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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없는박영감 Jul 17. 2024

[소설] 석원과 상제의 어쩔 수 없는 이야기

어쩔 수 없이 제2화 : 그에게서 듣는 그의 이야기 (1)

어쩔 수 없이 참을 수 없는 (I can't help it)


    그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아마도 분명 이럴 줄 알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굳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지 않아도 어떤 표정일지 상상이 된다. 그래 안다. 알고 있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알면서도 멈추지 못할 때가 있다. 지금이 딱 그런 때다. 이럴 땐 그냥 안면몰수하고 눈앞에 맞닥뜨린 것에만 집중하는 편이 낫다. 이것은 40년 넘게 살면서 터득한 몇 안 되는 인생살이 비법 중의 하나다.


    하지만 서로 남이었던 관계가 사랑으로 가족이라는 인연으로 맺어지며 나이와 상관없이 반말이 오가는, 강제적으로 공평한 부부관계에서나 통할까? 아직 서로가 상대방을 더 사랑하고 있음을 경합하며 콩깍지에 쓰여있는, 자발적으로 불공평한 연인관계에서는 하나도 소용없다는 사실 또한 지금 깨닫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한 번 터진 것은 잘 봉합되지 않는다. 설사 봉합된다 하더라도 상처가 남기 마련이다. 슬슬 스스로 제어가 안 된다. 이젠 진짜 어쩔 수가 없다.


 "후루룩, 후루룩"


 "와~ 세 개 안 끓였으면 어쩔 뻔했어? 난 입도 못 댔겠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예? 공석원 씨? 저기요~! 아저씨? 아~ 놔~ 자꾸 못 들은 척하실 거예요?....... 쳇! 진짜~ 일말의 양심이라도 남아있으면 설거지는 알아서 해라~!"


    맞은편에 앉아서 면치기에 점점 진심이 되어가고 있는 사람을 잠자코, 하지만 기가 찬다는 눈빛으로 보고 있던 그가 참다못해 결국 입을 열었다. 뜨끔한 순간이지만, 어떻게든 무마하려면 아무 말 대잔치라도 벌여야 한다.


 "꺼억~! 우와~ 진짜 잘 먹었다. 허허~ 야~ 김치가 예술이네. 김치 한 입 딱 먹는 순간... 이건 게임오버! 그냥 끝났네 끝났어! 이건 김치가 아니라... 뭐라고 할까... 아! 물론 네가 라면을 잘 끓인 것도 한 몫했겠지~만! 그런데 김치가... 우와~ 진~짜 끝내준다. 국물이 끝내주는 게 아니라. 김치가 끝내준다. 끝내줘. 캬~ 하여튼 은영누나네 김치는 정말... 우리가 이웃 하나는 잘 만난 거 같아. 그렇지? 공감하지? 음... 새 김치라 그런가? 평소보다 더 맛있네. 근데 은영누나 나 모르게 언제 왔다 갔냐? 다음에 좋은 걸로 선물이라도 해야겠다. 고맙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키킥!"


    그런데 그의 표정에 갑자기 슬픔이 번진다. '라면 한 젓가락이 한 그릇 된 게 그렇게 잘못한 일인가? 아니면 라면 잘 끓였다는 말 대신, 짓궂게 김치만 칭찬한 게 그렇게 기분 나빴나? 장난인 줄 알 텐데...' 조금 의아했지만, 그래도 '건강 걱정해 주는 거겠지'라고 생각을 고쳐 먹는다. '그래, 역시 내 건강 챙겨줄 사람은 너밖에 없구나. 다 먹고 나면 같이 나가서 아이스크림 사 먹고, 산책하고 오자고 해야지' 그런데 그와의 대화가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 아니야..."


 "어? 뭐라고?"


 "이거 은영 누나네 김치 아니라고..."


 "어? 그래? 어쩐지 평소 먹던 맛이랑 많이 다르다 싶었어. 어디서 난 거야? 샀어? 야 이거 진짜 맛있다. 완전 제대로 전라도 김치인데? 김수미~ 뭐 거기 건가? 홈쇼핑에서 김치 사면 대부분 망한다던데... 이 정도면 앞으로 홈쇼핑에서 사 먹어도 되겠어... 이야~ 이거 진짜 예술이네..."


 '어쩐지 분리수거함에 스티로폼 박스가 있더라니~, 나의 예리한 관찰력이 빛을 발하는구나~! 칭찬해 어서~ 이런 나를 칭찬하라고...' 이렇게 속으로 자화자찬을 하며 김칫국을 마시고 있는데, 완전 예상 밖의 대답이 돌아온다.


 "...... 우리 엄마!"


 "어? 뭐라고?"


 "우리 엄마 김치라고...!"


