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공 VS 실세
링 위에 오르다.
한 달 만에 이런 회의를 열게 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의 시선으로는 눈엣가시처럼 느껴졌을 테다. 그것도 신규임용자가, 게다가 늘공도 아니고 어공이? 갈등 당사자들과 그들의 소속 팀장까지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참석자는 모두 '왜 지금 이 시간에, 이 자리에 앉아있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표정관리는 고사하고 시선처리를 어떻게 할지 몰라 일부러 눈의 초점을 맞추지 않고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 팀의 단장이 입을 열었다.
“자~! 뭐가 불만인지, 대상자들 앞에서 한 번 직접 말해보쇼.”
'아차차 이 사람, 이런 사람이구나.'
큰 오산이었다. 아군인 줄 알았던 그가 최종보스로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진보주의자임을 자처하며 평등과 약자 보호, 환경보호를 외쳐오던 그가, 지금 이 회의장에서 가해자를 ‘나’로 지목하고 있었다. '나의 투쟁'은 히틀러의 그것으로 매도되고 있었다.
1 ROUND
'이게 불만이라고?'
과연 지금 내가 링 위에서 싸워야 할 대상이 저들인가? 시스템인가? 내 주먹이 그저 불만으로 치부되어야 하는 것인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아차 실수하면 말려들기 십상이었다. 이거 몰래카메라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현실적이었다. 마치 드라마에서 악당들이 작당하고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그런 장면 같았다.
나는 말했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분명하게... 그들은 들었다. 그러나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설명했다. 구조를, 책임을, 현장을... 하지만 돌아온 것은, 먼저 6급 늘공이 말했다. 본인은 하청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고, 그렇게 대해본 적도 없으며, 내가 주장하는 기형적인 형태라는 말에도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덧붙여 내가 카톡에 남긴 말이 마치 자신을 '미안하다'와 '죄송하다'도 구분 못하는 사람처럼 취급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상했다며 울먹였다.
'젠장... 사회생활에서 눈물 공격은 반칙이지.'
단장이 나섰다. 아니 6급씩이나 된 사람이... 공무원 생활을 15년 가까이 한 사람이... 그깟 어공 한 명이랑 싸운다는 게 말이 되냐며 늘공을 나무라는 것 같았지만 말속에는 나에게 <네 주제를 알라>는 암시가 담긴 메시지를 보냈다.
'이 자 막판보스가 확실하네'
그렇게 늘공의 갑질은 나의 주제넘은 반항으로 결론을 내렸다. 나는 가마니가 될 수 없었다. 단장은 겨우 한 달밖에 안된 사람이 무슨 구조와 책임과 현장을 이야기하냐면서 무시했다. 그래서 단장에게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나는 이 자리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단장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게 비웃음인지... 어이가 없는 웃음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이 순간부터였던 것 같다. 단장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2 ROUND
지켜보고 있던 공공급식 팀장이 나섰다. 결국 경로당꾸러미사업의 책임자는 '나'이고 공공급식팀은 지원업무에만 집중하겠다고 선언했다. 사실상 나의 기세에 수건을 던진 것이다. 그런데 정말 실상은, 그들이 직접 이 사업을 하려면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그래서 그냥 먹고 떨어져라라는 식으로 한 발짝 물러서준 것뿐이다. 내막이야 어쨌든 내가 원하는 바를 얻었으니 그냥 넙죽 받으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늘공과의 교통정리는 끝났다. 그리고 얼마 후 공공급식팀의 꾸러미 지원 담당자가 7급으로 교체됐다. 아무래도 6급 늘공의 자존심이 이것까지는 허락하지 않았나 보다.
공공급식 팀장의 진행으로 이야기는 '똥파리 (a.k.a 박힌 돌)'들로 넘어갔다. 회의 서두에 단장은 이들에게도
'뭐 양파 넣어주기로 약속하고 돈 받은 거 있어요?'
라며 나의 고발 내용을 애들 장난처럼 넘기려고 했다. 이 부분이 내가 가장 열받는 부분인데... '내로남불'이라고 하던가? 얼마 전 조땡혁신당에서 다시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나온 진보진영 소속 인사의 2차 가해가 논란이 됐다. 단장의 이 반응이 그 사건과 비교했을 때 본질적으로 다를까? 이게 당사자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게 되는 건가?
「정확하게 사실관계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 솔직히 말씀드려 한 발짝 떨어져 보는 사람으로서 그렇게 죽고 살 일인가」
라는 2차 가해발언과 뭐가 다른가? 단장은 진보진영을 자처하는 사람이다. 이러니 '내로남불'이라고 욕먹지.
똥파리들은 참석자들이 모두 자기편인 것을 확인하자 강한 어조로 나를 공격했다. 자신들은 담당자가 부재인 사업에 도움이 되고자 이렇게 까지 했으며, (사실상 이건 자백 아닌가? 나만 눈치챈 거야?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거야?) 선하고 착하신 주무관님이 오신 것 같아서 (아후 소름) 이제 즐겁게 일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공산당 완장차고 다니는 일은 본인만 즐겁지) 내가 담합이라는 둥, 공무원 사칭이라는 둥 무서운 단어로 사람 겁을 주니까 이게 갑질이라나 뭐라나?
아휴 정말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이 없었다. 말 바꾸는 거야 이미 징그럽게 많이 겪어서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잘못이 뭔지 아직도 모르고 저런 소리를 하는 그 뻔뻔함은 정말 똥파리 그 자체구나라는 썩은 감탄만 나올 뿐이었다. 이것도 공공급식팀장이 나서서 교통정리를 했다. 그래서 그들의 주장에 반박하지 않았다. 나는 얻을 것을 얻었으니까 괜히 힘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똥파리들은 그래도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내 탓을 하다가, 결국은 똥 씹은 표정으로, 앞으로 본연의 업무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이 정도면 자백이야! 자백!)
회의는 끝났다. 아니 나를 향한 성토대회는 끝났다. 그리고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경로당꾸러미사업의 주관은 내 몫이 되었고, 공공급식팀은 지원, 농가조사원들은, 품목과 가격 결정 등의 사항에 일절 관여하지 않고, 농가들의 납품 품질 조사와 신규농가발굴 등의 본연의 업무로 돌아가기로 했다.
너무도 당연한 것을 진짜 어렵게 어렵게 얻어냈다. 똑바로 갈 길을 빙빙 돌았다. 겨우 정상 궤도로 다시 돌려놨다는 안도와 함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어공이 아니었다. 나는 기록자가 되었다. 기록자는 증인이 아니다. 기록자는 구조를 해부하고, 다음을 준비하는 사람이다. 시스템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