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칭 연대기 : 시샘도 즐겨야지
롱다리
10대에는 다리 길이가 조롱대상이었다. 다행히, 뒤에서 수군거릴지언정 아직까지 멸칭으로 사람을 놀리는 문화는 없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댓글? 그게 뭐예요?) 키는 컸는데... 칫, 이게 뭐야?! 앉은키가 컸다. 지금은 인성 문제로 거의 사장된 개그맨이 퍼트린 유행어 같은 거였다.
아마 이 세대가 영양상태가 좋아지며 표준 키가 확 커졌나 보다. 그러면서 차별화된 장점으로 내세운 것이 다리 길이였다. 하지만 먼 몽골 평원을 말 타고 내달리던 기마민족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나에게, 아프리카 초원을 뜀박질하던 수렵 부족의 유전자는 있을 리 만무했다. 긴 허리와 다부진 닭다리는 말타기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누군가 '요롱이'라며 조롱할 때는, '음... 말도 못 타서 뜀박질이나 하고 다니는 것들이 잘난 척 하기는... 루이 세바스찬 윌리~~~ 엄스!!'을 외치고 다녔다. (물론 아무도 몰랐다. 작고 강력하게 속으로만 외치고 다녔으니까...)
루저
2~30대에는 여성들에게 '루저(Looser)'라는 멸칭을 들으며 살아야 했다. 그것도 한국인도 아닌, '미녀들의 수다'라는 한국에 사는 외국인 여성들의 입을 통해서... 롱다리 열풍은 패션 트렌드가 몸짱으로 바뀌면서 사그라들었다. (물론 몸짱도 아니었다.)
그 시절은 ‘스펙’이 전부였고, 스펙이 없으면 ‘루저’였다. 다리 길이도, 연봉도, 학벌도, 키도 (외제차 키도 포함해서 ㅋㅋㅋ)... 모든 게 숫자로 환산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을 지나며 나는 점점 '나는 왜 이러지?'에서 '다들 왜 저러지?'로 이동했다.
영포티
그리고 이제, 40~50대가 되니, '영포티'란다. 영(Young)한 포티(Forty). 뭔가 나잇값 좀 하라는 말 같기도 하고, 젊은 척하지 말라는 경고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그래, 영포티라도 좋아! 시샘도 즐기고, 조롱도 유쾌하게 받아들이고, 나를 규정하려는 말들 위에서 춤추는 나이... 그게 진짜 영포티 아닐까?
이제는 다리 길이도, 슬림핏도, 루저도, 그냥 지나온 풍경일 뿐이다. 나는 여전히 긴 허리를 가지고 있고, 말은 못 타지만, 말은 잘한다. 크크크. 오늘도 기온은 낮지만, 내 체온은 내가 정한다. 미세먼지도 목이 좀 칼칼할 뿐, 외출하고 와서 잘 씻고, 덕분에 삼겹살 먹을 명분도 생겼다.
영포티라도, 내가 행복하면 좋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