    나도 모르게 다리를 모으고, 허리를 곧추 세우며, 정자세로 앉는다. 너무 갑작스러운 얘기에 당황한 나머지 표정관리에 실패했다. 얼굴에 장난기가 싹 가신다. '표정 굳은 거 눈치챘으려나?' 곁눈질로 살짝 그의 표정을 살핀다. 그다지 좋지 않다. 그는 입맛이 떨어졌는지, 아니면 라면 가닥수라도 세려는지, 젓가락으로 면발을 집었다 놓았다, 먹지는 않고 계속 애꿎은 그릇 소리만 '쨍쨍' 내고 있다.


 "어... 어머님... 오셨다 가셨어...?...... 언제? 갑자기 그렇게... 무슨 일로... 어떻게 오신 거야? 그나저나 내 물건 숨기느라 네가 고생 좀 했겠네. 미안~. 내가 앞으로는 한 번에 치울 수 있게 한 곳에 잘 모아놓을게, 아니... 아예 싸가지고 다닐게~ 상제야. 미안. 어머님... 배웅은 잘해드렸어?"


 "아니... 직접 갖고 온 건 아니고... 엄마가 언제 우리 집 오는 거 봤어? 알잖아... 나 집에서 쫓겨나고 의절당한 거... 그냥 문 앞에 택배가 와 있더라고..."


 "아~ 그래? 그래 그랬지? 그렇게 얘기했었지? 참!"


 "뭘 그렇게까지 숙연해져... 에이~ 라면 맛있게 먹고 배부르니까 괜히 쉰소리만 나오네... 설거지해 줄 거지? 하고 있으면, 내가 아이스크림 사 올게... 어때?"


 "어...! 그래... 상제야. 설거지는 내가 할게. 당연히 내가 해야지... 그럼... 그렇고 말고.... 나 설거지 없어서 못하는 사람이야... 설거지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국물 다 마시지 말고, 꼭 버리고... 그거 다 마시면 의사 선생님한테 가는 날이 진짜 더 빨라질걸? 알았지? 아이스크림은 할인점에서 600원짜리 아무거나 사 온다?"


 "어어! 그래. 다녀와~ 천천히 다녀와~ 설거지 끝날 때까지...... '띠리릭~'...... 오지 마~ 알았... 그래, 벌써 갔구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현관문 여닫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 현관문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날려본다.


 "에휴~ 뭐! 바람 좀 쐬고 오면 괜찮아지겠지... 아휴 하여간 이 놈의 입이 방정이지~ 아주 그냥! 콱~! 아 몰라! 설거지나 깨끗이 해놓자~!"


    설거지도 마치고, 시간이 제법 지났는데,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 '밖에서 혼자 뭘 하고 있는 걸까?' 전화를 해볼까도 생각해 봤지만, 혼자 있는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로 한다. 그는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다. 술은 거절하기 힘들 때 어쩔 수 없이 한 번씩 하지만, 즐기지 않았다. 평생 혼자 살 생각에 스스로 건강도 챙겨야 하고, 돈도 허투루 쓸 수 없어서 담배는 시작도 안 했다고 했다. 그렇다. 그는 어릴 때부터 고독을 준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단 돈은 좀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용돈이 생기면 무조건 저축하고, 어릴 때부터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아끼고 저축해서 차곡차곡 모았다고 했다. 그는 위험을 감수하고 투자하는 성향은 아니었다. 그렇게 서른두 살에서 서른세 살로 넘어가던 해, 물론 거의 대부분 대출을 끼기는 했지만, 아파트도 장만했고, 프리랜서지만 꾸준히 일을 하면서 자금도 모으고 있다고 했다.


    그러다가 나이를 좀 먹고는, 고독도 즐길 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래서 세상과 대화를 시도해 보려고 마음먹은 시기에 나를 만났다고 했다. 어느 날인가 집에서 시시콜콜한 대화를 하다가 나온 그의 이야기들이다. 그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게 됐을 때, 그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알고 싶다는 욕망에 어쩔 수 없이 언제 자신이 특별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물었다. 실례를 무릅쓰고 단도직입적으로...


넌 언제부터였냐고~


    그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6학년에 올라가면서부터였다고 했다. 정확히는 5학년 겨울방학. 같은 반 여자 아이가 서울로 전학 가게 되면서, 송별회 비슷한 것을 하게 됐는데, 그 자리에 그도 초대받아서 가게 됐다고 했다. 학교 앞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고, 방학이라서 조용한 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남자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철봉에 매달리며 놀고, 여자아이들은 벤치에 모여 수다를 떨었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아이들 무리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어머~! 미쳤나 봐~! 얘~!"


그 비명소리에 반응해 남자아이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여자아이들 무리로 모여들었다고 했다.


 "왜~? 뭔데, 뭔데?"


 "너희들은 몰라도 돼! 우리들만의 비밀이니까~!"


 "칫! 재미없게... 비밀은 무슨... 금방 말할 거면서..."


