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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없는박영감 Jul 11. 2024

[소설] 석원과 상제의 어쩔 수 없는 이야기

어쩔 수 없이 제1화

어쩔 수 없이 선택의 여지가 없는 (I have no choice)


    옛날하고 아주 먼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며 놀던 시절에~ 온통 밭뿐이었던 이 동네는 수도권 아파트 건축붐과 함께 개발이 시작됐다. 'e-세계 아파트'도 그때 들어선 초창기 아파트 중 하나였다. 처음엔 '세계 아파트'였는데, 신축 브랜드 아파트가 바로 옆에 떡하니 들어서는가 싶더니, 어느 날 게시판에 리뉴얼 공고가 붙고, 외벽에 'e-'가 추가됐다. 옷은 갈아입었지만, 연식이 30년 가까이 되다 보니 결국 '노후'라는 딱지가 붙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e-세계 아파트'는 그 이후에 더 각광받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부터 명당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지어졌기 때문에, 어디 안 가고 그 자리에서 가만히 시간만 흘려보냈는데도 역세권이 형성되고, 가까이 대형마트가 생기고, 아파트 주변으로 천변을 끼고 공원이 조성되었으며, 초중고가 모두 모여있는 학군에, 특히 초품아라는 입지 조건은 가성비 甲의 아파트로 재탄생시켰다. 그러다 보니 비록 아파트에는 '노후' 딱지가 붙었지만, 자세히 안을 들여다보면, 그 구성원들은 파릇파릇 싱그러웠다.


    그런 'e-세계 아파트'의 105동 204호에 석원과 상제가 있었다. 햇살이 거실을 밝게 비추는 주말 오후, 석원은 그날도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다. 상제가 그런 석원의 고개를 들어 자신의 무릎에 살포시 올려놓고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석원의 이마를 쓸어 넘기고 그와 눈을 맞췄다. 둘의 시선 사이로 묘한 기류가 생기며 까르르 웃음이 터졌다. 한바탕 웃고 나서 이번엔 서로의 눈, 코, 입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자연스레 미소를 지었다. 상제가 먼저 다정하게 석원에게 말을 걸었다.


 "공 병장님?"


 "네~ 여 병장님? 그런데 저는 이미 민방위도 다 끝나고, 완전히 민간인이 됐는데, '병장'호칭은... 잘못 고르신 것 같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그러면 늙은 아저씨! 저 지금 군대식으로 뽀글이 해 먹을 건데... 같이 드시겠습니까?"


 "......"


 "왜 말이 없으십니까?"


 "'아저씨'란 말에 화를 내야 하나? '늙은이'란 말에 화를 내야 하나? 아니면 둘 다 내야 하나? 되뇌고 있는 중입니다."


 "흐흐흐, 그러시군요. 그럼 그건 제가 잘못했습니다. 뽀글이는 어떻게... 같이 드시겠습니까?"


 "......"


 "왜 또 말이 없으십니까? 그렇게 고민되십니까? 건강검진결과고 뭐고 아직은 젊어서 괜찮으니 그냥 드시지 말입니다?"


    하지만 석원은 상제의 품속으로 고개를 먼저 휙 돌리고,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고는 잠시 후 몸전체를 돌려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상제에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아... 아... 아닙니다. 안 먹겠습니다. 배 나온 늙은 아저씨는 싫다고... 여 병장님이 저 버리고 떠나시면 어떡합니까? 그건 안됩니다. 암~ 안되고 말고요. 라면! 안 먹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석원의 팔이 상제 허리를 파고들어 휘감았다. 상제가 미소를 지으며 석원의 귓가를 두 손으로 가리고 고개를 숙여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아~ 그러십니까? 그럼 제 거만 끓이겠습니다. 만약에~! '한 젓가락'의 '한~'소리만 나와도 바로 4층으로 돌아가셔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아시겠습니까?"


    석원의 깜짝 놀란 커다란 두 눈이 상제 쪽을 향했다. 커다랗던 두 눈이 점점 실눈이 되어가며 석원이 말했다.


 "............ 칫! 야~ 너무 한 거 아니냐? 고작 라면 한 젓가락에 그렇게 야박하게 굴 거 까지 있냐?"


