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날 맛없는 딸기만 먹고 있던데…

맛있는 거 아끼지 말고 지금 먹자

by 철없는박영감

맛있는 딸기철이 돌아왔나 보다. 마트에 들어서자마자 달콤한 냄새가 마스크를 뚫고 들어온다. 판촉행사도 하고 있다. 한 팩에 9,900원, 두 백에 13,800원. 무려 3천 원이나 세일한다. '어머! 이건 꼭 사야 해!' 4팩을 쇼핑카트에 담는다. 다이어트 식단으로 헬스트레이너가 짜준 식단에도 딸기는 간식으로 짜여있다. 한동안 딸기가 쏙 들어가서 냉동블루베리만 먹고 있었는데, 아싸! 이제부터는 딸기 파티다. 더 많이 사고 싶지만 아쉽게도 보관이 안 돼서 4팩에 만족한다. 그리고 딸기도 많이 먹으면 살찐다. 하루에 5개씩만 먹으라고 냉장고 문에 붙여놓은 식단표가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도 딸기 냄새가 퍼진다. 이 매혹적인 신선하고 달콤한 향기가 차 안에서 계속 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딸기를 씻을 준비를 한다. 스테인리스 대야를 꺼낸다. 물을 받아서 식초를 10:1 비율로 섞어준다. 이제는 딸기를 꺼낼 차례다. 플라스틱 팩을 열자마자 그 안에 갇혀있던 딸기 향기가 (이제는 냄새가 아니고 향기다.) 진하게 퍼진다. 바로 먹고 싶지만 딸기는 씻어먹어야 한다. ‘씻는 동안은 참을 수 있잖아’라고 마음을 가라앉힌다. 마트에서 열심히 골랐는데도 스티로폼에 가려있던 부분에 물러버린 딸기들이 몇 개 나온다. '괜찮아 씻으면서 먹어버리지 뭐' 딸기를 흐르는 물에 씻고 식초를 희석해 놓은 물에 담그면서 무른 딸기는 내 입속으로 담근다. 음~ 역시나 물러도 딸기는 맛있다. 식초물에 담근 채로 5분 정도 둔다. 오래 담가두면 수용성 영양소가 빠져나가고, 향도 덜해지지만 농약회사를 다닌 사람으로서 잔류농약보다 조금 덜 맛있는 딸기가 낫다. 5분이 지났음을 알리는 알람이 울린다. 딸기를 꺼내 다시 흐르는 물에 식초를 씻어내고 채반에 밭쳐 물기를 뺀다. 물기가 빠지면 밀폐용기에 키친타월을 깔고 딸기를 조심조심 넣는다. 이때 무른 것은 빨리 먹어야 하니까 예쁘고 싱싱한 것들은 밑에 깔고 조금 덜 싱싱하고 물러질 기운이 보이는 것들은 위로 쌓는다. 자 이제 간식용 딸기 준비가 끝났다. 이제 매일 다섯 개씩 간식으로 먹으면 된다. 열흘은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은 씻으면서 몇 개 집어 먹었으니 딸기 파티는 내일부터다. 아싸 신난다.


다음날 봄기운이 완연하다. 영하 15도 추위가 지나고 나니 영하 2~3도 정도는 땀이 날 정도다. 점심을 먹고 나른해져 있는데 어제 사놓은 딸기가 생각났다. 냉장고에서 딸기통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와우! 신선하고 달콤한 향기가 통 안에 가득하다. '자! 어떤 놈부터 먹어볼까?' 통 위에 넣어둔 물러지려고 하는 녀석들 중 상태가 제일 안 좋은 다섯 개를 꺼내 꼭지를 칼로 자르고 접시에 담아낸다. '맞아! 딸기는 우유랑 궁합이 좋다 그랬어' 냉장고에서 저지방 우유를 꺼내 한잔 따른다. 상큼하다 못해 약간 신맛까지 나는 듯한 딸기맛을 우유의 고소한 맛이 살짝 눌러준다. 부드러운 우유 속에서 딸기의 육질이 더 부드러워지며 입안에서 녹아버린다. 더 먹고 싶은데... 꾹 참는다. 대신 견과류 봉지를 뜯는다. 내일 또 다섯 개 먹을 수 있으니 괜찮다.


