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공 vs 어공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묘한 긴장감.
공무원 임용이라는 톨게이트를 지나, 본격적으로 행정이라는 고속도로 본선에 합류하는 지점이 다가온다. 그동안 구부러진 IC를 저속 기어로 달리며 간을 봤다. 이제는 본선이 가시권이다. 슬슬 4단, 5단 고속 기어로 바꿔야 할 타이밍. 액셀레이터에 올린 발에 힘을 더 줘본다. 60, 70, 80... 속도가 점점 올라간다. 이제 깜빡이를 켜고, 백미러로 뒤차를 살피며 합류를 시도한다.
그 순간, 빠앙! 경적이 울리고, 하이빔이 쌍라이트처럼 번쩍인다. 조금 전까지 1~2차로를 달리던 차량이 분명했는데... 이상한 수작질이다. 못돼 처먹은 심보인가? 아니면 텃세? 처음엔 같은 처지라고 생각했다. 다 비슷한 자리에서 시작했을 거고, 같은 ‘어공’이라는 이름표를 달았다. 먼저 오고 갔을 뿐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같음’은 점점 균열을 일으켰다. 순진했다.
누가 더 오래 남을까, 누가 더 실세와 가까울까. 그런 질문들이 공기 중에 떠다니기 시작했다. 말은 없지만, 눈빛은 말하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살아남을 거야.”
“나는, 너보다 먼저 인정받을 거야.”
이제 막 본선에 합류하려는 차량에게 진행 중이었다는 기득권을 주장하는 모습은... 글쎄 인지상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공끼리의 경쟁은 늘 조용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회의실에서 자리를 먼저 잡는 순서, 실세가 던진 농담에 누가 먼저 웃는지, 보고서에 이름을 넣을 때 누가 더 위에 적히는지. 업무 분장이라고 이름 지어진 희망사항. 그리고 모든 것이 본인을 거쳐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결재라인.
작은 것들이 쌓여, 큰 기류가 된다. 그리고 그 기류는, 어느 순간부터 '같은 편'이 아니라 '경쟁자'로 서로를 바라보게 만든다.
“나는 어공이지만, 너보다 더 오래 버틸 거야.”
그 말은 하지 않지만, 행동은 이미 말하고 있었다.
업(業)과 임(任)
내가 '안성시 농촌 신활력플러스 사업추진단'에 임용되면서 맡은 업무(業務)는,
○ 농가 기획생산 및 농가 조직화
○ 농업유통 및 마케팅
○ 순회수집 관리
○ 대민업무 및 대외협력
○ 그 밖의 신활력플러스 업무 수행을 위해 필요한 사항
위와 같다. 우선 '농촌 신활력플러스 사업'이 뭔지 설명해야겠지?
농촌 신활력플러스 사업은 단순한 농촌 지원을 넘어, 지방소멸 위기에 대응하고 지속가능한 농촌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주민 주도형 지역 활성화 프로젝트이다. 핵심 목표는 지역 자원을 활용한 창의적 사업 발굴, 청년·주민 주도 조직(액션그룹) 육성, 지역 특화 산업 고도화 및 자립적 경제 모델 구축이다. 기대효과는 청년 귀농·귀촌 활성화, 지역 공동체 회복, 농업의 산업화 및 수출 가능성 확대, 도시와 농촌의 상생 모델 구축이다. 이 사업은 단순한 지역개발이 아니라, 사람과 조직을 키우고, 농촌을 혁신의 공간으로 바꾸는 실험이다. [Copilot "농촌 신활력플러스 사업" 검색]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중소농, 고령농, 귀농, 귀촌인, 청년농 등' 농촌사회에서도 도움이 필요한 분들께 조금이나마 경제적 자립에 도움이 될 수 있게 판로를 개척하고, 조직화해서, (농촌) 농촌에 / (신) 새롭게 / (활력) 활력을 / (플러스) 불어넣는 / 사업이다. 말 그대로 '농촌 신활력플러스' 사업되시겠다.
자~ 내 업무는 이런데, 앞서도 말했듯이 공무원 조직은 업무는 없고, 임무만 있다고 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업무는 조직의 목표고, 그 속의 임무가 공무원 각자에게 부여된다고 보면 된다. 글로 쓰며 그럴싸한데, 실상은 성과가 있어 보이고, 좋은 것들은 조직장들이 다 차지하고, 아래 딱가리들은 뭔지도 모르고 일만 죽어라 하는 구조다. 즉 권한과 책임으로 따지면, 권한을 가진 놈 따로, 책임을 가진 놈 따로라는 말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권한만 가진 놈, 책임만 가진 놈으로 구분된다.
여기서 내가 맡은 주임무는 '경로당꾸러미사업'이다. 안성시내 약 500여 개소의 경로당에 안성관내에서 생산된 친환경 로컬 농산물을 매월 2회, 2주마다 공급하는 임무다. 신체적으로 조금 고달픔이 있어도, 새로운 판로를 찾아서 기뻐하는 농민을 보면 행복하고, 어르신들이 건강한 농산물로 맛있게 식사하시는 모습을 보면 보람 있다. 그래서 일 자체는 힘듦과 보람이 동시에 느껴지는 아주 좋은 환경이다. 물론 보수는 매우 많이 적다.
