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은 존중되어야 한다

획일성은 배척돼야 하고...

by 철없는박영감
성별이라는 틀을 넘어서


타고난 성별로 사람을 분류하는 것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 이는 단순히 동성애를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혹은 성 정체성을 개인이 결정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전통적인 가치철학의 문제를 넘어선다. 이제는 성별이라는 고정된 틀 자체가 재검토되고 있으며,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훨씬 더 유연해지고 있다.


나는 이 흐름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최근 등장한 ‘테토녀’, ‘테토남’, ‘에겐녀’, ‘에겐남’ 같은 개념은 그 변화의 상징이다. 이들은 단순한 유행어가 아니라, 사회가 개인의 성향을 바라보는 방식이 바뀌고 있다는 증거다. 성별이라는 이분법적 기준이 아닌, 성향과 에너지의 흐름으로 사람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분명 의미가 있다.


호르몬으로 본 성향의 언어


과거에도 ‘초식남’, ‘육식녀’ 같은 성향 기반의 분류가 존재했다. 하지만 그것은 후천적이고 사회적 취향을 전제로 한 것이었으며, 여전히 생물학적 성별을 인정한 상태에서의 분류였다. 성향을 설명하는 방식은 있었지만, 그 근거는 문화적 맥락에 머물렀다.


반면, 테토와 에겐이라는 개념은 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로겐이라는 호르몬을 기준으로 사람의 성향을 설명한다. 이는 생물학적 성별을 넘어서, 개인의 성향을 보다 자연적이고 과학적인 언어로 표현하려는 시도다. 호르몬이라는 생물학적 요소를 통해 성향을 설명하는 방식은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선천성과 후천성의 경계를 유연하게 바라보게 만든다. 이처럼 새로운 언어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흔들고, 더 넓은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다양성의 언어, 낯섦을 넘어서


‘테토녀’와 ‘에겐남’이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낯섦은 우리가 익숙해져야 할 새로운 언어다. 그것은 단지 성향을 설명하는 단어가 아니라,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는 시도이며, 사회가 더 포용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증거다.


우리는 오랫동안 ‘남자다움’, ‘여자다움’이라는 틀에 갇혀 살아왔다. 그 틀은 때로는 억압이 되었고, 때로는 오해를 낳았다. 이제는 그 틀을 벗어나, 각자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든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낯선 언어를 받아들이는 것은 곧 새로운 시선을 받아들이는 일이며, 그것이 다양성의 시작이다.


획일성의 편리함과 위험


획일성은 편리함을 줄 수 있다.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전제는 사회를 단순하게 만들고, 관리하기 쉽게 만든다. 그래서 산업화 시대에는 규격화, 표준화가 진리였다. 하지만 그 편리함은 동시에 많은 것을 놓치게 만든다. 개성을 억누르고 창의성을 제한하며, 사람들의 다양성을 무시하게 된다. '혐오'는 그 마지막 발악이다.


그 결과 변화에 취약해진다. 생물학적 다양성을 상실한 바나나는 사실상 멸종의 상태에 놓여 있다. 반면, 다양성은 불편할 수 있지만, 그 불편함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된다. 다양성은 사회를 풍요롭게 만들고, 더 건강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기반이 된다.


다양성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결국, 다양성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우리는 모두 다르기에 아름답고, 그 다름을 존중할 때 비로소 진정한 공동체가 된다. 획일성은 더 이상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는 다양성이 기준이 되어야 할 때다.


사람을 성별, 성향, 취향으로 단순히 나누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우리는 각자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다양성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며, 그 존중은 곧 인간에 대한 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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