다음날 점심을 먹고 다시 딸기통을 열었다. '음...' 이 향기는 질리지도 않는다. 향수회사들은 반성해야 한다. 제대로 된 딸기향을 못 만들고 있다. 딸기향 화장품들은 하나같이 향이 무겁고 진하다. 과장하면 속이 메스껍다. 어쨌든 오늘도 딸기통을 열어 그 안에 가득한 신선하고 달콤한 향기에 취하며 지금 먹을 딸기를 고른다. 어제 무른 것은 다 먹었으니까 오늘은 맛있는 딸기를 먹을 수 있다. 그런데 밀폐용기도 소용이 없나 보다. 또 딸기가 물러졌다. 어쩔 수 없이 더 물러지기 전에 상태 안 좋은 녀석들부터 먹는다. 아직 크고 싱싱하고 새빨간 녀석들이 남아있다. 이 놈들은 나중을 기약하며 아껴둔다. 이런 식으로 며칠이 지나자 크고 싱싱하고 새빨간 녀석들이 먹지도 않았는데 없어졌다. 생각해 보니 크고 싱싱하고 새빨간 딸기를 먹은 적이 없다. 맛있는 건 아꼈다가 나중에 먹겠다는 심정으로 다 물러지기 직전의 상태 안 좋은 녀석들만 매일 골라 먹었다. 우와 고등학교 때 같은 반 친구들 모두 '에이~ 그게 뭐예요.' 했던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사회시간이었던 것 같다. 선생님은 조금 특이했다. 남자 선생님이었는데 (남고에서 근무하는 여자선생님들 존경한다.) 머리숱은 좀 자유분방했고, 외모는 철수들과 섞어 놓으면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평범했는데 패션 스타일이 남달랐다. 일단 보라색 정장이다. 태어나서 보라색 정장을 처음 직관했다. 셔츠도 흰색은 없는 듯했다. 노란색, 파란색, 회색... 화룡점정은 넥타이였는데... 사실 남고에 근무하는 남자선생님들은 노타이 혹은 스웨터 차림이 거의 100%다. 이분은 항상 넥타이를 매고 다녔는데 이것 또한 프린팅이 심상치 않았다. 전체적으로 요즘말로 투머치 했다. 하루는 수업하다가 철학 얘기가 나왔는데, 갑자기 질문을 하셨다.

"너희가 빵 10개를 나눠먹는데, 1번이 제일 맛없고, 10번이 제일 맛있는 빵이라면 뭐부터 먹을래?"

"10번이요. 맛있는 것부터 먼저 먹어야죠."

반 친구들이 마치 이구동성 게임이라도 하듯이 동시에 같은 대답을 했다.

"그럼 이번에는 혼자서 매일 한 개씩 먹을 수 있다면 뭐부터 먹을래?"

이번에는 조금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1번부터요. 10번은 아꼈다가 나중에 먹을래요."

"그럼 너희는 매일 맛없는 빵을 먹는 거야."

우와. 그동안 잊고 살았는데 갑자기 이 말이 딱 떠오른다.

'맞네. 제일 맛없는 딸기만 먹어왔었네.'


사는 게 이렇게 팍팍해지기 전, 한동안 YOLO가 대유행했었다. '인생은 한 번뿐'이라는 말은 앞의 딸기 에피소드가 정확한 의미이지 않을까?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 마라' 미래를 저당 잡히는 요즘 YOLO는 잘못된 의미가 아닐까? 물론 철 지난 YOLO다. 하지만 코로나, 경기침체, 극단주의, 전쟁, 이번에는 지진까지... 내일이 어떨지 모르는 불안감이 극에 달한 요즘이다. 당장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이다. 요즘 나는 현재를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현재의 나를 과거의 트라우마도 방해할 수 없고, 미래의 불안도 방해할 수 없다. 다시 한번 YOLO를 생각해 본다. 진정한 의미의 YOLO를... 맛있는 거 아끼지 말고 지금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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