 "뭐~! 그러게 내가 미리 물어보잖아... 한 젓가락 뺏기는 게 얼마나 기분 나쁜데? 그냥 끓일 때 같이 먹으면 되잖아..."


 "칫! 난데 그렇게 기분 나빠? 어? 그리고 안 되는 거 알면서 그러기냐? 의사 선생님이 경계성 고혈압에 이상지질혈증까지 있다고, 오래 살고 싶으면 꼭 먹는 거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단 말이야. 너랑 나랑 생일도 똑같아서 우리 딱 10년 차인데... 내가 우리 상제 두고 빨리 갈 순 없잖아? 난 우리 상제랑 오래오래 같이 살 거란 말이야? 응? 그러니까 너도 먹지 마라. 으~응? 아니면 그냥 냄비에 두 개 끓여서 나 한 젓가락만 주고, 나머지 너 다 먹어. 그래~! 그러면 되겠다. 어때? 응? 어때~ 어떠냐고?"


    상제는, 자신을 못 움직이게 더 꽉 안으려는 석원의 머리를 들어 소파에서 억지로 일으켜 앉히며 말했다.


 "그냥 운동을 해~! 그러게 누가 하루 종일 소파에 착 달라붙어서 TV만 보고 있으래? 온종일 그러고 있으면 살이 빠지겠냐? 그리고 냄비에 물 끓이기도 귀찮고, 라면 두 개 먹었다가 얼굴 팅팅 부었다고 놀리는 소리도 듣기 싫거든?"


석원이 상제를 향해 돌아 앉으면서 대답했다.


 "야! 난 네 나이 때 안 그랬다! 응? 한 번에 라면 네 개씩 끓여 먹어도 멀쩡했다고...! 이게 다 사회생활하느라고... 응? 다 먹고살자고... 상사들 접대하느라... 응? 상사만 접대하나? 요즘은 후배들도 받들어 모셔야 한다고... 그러니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그리고 전부 다 일! 응? Working 한다고 스트레스받고, 컴퓨터 앞에만 앉아서 찌들고, 병들고 그러니까 이렇게 된 거지 뭐~! 야~ 너도 내 나이 돼봐 안 그러나? 그러지 말고, 라면 먹고~, 그래~ 우유 마시면 되잖아? 응? 두 개 끓이자~ 부었다고 안 놀릴게... 으~응? 그러면 되잖아~? 그러자~"


몸을 부르르 떨며 입술을 쭉 내밀고 어리광을 부리는 석원을 피해, 상제는 소파에서 엉덩이를 살짝 떼며 혀를 내밀고 그를 놀렸다.


 "어우~ 네~ 혼자 많이 그러세요? 우리 꽁! 생원 병장님~ 으흐흐흐. 메~롱~"


 "야~ 너 내가 경고했지? 그거 우리 엄마도 못 부르는 별명이라고... 이리 와 너! 응 어디 한 번 당해봐라... 이얏!"


    웃으며 재빠르게 주방으로 도망가려는 상제를 석원이 양다리로 꽉 붙들고 그의 옆구리를 간질이기 시작했다. 상제가 온몸을 비틀며 그의 다리 사이를 빠져나오려고 저항했지만 다리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힘겨루기를 하며 두 장정이 좁은 소파 위에서 뒹굴다가 그만...! 거실 바닥으로 '쿵'하고 큰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말았다. 석원이 깜짝 놀라서 다리에 힘을 풀고 신음소리를 내는 상제에게 다가갔다.


 "야~! 괜찮아? 소리가 꽤 컸는데... 괜찮아?"


 "어... 흑... 후~ 공 병장님! 아직 힘이... 남아 도시네요. 빨리 갈 걱정 안 해도 되시겠어요. 난 괜찮으니까 본인 허리나... 아흑... 걱정하시죠...? 어... 흐..."


 "어후~ 야! 다행이다. 바닥은 괜찮다. 안 꺼지고 멀쩡한 거 같다... 야~!"


 "뭐래~? 이 양반이 진짜~"


다시 달려드려는 상제를 석원이 손으로 가로막으며 말했다.


