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공 VS 시스템
시스템은 사람보다 단단하다
사람은 설득할 수 있다. 사람은 감정을 가진다. 사람은 실수도 하고, 때로는 미안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스템은 다르다. 시스템은 감정이 없다. 시스템은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다. 시스템은 '그렇게 정해져 있어서요'라는 말로 모든 책임을 회피한다. 그래서 시스템을 잘 설계하고 잘 돌아가게 유지보수해야 한다. 민주주의란 그런 것이다. 어느 영웅적인 누군가에 의해서 성패가 좌우되는 것은 봉건사회에나 있을 법한 얘기다.
"여사님~! 그런 걸 담합이라고 하는 거예요~!"
여기 오기 전에 새벽시장에서 사무장을 했었다고 했다. '호칭을... 어떻게 불러드릴까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데 지금 통화에서는 일부러 '여사님'이라는 호칭을 썼다. 눈치가 좀 있는 사람이라면 이게 무슨 뜻인지 바로 캐치하고 행동을 조심할 것이다. 예상대로 수화기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정확히는 이제야 본인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는 깊은 탄식만 흘렀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큰 오산이었다. 통화는 일단 종료됐다. 무슨 더 할 말이 있으랴... 이대로 두면 더 큰일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들이 다니는 농가 조사를 따라다녀보기로 했다. 결과는 처참했다. 분명히 공무원 신분이 아닌데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기간제 공무원이라고 소개했다. 나중에 받아 본 모집 공고에는 기간제 근로자로 표기되어 있었다.) 농민을 만나서 어디선가 주워 들었을 법한 아직 논의 중인 정책을 홍보하고 다녔고, 어디서 의뢰받았는지 (박힌 돌답게 여기저기 발이 안 닿는 곳이 없었다.) 농업기술센터의 사업에 참여자를 모집하고 다녔다. 이래저래 농가조사원 일 뿐만 아니라 현장에 다니는 많은 일을 대행하고 있는 듯 보였다.
현장에서 만난 한 농가가 나에게 어떤 사업에 대해서 말을 꺼내자 똥파리들은 얼른 입단속을 시키며 나와 격리시켰다. 그건 자기와 얘기할 거리라며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했다. 게다가 담당자인 나도 모르는 추진예정사업까지 마치 금방이라도 착수할 것처럼 말하고 다녔다. 음... 앞서도 말했지만 그들에게는 그럴 권한도 책임도 없다. 물론 영업사원 마인드로 접근하는 그들만의 노하우일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영업일이 아니다. 그야말로 공무다. 이것은 책임과 권한이 없는 자가 공수표를 날리고 다니는 현장이었다. 이것은 행정의 신뢰를 갉아먹는 시스템의 자가면역질환 같았다.
현장에 답이 있다는 진리
전 직장부터 항상 현장에 답이 있다는 소신으로 일을 해왔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면 항상 현장부터 찾았다. 그리고 그 안의 구성원들의 의견을 가장 먼저 경청했다. 하지만 똥파리들과 같이 다닌 현장은 정말 처참했다. 박힌 돌을 빼내기가 쉽지 않음을 직감했다. 한낱 희망을 갖고 단장을 찾았다. 그리고 그들의 행태를 '호가호위'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농가조사원은 소중한 인적자원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되풀이했다. 나의 부족한 언변으로는 그들의 실체를 밝힐 수 없었다. 만약 방법이 있다면 내가 똥파리가 되어 그들 앞에서 손에 불이 나도록 비벼야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왜? 이 조직은 2026년이면 사업이 종료될 운명이었다. 하는 수 없이 부단장에게 보고하여 공공급식팀장과 면담을 했다.
웃긴 게 이 농가조사원은 공공급식팀에서 고용하고 월급을 주었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 팀 소속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그들이 우리의 지시에 따라 움직일 이유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제야 이 경로당꾸러미 사업의 시스템(체계)이 눈에 들어왔다. '보건소 노인 돌봄과'에서 예산을 따와 집행하는데, 실업무를 농업기술센터 공공급식팀에게 전담시켰다. 이것을 다시 공공급식팀에서 농가조직화라는 명분으로 신활력플러스사업추진단에 넘긴 형태였다. 사기업으로 따지면 하청에 재하청을 내린 상황이었다. 아~ 그제야 왜 사람을 하청업체 취급했는지 이해가 갔다. 그리고 똥파리들이 왜 기고만장해서 설치고 다녔는지도 이해가 됐다.
