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갈등 2nd

어공 vs 늘공

by 철없는박영감
이건 어공이 할 일이 아닌데... 그래도 어공이니까 좀 도와줘야지라는 애매한 경계선 위에서 나는 자꾸만 ‘예외’가 된다.


나에게 날아온 도전장 같았던 업무분장표가 팀원들에게 공유되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이게 내 일이었어?'라는 반응과 함께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가 이런 업무 시스템과 결재 라인을 갖고 일했지?'라는 반응까지. 이 한 가지 사건으로 여론은 급격하게 나에게 쏠렸다. 그리고 주간업무보고.


아~ 이것도 너무 싫다. 전체주의사회의 공개자아비판 같은 이런 방식은 아마 여기가 발원지겠지? 회의시간에 팀원들은 한 주간의 업적과 다음 주 계획을 보고하고, 자칭 진보진영이라는 長은 의자에 앉아 마치 '판관 포청천'이라도 된 듯, 개작두를 들일지 용작두를 대령할지 고민하는 듯한 분위기다. 정말 내로남불이다. 지금이 21세기 민주주의시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어이없는 광경이다. 이래서 나는 '보수좌파'가 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주간업무보고'라는 타이틀의 회의가 매주 있었는데, 빌런어공은 여기서 이 사안을 공론화했다. 그냥 나 개인의 반항정도로 넘어가려고 했는데, 이젠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빌런 어공이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말을 끊고 먼저 한마디 하겠다고 손을 들었다.


"제가 먼저 한마디 할게요. 제가 지금 다소 격앙된 상태라서 말이 좀 세게 나갈 수 있는 점은 양해 바랍니다. 업무분장 이야기를 하시는데요. 우선 팀원들과 합의해서 도출한 결과라고 하셨는데요. 다들 처음 본다고 하시죠? 이건 민주적 정당성이 완전히 결여됐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메일로 일방적으로 뿌리는 방식은 절차적으로도 대단히 흠결이 있는 겁니다. 저는 이 메일로 전달된 업무 분장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처음 출근한 날 전자결재라인을 따라 합의된 업무분장 외에는 어떤 것도 인정할 수 없고, 따르지 않겠습니다. 이건 OOO님의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치 윤석열 계엄 선포와 같이 일방적이고, 폭력적이에요. 결재라인도 그래요. 세상 어느 회사나 조직에서 이렇게 거미줄 같은 결재라인을 거친답니까? 게다가 본인 희망사항이 적힌 업무분장 라인에도 맞지 않게 모든 업무가 본인의 결재를 득한 후 진행되게 해 놓는 거는 독재..., 아~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순간 회의실 안이 잠깐 조용해졌다가, 다른 팀원들의 지원사격이 이어졌다. 거의 성토대회 수준으로 회의분위기가 치닫자. 빌런어공은 더 협의해서 다음에 이야기하자며 급하게 회의를 마쳤다. 그리고 잠시 후, 모두가 자리를 비운 사이, 출근한 지 거의 한 달이 다되어서야 사무실의 막내 직원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주사님!"


"네?"


처음 들어 본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속으로 혹시 내가 잘못한 건가? 너무 오버한 건가? 걱정하고 있는데,


"조금 전엔 멋있었어요. 누구도 그런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좀 속 시원했어요."


"아~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엄청 겁 많고 소심한 사람인데, 이건 말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 정말 그만둘 결심하고 말씀드린 거예요. 흑흑흑"


갑자기 레지스탕스의 수장이 되어버린 나. '에이썅' 주의라고 했던가? 옛날 개버릇 남주지 못하고 또 튀어나와 버렸다. 하지만 사무실의 분위기는 확 바뀌어 있었다. 마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엄석대를 몰아내고 난 뒤의 교실 분위기라고 할까?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처음 출근했을 때 느껴졌던 정적이고 침체된 분위기가 조금은 누그러진 기분이었다.


발 없는 말


빌런 어공은 나를 혼자서 어떻게 해보려다가 이 놈 건드렸다가는 괜히 자기만 손해일 것 같았는지 다른 이들의 손을 빌리기 시작했다. 마치 들으라는 듯이 전화통을 붙잡고 '새로 오신 박주무관님의 반발이 심해서...'라는 말을 연발하고 있었다. 잠시 후, 우리 팀의 수장 격인 단장과 2층의 늘공 조직의 팀장들이 회의를 하는 것 같았다. 단장실에서 큰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아직 들어온 지 한 달도 안 된 사람한테 무슨 수의 계약을 시키냐며 빌런 어공이 꾸지람을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수의계약이 꼭 지금 해야 하는 거냐며 2층 늘공 팀장들에게도 안 좋은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그 뒤로 빌런 어공은 나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이것도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나에게 먼저 사과를 하라는 팀원들의 제안에 빌런 어공은 그래도 내가 어렵다고 했단다.


