기고, 관대해지고, 스스로를 더 아끼게 되었다고 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점점 행복해지면 될 줄 알았는데... 미성년자라는 딱지를 떼고 나자, 환경이 그에게 사회관계적 의무를 하나씩 지우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 첫 번째가 군대라는 시련이었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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