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들이닥친 민원 전화와 방문, 그리고 내 심장
공포조성
임용되기 전, 이곳을 추천해 준 대학동기와 만났다. 사전 정보조사와 지리도 익힐 겸, 친구의 차에 몸을 맡긴 채 초여름의 안성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친구는 내가 임용되는 날, 휴직원을 내고 휴가에 들어갔다. 면접을 보러 온 날 친구가 거하게 점심을 쏘면서 본인은 나랑 같이 시청으로 휴직원을 내러 간다고 했다. 이때 확 눈치를 챘다. '아~만만치 않구나.'
지원자가 없어서 모집 공고가 몇 차례 더 날 때부터, 그 '쎄'한 느낌에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지금까지 사회생활을 허투루 하진 않았으니 나만 잘하면 되겠지라는 낙관적인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아마 어렴풋이나마 눈치챘겠지만, 이 정도로 까내리는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마음의 정리가 어느 정도 끝났음을 말한다. 정말 놀랍다. 지금까지 글로 쓴 사건이 한 달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니, 지금 시점에는 결국 단장의 '그럴 거면 나가라!'는 말에 사표를 제출한 상태다. 하지만 들어오는 게 어려웠던 만큼 나가는 것도 쉽지 않다. '의원면직'을 위해서는 인사위원회가 열려야 하고, 이게 추석연휴와 맞물리며 기약이 없어졌다. 이게 진짜 공포다!
어쨌든 친구 부부를 따라 안성의 여기저기로 드라이브와 산책을 다니다가 더위도 식힐 겸 카페에 들어갔다. 그리고 공직자 부부인 그들의 '라떼'를 함께 감상했다. 그중에 그들이 공통적으로 조심하라는 민원인이 있었으니... 아~ 이게 말로만 듣던, 공무원을 죽음으로까지 내몰 수 있는 '악성민원'인가? 그들의 말에서 풍기는 라떼향기는 집요했다. 맛은 썼고,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한마디로 각성제. 그런데 커피는 그러라고 마시는 거 아닌가...? 살짝 비틀어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지는 게 이기는 거다.
전화가 울렸다. 공무원의 사무실 전화기는 녹취가 가능하고, 같은 공무원끼리면 어느 부서 누구인지가 뜬다. 그래서 발신전화번호가 '010'으로 뜨는 전화는 십중팔구 민원전화다. 경로당꾸러미작업을 마치고 돌아온 월요일 오후. 이때 울리는 전화는 100% 민원전화다. 뭐 '농산물 품질이 안 좋네'부터 '아직 안 왔네', '뭐가 빠졌네'... 그리고 혼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하다가 그냥 끊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품질이 안 좋은 농산물에 대한 민원은 100% 납작 엎드려 사죄한다. 그들의 말은 '음식쓰레기를 보냈네, 네가 가져다 먹어라'같은 센 낱말로 덮여있지만, 대부분의 서브텍스트는 '날 좀 봐줘'이다. 그러면 정말 효용 감 있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면 대부분 바로 누그러지며 '아니~ 내가 꼭 사과 들으려고 전화한 건 아니고, 이런 게 들어왔다고 알려야 할 것 같아서요. 다음부터 좋은 거 보내주세요.'하고 마무리된다.
'안 왔네', '빠졌네'도 마찬가지로 일단 사죄를 하면 대부분은 다음부터 잘하세요로 끝나고, 가끔 단가가 비싼 농산물은 여분으로 납품받은 것을 가져다 드린다. 포장작업하면서 생긴 실수다. 문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하다가 그냥 끊는 경우다. 찜찜하고,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친 것 같고... 하여튼 이런 민원전화를 받은 날은, 뉴스에서나 보던, 누군가가 사무실로 찾아와 혹시나 모를 폭력적인 사태가 벌어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게 된다. 나만 그러면 상관없는데 애꿎은 다른 직원들이 피해를 볼까 봐 낮게 더 낮게, 최대한 납작 땅굴을 파고들어 가서라도 더 납작 엎드리게 된다. 그런데, 글쎄~ 좀 단정적이긴 하지만, 악성민원은 없다.
감정통역사
헤헤헤 이제 겨우 3개월 했으니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다고... 막 20년씩 경력을 쌓은 공무원들은 말하겠지만, 생각해 보라. 당신들의 초심을... 아마 나 같은 생각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지 않았을까? 이런 초심 없이 감히 공무원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려고 한다면 정말 도시락 싸갖고 다니면서 말리겠다. 말 그대로 무모한 도전이고, 불나방 같은 생각이다.
민원은 행정이 아니라 감정이다. 프로세스가 아니라 사람을 'Touch'해야 하는 임무(업무)다. 감정 노동자가 아니라 훈민정음해례본에 나와있는 대로 어린 백성을 가엽게 여기는 애민정신이 필요하다. 다만 'K-Style 민원'은 전화기 너머의 말보다, 말하지 않은 감정을 읽는 일이 더 어렵다. 나는 행정직이 아니라, 감정통역사였다.
그래도 굳이 통쾌함을 선사할 이상한 민원처리 사항을 꼽자면, 어느 날 할머니 민원인의 전화가 왔다.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내가 온 이후로 구성품이 시원찮다며 이대로 계속하면 시에 민원을 넣겠다는 반 협박성 민원이었다. 물론 심장은 덜컹 내려앉았다.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뭐가 불만일까? 머릿속이 복잡해지는데, 이분이 자기 얘기만 끝내고 끊어버린 거다. 변명을 하려는 찰나에 수화기 너머로는 '뚜뚜'소리만 들려왔다.
그냥 여기서 누군가의 화풀이를 들어줬네... 저분이 뭔가 오늘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었겠지...라고 넘길 수도 있었겠지만, 이상하게 오기가 났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 정말 안성시의 농가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설득해서 납품받은 농산물인데... 사실 이번 주는 계란을 빼고 꿀을 실험적으로 넣기도 했었기 때문에 더 그랬을 수도 있다. 아니 무더위가 끝나가는 환절기 9월에 건강하시라고 꿀을 넣어드린 게 그렇게 잘못한 건가? 속상했다. 그래서 그러면 안 되는데 발신자번호를 찾아서 다시 전화를 했다. 뒷 일은 생각하지 않는 '에이썅' 형질이 발현되어 버렸다.
신호가 간다. 철컥. 전화를 받았다.
"아~ 네! 선생님 조금 전에 전화 주셨던 주무관이에요? 전화가 갑자기 끊긴 것 같아서 다시 전화드렸어요..."
에둘러 왜 당신 할 말만 하고 끊냐고 따졌다. 상대방은 겁이 좀 났는지 목소리는 떨렸고, 말투는 차분해져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아이고 선생님. 이 집 앞에 나가면 천지로 깔려있는 대파, 감자... 이거 말로 자꾸 넣어줍니까?"
안성은 과거 교통의 요지답게 경상도 사투리, 충청도 사투리, 경기도 사투리, 강원도 사투가 모두 들리는 특이한 도시다.
"아 그러셨어요? 그럼 선생님 뭐 넣어드릴까요? 말씀해 주시면 제가 고려해 볼게요."
"아~! 그 있잖아요? 과일 같은 거~ 만날 푸성귀만 보내지 말고, 과일도 쫌 너 주이소!"
"아~ 그러셨구나? 그럼 선생님... 안성에는 배, 포도가 대부분인데... 뭐 넣어드리면 좋을까요? 제가 알아볼게요."
"아니 그런 거 말고. 우리 딸이 애플수박을 농사짓는데... 그런 거 쫌 넣어주면 안 되겠십니까?"
잡았다! 요놈! 이제야 해석이 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