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안 하는지 몰라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고 들어본 사람 손! 하면, 그래도 세월이 20년 가까이 지났으니까 50%는 들지 않을까? 2000년대를 관통한 세대라면 한창 연애를 시작할 때, 연애 중일 때, 혹은 엄청나게 싸웠을 때... 꼭 읽어보지는 않았어도, 서점에서 연인을 기다리며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한 번은 봤을 그 책. 나도 그날은 이상하게 여자친구와 싸운 날이었다.
전화통화를 하던 중이었나? 연인이면 주말에 데이트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날은 이상하게 그동안 못했던 게임도 좀 하고 싶고, 침대에서 뒹굴뒹굴도 하고 싶고, 집돌이 본능이 되살아나서 요령이 조금 생겼다. 대신 통화를 오래 하면서 집에서 쉴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여자친구도 '피곤하면 주말에 쉬어요'라고 하길래... 아 이해해주나 보다 생각하고 전화통화를 계속했다. 그런데 통화가 길어질수록 조금씩 핀트가 나가기 시작했다. 작은 일에도 '우리 둘은 어쩜 이렇게 잘 통하냐'며 찰떡궁합을 자랑하던 대화가 조금씩 이질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반응도 예전의 즉각적인 반응에서 살짝 조금씩 늦어지고, 하품을 하고 있나 싶을 정도로 재미없어하는 반응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나 혼자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왜 그래? 내 얘기 재미없어?"
"... 아니에요..."
"통화 그만할까?"
"...... 그래요..."
"아! 왜 그래? 진짜?"
"......... 피곤하면 그냥 쉬어요..."
나는 미치고 펄쩍 뛴다는 느낌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그중에서도 애써서 통화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제일 싫었다. 뭔가 잘못된 것은 알아챘는데, 정확히 실체를 알 수 없었다. 그 뒤로 애교도 부렸다가... 삐진 척도 해봤다가... 별짓을 다했는데 여자친구는 점점 기분이 나빠지는 것 같았다. 나중에는 말끝마다 '피곤하니 쉬어요...'가 나왔다. 그때 알았다. 내가 거짓이유를 붙여가며 오늘은 데이트하지 말고 집에서 쉬자고 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는 것을...
"내가 잘못했어. 오늘 만나자! 데이트 하자!"
"피곤하시다면서요... 그냥 쉬시라고요..."
나왔다. 극존칭! 저 말에 더 화가 난 것 같았다. 전화로 엎드려 빌 수도 없고... 몇 번을 잘못했다고 지금 당장 만나자고 할수록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됐다. 전화로는 해결이 안 될 것 같아서 나도 어쩔 수 없이 최후통첩을 날렸다.
"나 지금 준비해서 나갈 거니까... OO로 OO시까지 나와!"
그리고 전화를 끊어버리고 얼른 씻고 준비를 시작했다. 다행히 샤워하는 동안 부재중전화는 안 와있었다. 진심으로 만나기 싫었으면 전화를 다시 했을 거고, 만약 약속장소에 진짜 안 나오면 '내가 골탕 한 번 먹자'라는 생각이었다. 약속장소에서 기다리면서 서점에서 '화성남, 금성녀' 책을 샀다. 아... 남녀 간에 사고방식이 이런 차이가 있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저기서 여자친구 그림자가 보인다. 고개를 들어 눈이 마주쳤는데 여자친구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아 내가 뭔 짓을 한 거야.' 모르는 사람보다 더 어색해져서 나도 어쩔 줄 모르고 쭈볏쭈볏하고 있는데 내 손에 들린 책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아 풀렸구나. 만세.'
요즘 대화법 책이 많이 보인다. 나도 2, 30대에 자기 계발서 좀 읽어봤다는 사람으로서 매뉴얼 같은 그런 책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감히 말한다. 어떤 대단한 대화법을 뼛속까지 익히고 와도 진심은 못 숨긴다. 숨겼다고 자신하지 마라. 자기만 모르는 것이다. 대화 상대방은 물론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 모두가 알고 있다. 돌려 까기? 어림없다. 본인에게 남는 것은 잠깐의 통쾌함이 전부일 거고, 상대방에게는 당신에 대한 악감정만 오래 남는다. 주변사람들은 어떨 것 같은가? 상대방 평판은 당연히 나빠질 거고, 본인의 평판도 신경 써야 할 거다. 진짜로 '너 죽고, 나 죽자.' 전법을 구사한 거라면 오죽했으면이라는 동정표 정도는 끌어올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당신에 대한 평판은 나빠지게 되어있다. 성공하는 대화법? 역시 어림없다. 내 뒤에 숨겨진 진심을 모르고 넘어갈 정도로 인간의 오감은 그리 둔하지 않다. 하다못해 진심을 숨기면 공기의 흐름도 바뀐다. 콜센터나 텔레마케팅 전화가 오면 어떤가? 전화번호만 봐도 무슨 말할지 다 안다는 식으로 그냥 끊지 않는가? 그런 류의 책은 읽으면서 '아... 내가 저런 감정이었구나... 상대는 저런 기분이었겠구나...' 객관화하고 상호 이해하는 정도면 딱 적당한 것 같다. '화성남, 금성녀'처럼...
