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것이냐 말 것이냐
판도라의 상자
글쓰기는, 특히 소설 쓰기는 연기와 상당히 맞닿아있다. 둘 다 기승전결의 구조를 가진 하나의 극을 만들어야 하고, 그 안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을 그려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다른 점이라고 하기엔 어감이 살짝 다르고, 비슷한 점이라고 하기엔 딱 들어맞지 않는... 음... 엇비슷한 점이라고 한다면, 쓰기가 한 발 물러서서 관찰하고 조율하는 역할이라면, 연기는 그 속에 푹 빠져서 실제로 살아야 하는 역할이다.
이 역할을 직책으로 간단히 말하면 작가와 배우다. 작가와 배우의 관계라고 하면, 법적으로는 갑을, 사무적으로 말하면 캐스팅, 아름답게 포장하자면 뮤즈? 즉 매우 복잡한 관계다. 이걸 둘 다 해보니 연기라는 것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소설을 쓰면서, 인물, 배경을 설정하고, 사건을 만들어, 그 안에 살아가고 있는 인물들의 대사를 쓰다 보니, 글자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 문단 하나하나, 꼭지 하나하나에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배우는 나름의 '감정서랍'이라는 것을 갖고 있고, 여기에 자신이 겪은, 혹은 관찰했거나, 깊이 생각한 감정을 담아둔다고 했다. 그리고 이것을 상황에 맞게 그때그때 꺼내 쓴다고도 했다. 어떤 감정은 꺼내 쓸 때마다 마모되어 사라져 버리는 경우도 있고 (사실 이런 감정이 십중팔구다), 어떤 감정은 쓸수록 농익어 깊이가 더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어떤 감정은 감히 열어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 엄두조차 나지 않는 감정은 진실함, 솔직함... 아! 합쳐서 진솔함인가? 대체로 '연기의 진정성'이라는 용어로 많이 쓰는데... 이 이름의 자물쇠로 꽉 잠겨있다. 배우에게 있어서는 이걸 꺼내는데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하다.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판도라의 상자'와 같다. 작가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표현해 낸 설정과 사건, 그리고 대사가 대중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뚜껑을 열기 전까지는 절대 알 수 없다.
충격
예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는데, 소설 쓰는 작가지망생으로서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던 소설이 있다. 22년도에 퇴사를 하고, 그때는 쓰기보다는, 아니 쓰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많이 읽던 시절이다. 특히 오늘같이 화창한 날이면 늦은 아침 카페에서 여유롭게 책 읽는 것을 즐겼다. 속물 같이 남들은 신경도 안 쓰는데 혼자 주변을 많이 의식했다. 그리고 이에 딱 알맞은 책이 22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 작품이었다.
『아니 에르노 作 <단순한 열정>』
그런데 처음 몇 장을 읽고 더는 진도를 나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지금까지 손도 못 대고 있다. 26페이지에서 멈춰버린 책...
'재미가 없어서? 어려워서? 내용이 하나도 이해가 안 돼서? 공감이 되지 않아서?'
따위의 이유로 미련 없이 시원하게 중도하차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더 찜찜하게 남아있다. 언젠가는 해야 할 숙제로 남겨져 있다.
'도대체 어디까지 솔직해야 돼?'
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 소설. 특히 작가는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인터뷰했다. 에세이에 더 이상 필터링을 하기 싫어서... 사진앱처럼 자체보정을 하기 싫어서... 이왕 그럴 거 아예 허구인 소설을 쓰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이 소설이 생각난 이유는 뭘까?
재능
나는 재능이 없다. 순간순간 찰나에 번뜩임은 있을 수 있지만, 이것은 재능이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 번뜩임을 재능으로 착각하는 수가 있다. 글도 그렇고, 연기도 그렇다. 재능을 넘어서는 방법은 노력밖에 없다고 하지만,
'나는 실패했다.'
내 처지를 확 깨닫게 해 준 드라마가 있다. 남자 주인공의 연기를 보고 제대로 알았다. 나의 연기는 실패했다. 나름 감정서랍을 잘 채우고, 비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단편적인 번뜩임일 뿐이었다.
일본 드라마 <사일런트>
이 드라마도 역시 1화로 내 플레이리스트에서 멈춰있다. 감히 손도 못 대고 있다. 1화 초반은 이런저런 설정을 보여주며 다소 지루하게 전개된다. 주인공들도 자꾸 엇갈려서 답답하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야라고 살짝 짜증이 나려는데... 그러다가 1화 엔딩이 가히 충격적이다.
'나는 왜 저런 연기를 못할까? 내게는 왜 저런 감정이 없을까? 이런 이야기를... 이런 장면을 쓸 수 있을까?'
내게는 재능이 없음을 확 일깨워줬다. 이 엔딩으로 다음화에 대한 기대가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하지만 더 보면 마음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아서 무서워서 못 보고 있다. 그만큼 배우들의 연기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언젠가 추스르고 조심히 꺼내 볼 날이 올진 모르겠다.
죽기 전에는 해결해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