공공급식팀과의 면담에서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확실해졌다. 이 엿같은 시스템(체계)이 문제였다. 사공이 너무 많은 게 문제가 아니라 사공이 아예 없고 선장만 한 가득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선상 반란이 일어나니 남아 날 선원이 없었다. 왜 이렇게 사람이 계속 그만두고, 지원자가 없는지 알 것 같았다. 나를 이런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혼자 쏙 빠져나간 친구는 그 뒤로 한동안 내 푸념과 원망을 다 받아내야 했다.
부단장과 공공급식팀장과의 원리원칙적이기만 하고, 전혀 진전이 없는 대화는 결국 더 두고 보기로 결론을 내렸다. 1개월도 안 되는 내 짧은 경력이 발목을 잡았다. 답 없이 현상을 유지한 채로 내려왔다. 답답해서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나는 6급 늘공의 카카오톡 테러를 빌미로 2층에 올라가 한바탕 난리를 쳤다.
그리고 단장, 부단장, 공공급식팀장, 6급 늘공, 농가조사원까지 참석한 회의가 진행됐다. 나는 이대로 이 기형적인 체계에서는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으며, 만약 계속해야 한다면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많은 중소농가를 참여시키는 이상적인 형태 대신에, 최소한 경로당에서라도 민원이 안 들어오도록, 공판장(가락동 농산물 시장)에 납품하는 대농가들의 물품으로만 꾸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잘 돌아가면 문제없지만, 시스템은 얼굴 없는 권력이다.
요약해자면, '농가 조직화'라는 회의가 열렸지만 나는 초대받지 않았다. 내가 임용되기 전에 일어난 일이다. 즉 결정은 내려졌지만, 나는 통보받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이것을 인수인계해주지 않았다. 그냥 막연히 조심하라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일부 문서는 존재하지만, 중구난방으로 알아볼 수 없는 수기로 작성되어 있는 메모형식이었다. 게다가 규칙은 있지만, 그 규칙을 만든 사람은 없다. 아니 정확히 누가 만들었는지 알면 안 되는 분위기였다. 끈질기게 거슬러 올라가면 알 수 있었지만, 안다고 바뀔 것은 하나도 없었다. 헛수고라는 말이다. 결국 책임자는 있지만, 그 책임자는 늘 “위에서 그렇게 하라고 해서요”라고 말한다.
시스템은 외주라는 이름으로 분산된다. 용역사가 회의를 주최했다. 농가 조직화라는 이름으로 납품 순서가 정해졌다. 가격도 정해졌다. 품목도 정해졌다. 그런데 그 회의에 모든 농가가 참석한 건 아니었다. 그 회의에 나는 없었다. 그 회의에 행정은 없었다. 그런데 그 회의의 결과를 나는 집행해야 했다.
시스템은 나를 어공으로 만든다. 나는 책임자다. 나는 권한이 있다. 나는 현장을 알아야 한다. 나는 농가를 직접 만나고, 설득하고, 조율한다. 그런데 시스템은 나를 “집행자”로만 본다. 업무는 없고 임무만 있다. 나는 결정할 수 없다. 나는 바꿀 수 없다. 나는 단지 “그대로 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그래서 나는 싸운다. 나는 자색 양파를 넣고 싶었다. 나는 새로운 농가를 발굴하고 싶었다. 나는 시스템이 놓친 사람들을 끌어올리고 싶었다. 나는 시스템이 만든 담합을 깨고 싶었다. 나는 시스템이 만든 순서를 뒤집고 싶었다. 나는 시스템이 만든 가격을 다시 계산하고 싶었다. 암묵지를 없애고 싶었다.
어공은 시스템을 바꿀 수 있을까?
나는 아직도 계약직이다. 나는 아직도 임기제다. 나는 아직도 어공이다. 그런데 나는 시스템을 흔들었다. 나는 질문했다. 나는 확인했다. 나는 기록했다. 나는 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