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그림자

‘역성장’과 ‘비호감’이 말하는 우리 사회

by 철없는박영감
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거 뭔가 이상한데?


부재중 전화가 찍혀있다. 친구 녀석이다. 30분 전이긴 하지만, 좀 늦은 시간이기도 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다시 전화가 울린다.


"여보세요?"

"야~ 혹시 옥편 있냐?"

"어? 옥편? 요즘 누가 옥편을 키우냐?"

"그렇지? 아~ 무슨 요즘 같은 시대에 옥편을 가져오래? 우리 막둥이 학교에서 선생님이 한문시간에 쓴다고 옥편을 가져오라고 했대..."

"얼른 하나 사!"

"지금 시간에 어디서 사~"

"나 어릴 땐, 문방구 같은 데서 샀던 거 같은데..."

"지금 시간엔 거기도 다 문 닫았어."

"옥편은 새벽배송 같은 거 안 되나?"


언어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런데 그 거울이 너무 흐려서, 우리가 말하는 것인지, 말에 끌려가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소장하다'를 '키운다'라고 표현하고, '키운다'는 자녀보다 반려동물을 더 떠올리게 하는 낱말이 됐다.


우리는 매일 언어를 사용하지만,


언어가 우리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는 자주 잊는다. 단어 하나에 담긴 뉘앙스, 표현 하나에 스며든 시대의 감정은 때로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한다. '옥편'이라는 말을 오랜만에 들었더니, 한자표현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우선, '한문'. 한문과 한자는 엄연히 다르다. 한문은 고전 문장체이고, 한자는 그 문장을 구성하는 문자다. 그런데 그 차이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혼용되다 보니, 천자문을 한자로 아는 경우가 많다. 천자문은 훈민정음 '가나다라...'처럼 창제의 논리를 밝힌 글이 아니다. 그야말로 글이다. '표의문자'와 '표음문자'의 차이다.


'天地玄黃,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 '

'宇宙弘荒, 우주는 넓고 거칠다. '

'日月盈仄, 해와 달은 차고 기운다.'

'辰宿列張...'


‘역성장’이라는 말의 아이러니, ‘비호감’이라는 감정의 완곡어법


경제가 마이너스를 기록할 때, 우리는 ‘역성장했다’고 말한다. 성장이라는 긍정적 단어에 ‘역’이라는 부정적 접두어를 붙여 만든 이 표현은, 언어적으로는 상충되지만 사회적으로는 익숙하다. ‘쇠퇴’나 ‘퇴보’보다 덜 감정적인 이 단어는, 위축된 현실을 말하면서도 충격을 완화하려는 전략처럼 보인다. 기술적이고 중립적인 어감은, 감정을 배제한 채 현실을 전달하려는 현대 언어의 특징이다. 영어의 “negative growth”를 번역하면서 생긴 관습도 이 표현의 정착에 한몫했다.


“쟤 좀 비호감이야.” 이 말은, “쟤 싫어”보다 훨씬 덜 날카롭다. ‘비호감’은 단순한 반감이 아니라, 감정을 절제한 평가다. 한국어에서 ‘비’라는 접두사는 부정적 의미를 부드럽게 전달하는 데 자주 쓰인다. ‘비정규직’, ‘비공식’, ‘비판적 사고’처럼, 감정을 누르고 사회적 관계를 고려하는 언어적 장치다. ‘비호감’은 타인을 평가하면서도 관계를 유지하려는, 감정과 사회 사이의 균형을 잡으려는 표현이다.


'부재중 전화'라는 말도 좀 이상하다. 내가 부재한 게 아니라, 전화를 못 받은 건데. 언어는 때로 현실을 비껴간다. 익숙하다는 이유로, 이상함을 그냥 넘긴다. '못 받은 전화'정도가 더 상황에 맞지 않을까?


이처럼 우리가 무심코 쓰는 말들 속에는 논리적으로 모순이지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약속한 듯한 낱말이 종종 보인다. ‘역성장’과 ‘비호감’—이 두 단어는 언뜻 보면 단순한 부정어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우리 사회의 얼굴이 숨어 있다. 모순된 구조 속에서 우리는 감정을 숨기고, 현실을 완곡하게 포장하며, 언어를 통해 자신을 조율한다.


언어는 감정의 방패다


‘역성장’이 현실을 완곡하게 포장하는 기술적 언어라면, ‘비호감’은 감정을 절제하며 관계를 유지하려는 감성적 언어다. 둘은 서로 다른 영역에서 작동하지만, 공통적으로 우리 사회의 ‘말하기 방식’을 보여준다.


‘역성장’과 ‘비호감’은 단어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들은 우리가 얼마나 감정을 절제하고,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며, 언어를 통해 현실을 다듬으려 하는지를 보여준다. 언어는 때로 진실을 감추는 방패가 되고, 감정을 완화하는 도구가 된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말하지만, 동시에 언어에 의해 말해진다.


각 종 기기의 사용자인터페이스에 '직관성'이라는 용어가 한 참 쓰였다. 키보드나 마우스 같은 입력기기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 화면을 터치하고, 손가락으로 확대하고 축소하고, 이제는 그마저도 귀찮아서 말로 조종을 하는 시대다. 그런데 이 언어라는 것이 워낙에 살아 숨 쉬는 유기체 같은 것이어서 명확한 구분이 어렵다. (명확한 구분이 어렵다.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명확한 구분이 없다. 이 한 문장에도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다.)


언어는 도구가 아니라 생명체다. 우리가 말을 다룬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말이 우리를 다듬고 있다. 그 그림자 속에서 우리는 오늘도, 조심스럽게 말하고, 조심스럽게 살아간다. 우리는 과연, 말의 주인일까, 말의 그림자일까. 당신은 어떤 낱말에 익숙해져 있나? 그 단어는 당신을 어떻게 말하게 하나?


아~ '꼰대' 소리 듣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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