 "앗! 미안 미안... 내가 졌어! 미안해, 미안해. 우리 둘이 뛰면 아래층에서 뭐라고 한다고~ 항복, 항복!"


 "우쒸~! 별것도 아닌 일로 괜히 힘 빼게 만들고 있어... 아~씨! 몰라 라면 세 개 끓일 거야...!"


 "흐흐흐흐"


    씩씩거리며 주방으로 가는 상제의 투덜대는 뒤통수를 향해 석원이 음흉한 웃음소리를 던졌다. 석원은 다시 천장을 향해 누웠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허공을 응시하다가, 냄비에 물을 받고 있는 상제에게 말을 걸었다.


 "근데~ 상제야. 4층 우리 기숙사에서 시끄럽게 굴면, 3층에서 은영누나가 괜히 이상한 상상 할까 봐 여기로 계속 내려오기는 하는데~ 회사에서 이제 숙소에 사람도 거의 다 빠지고 혼자니까, 나보고 나가라고 하는데... 어차피 이렇게 계속 여기 내려와 있을 거... 우리 그냥 같이 살래?"


 "응?...... 으응? 그렇지... 그렇긴 하지? 결국엔 어쩔 수 없이 그래야겠지?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긴 하다. 그렇지? 주변 아파트들이 워낙 비싸기도 하고... 그래... 뭐... 한 번 생각은 해~ 보자..."


    상제는 과거의 상처로 여전히 주변의 시선에 민감했다. 그런 상제가 주춤거리는 낌새를 석원이 눈치채고, 얼른, 되도록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아니~ 꼭 그러자는 건 아니고. 그냥 그러면 어떨까 싶어서... 물어봤어~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참! 그러고 보니, 저 밖에서 오매불망 이 집 베란다 바라보면서 너 나타나길 기다렸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안에서 이렇게 너랑 같이 놀고 있고...  흐흐흐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하단 말이지?"


 "그게 뭐가 신기해? 난 프리랜서 시스템 개발자로 간 회사에서 형을 딱 만난 게 더 신기하구먼..."


석원이 소파에서 주방에 있는 상제를 향해 엎드려 돌아 누웠다.


 "맞아! 그것도 참 신기하긴 해~? 네가 명함 줬을 때... 그때 네 이름 처음 알고 얼마나 기뻤다고... 아파트 계단에서 은영누나 쫓아오던 그 치한의 정체를 드디어 알아내서... 크크크"


 "됐어! 그만~해~!"


 "그런데 이거 하나 알려줄까? 나 너 처음 본 게 그때가 아니다?"


 "응? 뭐라고?"


 "네가 내 인생으로 처음 불쑥 들어온 날이... 치한으로 오해받았던 그날이 아니라고..."


 "......"


라면 끓이는 데 집중했는지 상제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석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혼잣말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네가 이 얘기를 들으면 아마 깜짝 놀랄 텐데... 아~ 얘기를 해줄까? 말까? 변태라고 놀릴 수도 있는데... 음... 그러니까 그게... 그때... 네가 우는 모습에 눈을 뗄 수가 없더라고... 어쩔 수가 없었어... 그날 이후로 난 완전히 너의 포로가 된 것 같았거든. 그 이후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 하루종일 네 생각만 할 뿐~!"


    드디어 주방에서 상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뭐라고? 안 들려! 뭐라는지 못 들었어! 그런데 라면에 계란 넣을까 말까? 계란 넣으면 콜레스테롤 올라간다며?"


석원은 '피식~'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쌩하니 달려가 상제를 뒤에서 꼭 껴안았다. 그리고 상제의 볼에 기습 뽀뽀를 했다. 그렇게 둘은 잠시 포개져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섰다. 상제가 석원의 팔을 풀려고 하자 석원은 상제의 어깨에 턱을 괴고 더 힘껏 안으며 라면이 끓고 있는 냄비를 바라보고 말했다.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라면에 계란이 빠지면 쓰나? 그건 라면에 대한 모독이지. 김치같이 어쩔 수 없는 거야.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라고... 알았어?"


 "훗! 뭐래~?"


석원은 상제의 이런 핀잔도 마냥 좋기만 했다. 상제도 이런 핀잔을 모두 받아주는 석원이 마냥 좋았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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