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내가 나를 보는 방식 (자기 인식) (7)
얼굴젓
지금은 사라진 풍경이지만, 어린 시절 ‘아파트’라 불리던 연립주택 앞에는 매일 아침 행상들이 찾아왔다. 1톤 트럭으로, 혹은 오토바이에 리어카를 매달고 과일, 생선, 생활용품을 팔던 작은 장터였다. 외상으로 물건을 사가도 서로 믿음이 있었고, 그런 외상값을 두고 언성을 높여도 금세 화해하고 웃음을 나누던 정겨운 관계가 있었다. 서로 연결되어 뗄 수 없다는 강한 인연의 기운이 서로를 의지하게 만드는 그런 '사회'였다.
그중 젓갈 장수 아저씨는 매일 아침 7시, 확성기에 대고 간드러진 목소리로 타령을 했다.
“명란젓! 창난젓! 맛있는 오징어젓 있어요! 싱싱한 젓갈이 왔어요~ 조개젓, 새우젓, 어리구~울 젓!”
그 목소리는 어딘가 구슬프면서도 신났고, 해학적이면서도 귀에 쏙쏙 박혔다. 나는 베란다에 나가 그 소리를 감상하곤 했다. 그런데 어린 귀에는 마지막 멘트가 ‘어리굴젓’이 아니라 ‘얼굴젓’으로 들렸다. 창난젓, 명란젓, 조개젓, 오징어젓은 다 알겠는데, 도대체 얼굴젓은 뭘까?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엄마에게 달려가 물었다.
“엄마! 엄마! 얼굴젓이 뭐야?”
엄마는 잠시 귀를 기울이다가 웃으며 말했다.
“어! 정말 얼굴젓처럼 들리네? 얼굴젓이 아니고 어리굴젓이야.”
그 순간 내 세계를 지배하던 ‘얼굴젓’은 사라졌다. 환상은 무너지고, 사회적 현실인 ‘어리굴젓’이 들어왔다. 어린 나는 마지막 아쉬움으로 “왜 굴젓을 어리굴젓이라고 해?”라며 매달렸지만, 대답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 뒤로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도 '얼굴젓'은 되살릴 수 없었다. 세상의 모든 '얼굴젓'은 '어리굴젓'으로 대체되어 재편되었다.
두 눈의 시선
세월이 흘러 상황은 역전됐다. 이제는 부모님이 낯선 외래어와 신조어를 나에게 물어오신다. 나는 쉽게 "알려줘도 모르잖아요?”라며 내팽개친다. 어쩌면 그 작은 무심함이 부모님을 극단으로 치우친 다른 세계관으로 몰아넣었으리라. 빠르게 변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마지막 아쉬움이, 두 분을 한쪽으로 기울게 만들었으리라. 그나마 알아듣기 쉽고 과거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말을 하는 곳이 바른쪽이었으니까.
똑같이 나는 두 눈으로 나를 본다. 하나는 내 안에서 나를 바라보는 눈, 다른 하나는 바깥에서 나를 바라보는 눈이다. 내 눈은 까칠하다. '이게 잘 썼다고 생각하니?'라며 나를 의심하고, 스스로를 깎아내리며 불안하게 만든다. 그 눈은 나를 채찍질하며 흔들리게 한다. 남의 눈은 다정하다. '아직은 초안이니까, 이제부터 다듬어가면 되지.'라며 안정되게 한다.
그렇게 과장된 칭찬으로 나를 부풀리기도 하고, 냉정한 평가로 나를 움츠러들게도 한다. 두 눈은 내가 보지 못하는 나를 보여주지만, 그 속에서 나는 때로 확인되고, 때로 잃어버린다. 두 눈은 서로 다른 말을 한다. 흔히 어깨 위의 천사와 악마로 묘사되는, 남의 눈과 내 눈은 나를 세워주고, 나를 깎아내린다.
그러나 어느 쪽도 온전한 진실은 아니다. 진실은 그 사이의 틈, 내가 흔들리는 그 공간에 있다. 까칠한 내 눈은 자기 성찰의 힘이고, 다정한 남의 눈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힘이다. 둘 중 하나만 있으면 균형이 깨지지만, 둘이 함께 있을 때 비로소 흔들림 속의 내가 드러난다. 이것은 결론이 아니다. 나는 단지 중간에 서서,
내 눈과 남의 눈 사이에서 흔들리며, 그 흔들림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얼굴젓은 이제 사라졌지만, 그때의 나는 분명히 존재했다. 내 눈이 만든 세계와 남의 눈이 알려준 세계가 충돌하며, 나는 흔들렸고, 그 흔들림 속에서 조금 더 나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흔들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