대화법은 왕도가 없다. 진심을 담는 수밖에 없다. 이것은 기간은 짧았지만 제약영업을 하면서 깨달았다. 사람들은 일단 영업사원이다 하면 둘 중에 한 가지 생각을 한다. '안 사요' 혹은 '조건 좋으면 생각해 볼까'이다. 그래서 영업사원들은 못 먹는 감은 꼭 찔러본다. '안 사요' 반응이면 깨끗하게 물러나면 되는 거고, '생각해 볼까' 반응이면 어떻게든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그런데 생각하는 반응 수준이 다르다. 흔히 영업사원을 만나서 단호히 거절해야지가 '안 사요'라고 착각하는데, 영업사원에게는 일단 만나는 것 자체가 '생각해 볼까'이다. 만약 안 그런 영업사원이 있다면 그분은 안 봐도 실적이 안 좋을 게 뻔하다.
본인이 진짜 안 살 마음이면 만났겠는가? 길에서 전단지만 받아가라고 해도 못 본 척 지나가면서? 텔레마케터 전화에 열심히 대꾸하면서 '네네. 안 삽니다. 전화 끊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안 사요' 같은가? 그런 전화도 다 받아서 예의 바르게 대꾸하는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보고 호감을 갖게 하겠다는 주변의식이 크지 않은가? 한 번이라도 통화가 연결되면 그 뒤로 전화가 더 온다는 느낌 받지 않았는가? 영업사원이 장삿속이 없어 보이고 ‘진짜 나를 생각해 주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 안 살 것도 사게 된다. 영업사원들은 고객이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특별한 대화법이 있을까? 아니다. 그런 대화법은 절대로 없다. 고객이 케어받는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방법은 진심뿐이다. 실적이 좋은 영업사원은 고객이 그런 느낌을 빨리 받을 수 있게 열 번 찍을 것을 다섯여섯 번으로 줄이는 노력을 하는 사람이다. 제약영업사원 시절, 우리 회사 제품을 절대 안 써줄 것 같던 병원장님들도 제품 얘기는 절대 안 하고 이런저런 사는 얘기만 들어드리며 꾸준히 방문했더니 서서히 마음을 열어주셨다. 원장님들은 제약회사 영업사원 만나는 시간이 쉬는 시간이다. 그래서 작은 아이스박스에 건강녹즙을 다양하게 담아다니면서 진심으로 편히 쉴 수 있게 해 드렸더니 나중에는 개인적인 이야기도 하는 편한 사이로까지 발전했다. 실적이 좋아지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고...
앞의 여자친구와 싸운 에피소드도 처음부터 진심으로 솔직하게 오늘은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고 했으면 이해해 주거나 안된다고 하거나 둘 중 하나로 끝났을 건데. 괜히 통화를 하면서 서로 감정만 상하다가 이상한 데서 핀트가 나가서 울리기나 하고... 못났다 참 그때의 나!
그런데 진심을 담으라는 것이 무례하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처음 가수 제시가 나왔을 때, 그녀의 대화법이 통쾌했지만 무례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 나의 비호감 연예인 목록에 그녀는 꼭 들어갔다. 그런 느낌을 지우게 된 것은 최근이다. 방법은 무례하지만 진심은 다르다는 것을 수년이 지나면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심을 담은 그녀의 대화는 다소 무례하지만 '제시니까...'라고 이해하게 됐다. 진심을 담겠다고 무례하게 굴면 그거 바로잡는데 수년, 아니 평생 되돌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진심을 담아 정중하게 대화하면 내 인품이 올라간다. 정치인들이 아무리 돈 많고, 권력이 있어도 인품이 훌륭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무슨 뜻인지 알고 말하냐고 되묻고 싶을 때가 많다. 정중하고 솔직한 진심표현. 이것만큼 강력한 대화법은 없을 거다. 정중함은 나약함이나 비겁함이 아니다. 유쾌, 상쾌, 통쾌는 화장실에서만 통하는 정도(正道)로 남겨두고 대화에서는 소통, 이해, 배려를 정도(正道)로 하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