 "하여튼 너네들은 몰라도 되니까~ 그냥 하던 일이나 계속해~!"


 "그래 됐다! 야~! 상제야, 학교에 축구공 있나 한번 찾으러 가볼까? 얘들아 축구공 찾으러 가자~!"


 "오~케이!",  "오케이!"


남자아이들 무리가 사라지자, 여자아이 무리 중에서 한 명이 그에게 당차게 말을 걸었다고 했다.


 "야~! 여상제~ 너 이리 잠깐 와 봐~"


그러자 오늘 송별회의 주인공이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뜯어말렸다고 했다.


 "야 됐어~ 됐어~ 미쳤나 봐~ 아후 난 몰라~ 얘~ 됐어 됐다고~ 그만해~"


 "뭐 어차피 전학 가면 못 볼 거잖아~ 그냥 말해~"


덩치만 컸지 순둥이었던 그는 여자아이들 무리의 호출에 순순히 따랐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송별회의 주인공이 얼굴이 새 빨개진 채 쭈뼛거리며 머뭇머뭇하자, 조금 전 그를 불렀던 당찬 여자아이가 대신 나서서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소정이가 네 아이를 낳고 싶데~"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변에서는 비명인지, 환호인지 모를, 아무튼 큰 소리가 터져 나왔고, 그 소리에 축구공을 찾으러 갔던 남자아이들도 모여들었다고 했다. 그때 그는 어쩔 줄 몰라 그 자리에 얼음이 되어버렸고, 그런 와중에도 계속 기억을 되짚어 봤지만, 그 여자아이와 같이 뭔가를 한 적도 없고, 특별한 교류도 없었으며, 게다가 짝꿍도 아니었고, 단지 앞뒤 자리였던 게 전부인데, 도대체 언제부터 그런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고 했다.


    너무 놀랍고 당황스러운 데다, 딴생각하느라 혼란스럽기까지 했다고 했다. 그렇게 귀가 멍해질 정도로 얼이 빠져있다가, 다시 점점 소리가 들려와서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여자아이들 무리가 그를 둘러싸고, 마치 '원인제공자는 너니까, 네가 책임을 져'라고 하듯이 몰아세웠다고 했다. 그리고 이후로는 마치 조리돌림이라도 당하듯이 그에게 태도를 확실히 하라는 둥, 그냥 사귀어 주라는 둥, 하나같이 그의 의중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이 상처되는 말들만 쏟아냈다고 했다. 무력한 자신의 처지에 덜컥 겁이 난 그는 결국 집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큰 충격에 그는 겨울방학 내내 집에만 틀어박혀있었고, 새 학년이 되어 간 교실에서, 그는 신기루처럼 사라진 그 여자아이 하나 때문에, 여자아이들 사이에 놀림감으로 전락한 채, 일 년 내내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 나중에는 대놓고 욕하는 소리까지 못 들은 척하고 숨죽여 지내야 했다고 했다. 그는 억울함에 점점 여자라는 생물이 이해 안 되고, 기분 나쁘고, 소름 끼치고, 역겹고, 더러워지기까지 했다고 했다. 물론 그 사건 하나로 여자가 싫어져서 남자를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닐 것이다.


    6학년이 되고 사춘기가 되면서 얼굴엔 여드름이, 턱엔 수염이, 종아리, 겨드랑이 등 신체 여기저기엔 체모가 자라면서 2차 성징이 시작되었는데, 그런 신체변화에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어느샌가 자기도 모르게 항상 시선이 청바지를 입은 성인 남성의 바지 앞섶을 향해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고 했다. 그에게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또래 친구들에게 슬쩍 얘기했는데,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전부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봤다고 했다. 그들에게는 이성에게 눈길을 주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아직 '다름'과 '틀림'의 구분을 하지 못하던 시기였기에, 그는 혼란스러웠고, 누구에게도, 심지어 부모님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고 했다. 특히 남들에게는 없고, 자신에게만 있는 이 특별함이, 점점 옳지 않은 것이라고 느껴졌고, 본능적으로 절대 들키면 안 되는 비밀로 느껴졌다고 했다. 느낌은 학교에서 성교육을 받으며 점점 확신으로 바뀌었고, 이때부터는 만에 하나 들키기라도 하면 매우 가혹한 처벌이 내려지리라는 두려움에도 사로잡혔다고 했다.


    성격은 점점 소심해졌고, 행동 또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겼고, 항상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했다.


 '다 내 잘못이다. 내가 잘못한 거다. 누군가 알기 전에 빨리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 안 그러면 앞으로 그 누구로부터도 사랑받지 못하고, 평생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하며 살 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내가 먼저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놔야 한다.'


이런 죄의식에 사로잡힌 그의 이후 삶은, 자기 안 어딘가에 찍혀있는 성적 낙인을 지우기 위해 처절하리 만큼 혹독하게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해 온 시간들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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