이 빌런 어공의 성격, 특징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멘트가 있는데, 그는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제가 오타를 자주 내는데, 다른 사람 오타는 눈에 잘 뜨이는데, 제가 낸 오타는 잘 못 봐요."


그는 이렇게 별내 다산에서 개최된 직거래 장터의 주소, 10-1번지를 101번지로 잘못 공지해서 참가했던 농민들이 낯선 곳에서 헤매게 만들었다. 이건 내가 직관한 거다. 왜? 나도 거기 끌려갔다 왔거든.


어쨌든 이 한 사건으로 갑자기 2층에 나의 존재감이 부각됐다. 그리고 그때부터 사람들이 나에게 '주사'라는 호칭을 붙이기 시작했다. 농업기술센터 임기제 시간제 계약직 공무원 마급. 즉 제일 꼴찌 자리에 있는 나를 6급 공무원 호칭으로 부르는 거다. 이것은 앞으로 함부로 대하지 않겠다는 신호인 동시에 미친개라는 주홍글씨였다.


2층의 늘공들 사이에 나에 대한 '발 없는 말'이 삽시간에 퍼졌고, 그 뒤로 이상한 일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혼자만의 자격지심이었을 수도 있지만, 2층 사무실에 내가 들어서면 모두가 갑자기 입을 닫고, 하던 일을 멈추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 조용히 모니터를 바라봤다. 마치 교실에 선생님이 들어온 것 마냥 사무실 안은 조용해졌다.


그리고 어느 조직이나 모난 돌이 나타나면 버릇을 고쳐주겠다면 정을 들고 나서는 군기반장이 있기 마련이다. 경로당꾸러미 사업의 지원을 담당한, 얼마 전에 6급으로 승진해 의욕이 넘치는 주사가 한 명 있었는데, 이 사람에게서 좀 남다른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뭔가를 말하면,


"그럼 그건 앞으로 주사님이 해주시면 되겠네요!"


라고 말하기 시작한 거다. 앞에서 말했던 전 직장의 안전관리담당자와 비슷한 말투로 이 사람도 책임은 없고, 권리만 있는 것처럼 굴었다. 처음이고 아직 임용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나도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평범한 40대 중반 아저씨였다. 그래서 차차 맞춰가면 되겠지라는 생각에 하나 둘 떠넘기듯 넘어오는 일들을 해줬다. 신입의 '효용감'이라는 것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고, 공무원 오래 했으니 그만큼 힘든 일 많이 겪었으리라는 측은지심도 같이 발동했다.


미안하지만 안 미안해


정말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로 생각한다는 말이 맞는 건가? 아마도 민원인을 많이 상대해 봐서 잘못된 거라는 것을 더 잘 알 텐데도, 그의 이런 요구는 계속 됐다. 갑자기 없던 절차를 만들어서 나에게 주기도 하고, 본인일을 하지 않고 휴가를 가버려서 내가 할 수밖에 없게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사건이 터졌다.


"카톡!"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늘 올라오던 꾸러미 구성품에 대한 요리 레시피 공유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래에 조금 다른 멘트가 달렸다. 그래도 뭐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기겠지 하고 넘겼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서 하루를 정리하는데, 이상하게 이 멘트가 계속 생각났다. 그래서 레시피 사진을 확대해서 보니 문의전화가 그 6급 주사 늘공의 번호에서 내 번호로 바뀌어있었다. 구성품 불만에 대한 민원이 아무리 듣기 싫었다고 해도, 그런 변경을 하려면 적어도 나에게 먼저 양해... 아니 그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통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밤새 고민하다가 그래도 코멘트는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일어나서 카톡을 남겼다.


"문의전화번호는 제 번호가 들어가는군요? 저도 모르게..."


그리고 잠시 후 돌아온 답변. '싸우자는 건가?' 결국은 '미안하지만 안 미안해'라는 개소리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정말 딱 한 시간 고민한 것 같다. 출근 전까지 한 시간 동안 생각해 보고 도저히 이해가 안 가면 응전하자. 그리고 한 시간 후에 다시 카톡을 보냈다.


"제 번호는 빼주세요. 그리고 공식적인 사과는 죄송합니다겠죠."


그리고 잠시 후, 6급 늘공 주사에게서 개인 톡이 왔다.

힛 여러 번 보다가 실수로 '좋아요'를 눌렀다. 이게 뭡니까?


"사무실가서 다시 말씀드릴게요. 주사님 의견안여쭤보고 바꾼건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농산물납품에 관한건 주사님 번호가 맞는것 같습니다. 이따 들르겠습니다."


"그리고 저렇게 단톡방에 말씀하신건 기분이 좋지는 않네요."


그래 그냥 싸우자! 아주 개싸움 한 번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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