문제는
늘 사람이다. 그 안의 구성원. 이상하게도, 실세는 늘 한쪽만 본다. 그 시선이 나를 향하지 않을 때, 나는 내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더 많은 말을 꺼낸다. 더 많은 웃음을 흘리고, 더 많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그 모든 노력은, 옆자리 어공의 눈에는 ‘오버’로 보인다.
“쟤는 왜 저렇게까지 하지?”
“쟤는 왜 자꾸 나서지?”
그렇게, 나는 방해물이 된다. 합류하려던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끼어든 차량처럼.
뭐 그래도, 여태까지 숱하게 겪어온 일이기에 이미 알고 있던 거라고 하겠다. 예상도 했고, 각오도 했던 일이다. 사람 사는 데가 다 똑같지 뭐~ 어공끼리의 갈등은,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는 방식으로 시작된다. 같은 차선에 있던 줄 알았는데, 서로가 서로를 추월하려고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도는, 내 감정의 RPM을 다시 요동치게 만든다. 자리만 비우면 시작되는 험담. 그리고 상대방의 무능력에 대한 성토. 자신에게 일이 쏠린다는 불만. 그동안 '브런치스토리'에 많이 고발했던 내용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반란 : 반격의 시작
일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시작됐다. 자기들끼리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참 하더니 갑자기 어공빌런이 나에게 이런 말을 던졌다.
"어! 그럼 이건 박주무관님이 담당이니까~ 수의계약 두 건으로 나눠서 진행하면 되겠네요~"
"네?!"
나는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나에게 불법을 자행하라는 말인가? 놀람을 억누르고, 말을 던진 그 사람과 같이 대화를 하고 있던 옆사람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에요? 뭔지는 알아야 일을 하지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발을 빼는 건지, 청력 손상이 심한 건지... 여태까지 옆에서 맞장구치면서 대화해 놓고는 나 몰라라 하는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웠다. 그래서 직접 물었다. 무슨 일인데 수의계약을 하라고 하는 거며, 왜 한건을 두 건으로 나눠서 진행하냐고... 그리고 그 사람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아~ 그냥. 하시면 돼요."
"안 할 건데요?"
"네?"
"안 할 거라고요."
순간 사무실 안에 정적이 흘렀고, 모든 이목이 나에게로 집중됐다.
"아니~ 박주무관님이 이거 담당이시고, 박주무관님이 이걸 처리를 해주셔야 일이 진행되는 건데요?"
아~ 그놈의 박주무관, 박주무관! 직책을 이렇게 반복해서 강조할 때는 책임감을 부여하겠다는 의도가 다분한데... 나이 어렸거나, 신입이면 좋은 게 좋은 거다라면서 분위기 삭막하게 만들지 말고 그냥 해주고 말았겠지만, 나이 먹은 아저씨에겐 그런 공격이 통할리 없다.
"안 한다고요. 이제 들어온 지 한 달도 안 된 사람한테 그런 일을 시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말투는 공격적이었지만 그래도 내용만큼은 애써 돌려 거절했다. 하지만 이 사람. 못 알아들었다. 아니지 제 귀를 의심하며 못 알아들은 척했을 거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 특유의 받아치는 기술이 있다. 원인을 가리고, 혹은 조작하고 상대방의 무능력으로 몰아가는... 그런...
"그럼 배워서 하시면 되겠네요... 배우면 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얼마나 시간 드리면 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저기요 OOO님 제가 안 한다고 했지. 못한다고 했나요? 안 한다고요. 배워도 안 한다고요."
그제야 안 되겠는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져서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옆에 있던 '말리던 시누이'도 깜짝 놀라서 화제를 바꾸며 막말을 쏟아낸다.
다음날 아침 출근했더니 어제의 어공과 나만 출근해 있었다. 그리고 뭔가 출력을 하더니 나에게 내밀었다. 밤새도록 생각해 온 대응법이 이거였나 보다.
"박주무관님. 이게 우리가 내부적으로 협의 한 업무분장이고요. 이대로 따라주셔야 해요."
"네? 업무분장이요? 무슨 업무 분장이요?"
"이게 우리 사무실 사람들이 협의해서 만든 업무분장과 결재라인이거든요. 한 번 보시고, 이대로 따라주셔야 해요."
"네~ 그래요?"
어제의 일도 있고 해서 나는 확답은 하지 않고 대충 대답했다. 내 책상 위에 놓인 종이에는 화살표가 어지럽게 그려진 결재라인과 업무분장이라는 표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출근하고, 나는 물었다. OOO님이 업무 분장이라면서 이 종이를 출력해 줬는데 보셨냐고... 아이고 이런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왜 했을까? 내가 건넨 종이를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똑같이 반응했다.
이게 내 일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