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나를 더 깊이 이해받고 싶다. (2)
무시(虫)
설거지를 마치고 행주로 싱크대 주변을 정리하는데, 건조대 저 구석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헉! 작은 움직이었지만,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없어야만 하는 곳에서 민첩하고 은밀하게 움직이자, 갑자기 심장이 조여왔다. 쉽게 말해서 혐오였다. 돈벌레였다. 이 녀석이 나의 관측범위에 잡혔다.
자기도 시선을 감지했는지 처음엔 죽은 척을 하는 듯했다. 인간도 벌레도 얼음이 되어, 굳어 선 채로 꼼짝 못 하는, 그런 웃픈 대치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때 마침 손에는 수돗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걸 살짝 뿌려봤다. 이 녀석 오스카상이라도 노리나? 마치 살충제를 맞은 것 마냥 꿈틀꿈틀 난리부루스를 쳤다.
그러다가 이내 무해한 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아~ 너무 의인화하고 있나요?) 자기도 무안해져서는 재빠르게 '쥐구멍에라도 숨는 심정'같이 저 구석 어딘가로 샤샤삭 사라졌다. '저걸 쫓아가서 잡아말아? 에프킬라를 뿌려말어?' 고민하는 순간, 갑자기 초등학생 시절 오락실 집 아들과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그는 오락실을 운영하는 부모님을 두었다. 공부도 제법 잘했고, 말도 조리 있게 했다. 하지만 처음 봤을 때 얼굴은 묘하게 특이했다. 잘생겼다고 하기엔 이목구비가 중구난방이고, 못생겼다고 하기엔 묘하게 개성이 있었다. 첫인상은 솔직히 옥동자를 연상시키는 인상 찌푸리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이 친구는 이내 자신이 오락실 집 아들이라는 사실을 드러냈다. 그 당시 오락실이라고 하면 불량청소년 집합소였다. 그래서 가까이하면 안 될 친구라는 낙인과도 같은 것이었다. 게다가 이 친구 동네 껄렁한 형들과 안면이 있다는 이유로 묘하게 거들먹거렸다.
그런데 자기 집에 데려가 오락을 공짜로 몇 판 시켜주니 사람이 달라 보였다. 얼굴이 변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아이의 맥락과 관계가 드러나자 인식이 바뀐 것이다. 평가가 이해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억지로 끌려간 척했지만 사실 이 친구가 자기 집에 가서 놀자고 할 때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렇게 학년이 끝날 땐,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떠올리면 웃음 짓게 되는 얼굴이 되어 있었다. 정이 들어버렸다. 이 친구는 5학년이 되면서 서울로 전학을 갔다. 거기서 올백을 맞았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나도 이사를 가고는 완전히 소식이 끊겼다.
돈벌레와 오락실 집 아들 이야기는 닮아 있다. 겉모습만 보고 내린 평가와, 맥락을 알게 되면서 생긴 이해의 차이. 평가란 눈앞의 모습만 보고 내리는 단정이고, 이해란 그 존재가 가진 맥락과 본질을 받아들이는 수용이다. 평가가 빠른 결론이라면, 이해는 시간을 들여 맥락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나에게 이익이 되는 뭔가가 있어야 한다는 점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집에 벌레가 나타나면 난리가 나는 집이 많다. 하지만 바퀴벌레가 아닌 이상, 사실 그렇게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 특히 돈벌레라 불리는 '그리마'는 바퀴벌레와 그 알을 포식하는 익충으로 알려져 있다. 과거에는 부잣집에만 많이 출몰한다고 해서, 잡으면 재물복이 달아난다는 미신까지 있었다. 겉모습만 보고 내린 평가와, 그 존재의 역할을 알고 나서 생긴 이해는 이렇게 다르다.
돈벌레를 잡을까 말까 고민했던 순간과, 오락실 집 아들과의 첫 만남은 그렇게 내게 평가와 이해의 차이를 가르쳐준 작은 장면들이었다. 평가는 눈앞의 순간이고, 이해는 시간이 만든 얼굴이다. 돈벌레도, 친구도, 처음엔 낯설고 불편했지만 알고 보니 내 삶을 지켜주고 웃음을 주는 존재였다. 평가와 이해의 차이는 그렇게 작은 일상에서 드러난다. 겉모습만 보고 내린 판단은 늘 불완전하다. 조금 더 들여다보고, 함께 시간을 보내야 비로소 이해가 시작된다.
이렇게까지 생각이 미치자 누군가가 본질을 못 보고 나를 제대로 이해해주지 못하면 너무 서글퍼질 것 같다는 슬픈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가족이라면?' 한동안 나를 괴롭혔던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아픔들은 대부분 타인에 의해 '피해의식', 심하면 '피해망상'이라는 말로 간단히 평가, 정리 돼버린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내가 내려야 진정으로 이해된다. 그게 상처받은 이들이 가진 문제의 본질이다.
결국 남이 내린 혹은 내가 내렸더라도, 순간적인 평가에 흔들릴 필요는 없다. 용어, 낱말, 진단명으로 이름 붙여진 명사에 상처받지 말자. 진정한 이해는 남의 눈이 아니라,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서 시작된다. 그것이 시간이 걸려도 나를 연구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