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내가 나를 보는 방식 (자기 인식) (8)
흔히 거울효과라고 한다.
직접 겪어봐야 상대방의 입장을 진정으로 알 수 있다. 잠깐이지만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나는 제대로 거울치료를 받았다. 나를 괴롭히던 모순들을 다른 이들을 통해, 그들의 입장이 되어 겪었다. 마치 통과의례 같았다. 그 시련은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경험이었다.
어릴 적 나는 경험이 적다고 탓하는 어른들을 속으로 비웃곤 했다. ‘지들이 얼마나 잘나서?’라며 콧방귀를 뀌던 그때의 나에게 지금은 꿀밤 한 대를 준다. 살아보니 다르더라. 지금 20대 후반, 30대 초중반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아마 속으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인증된 성인이고 사회에서 역할을 하고 있는데, 나이 좀 많다고 유세 부리는 것도 아니고, 당신들의 훈수는 필요 없다.’ 맞는 말이다. 나이가 훈장도 아니고, 훈장질할 자격도 없다. 그리고 아무리 말해줘도 소용없다. 직접 겪어봐야 안다.
공감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공감은 같은 처지를 겪어야 가능하다. 다만 모든 경험을 직접 할 수는 없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다. 그래서 우리는 책을 읽고, 소설을 읽고, 드라마와 영화를 보며 대리 경험을 한다. 그것은 자기 인식의 한계를 조금이라도 넘어서는 방법이다. 그래서 나는 드라마와 소설 속에서 나를 대신 살아내며, 조금 더 나를 이해한다. 내가 드라마와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다.
그러나 결국 자기 인식은 언제나 한계에 부딪힌다. 내가 나를 설명하려는 순간, 이미 나는 달라져 있다. 거울 밖에선 오른손을 들고 있지만, 거울 속에선 왼손을 빳빳이 들고 있다. ‘내가 뭐가 틀렸냐’는 표정으로 거울 속의 나는 언제나 다른 논리를 내세우며 나를 비웃는다. 때로는 내 안으로 수렴해야 할 깨달음이 잘못 발산되어, 타인을 향한 상처가 되기도 한다.
붙잡으려는 기억은 왜곡되고, 정의하려는 단어는 나를 고정시키지만 동시에 나를 가둔다. 내 눈은 나를 의심하고, 남의 눈은 나를 확인해 주지만, 그 어떤 눈도 나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나조차도 '나'를 알기 위해 수많이 흔들리고, 그렇게 흔들리고 나서야 겨우 조금 이해할 뿐이다. 그래도 결국 끝내 다 알 수는 없다.
자기 인식의 한계는 결핍이 아니다. 다른 것으로 채워도 허전한 마음은 채워지지 않음을 이미 잘 알고 있다. 자기 인식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조건이다. 내가 인식하는 범위 안에서 나는 살아있으나, 그렇지 못한 곳에서는 죽어있다. 나는, 내 존재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다. 상자는 아직 닫혀 있고, 나는 그 안에서 살아 있으면서 동시에 죽어 있다. 열림과 닫힘 사이, 그 모든 가능성 속에서 흔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