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나를 더 깊이 이해받고 싶다. (마무리)
프로 불편러
이해를 하거나 받으려면 결국 타인을 만나야 한다. 그렇게 만나게 된 두 사람은 처음엔 서로 자기 속(정체성)을 숨긴다. 처음부터 속내를 드러내는 것은 겸손, 겸양이라는 미덕과도 거리가 멀고, 차포 뗀 장기판과도 같다. 간단하게 보호색이라고 하자. 그런 배경도 다르고, 환경도 다른 두 사람이 만나서 대화를 해야 한다. 욕망이 충돌하는 순간이다. 인간이 만나는 데 욕망이 충돌하지 않는 만남은 있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가 믿을 구석은 사회성이라고 하는 상대방의 ‘선의’밖에 없다. 하지만 선의라는 것도 결국은 서로가 속을 숨긴 채 만들어낸 사회적 합의일 뿐이다. 겉으로는 매끄럽지만, 그 안에는 언제든 균열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진짜 이해를 갈망하는 사람은 그 합의에만 기대지 않는다. 오히려 불편을 감수하면서라도 자기 속내를 드러내려 한다. 그 순간 그는 ‘프로 불편러’가 된다.
프로 불편러는 불편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불편을 감수하면서라도 진실을 드러내려는 태도다. '이게 맞잖아, 저게 맞잖아'같은 완벽을 추구하는 목소리 속에는 이상향을 향한 간절함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종종 사회적 선의와 충돌한다. 속을 숨긴 사람들이 모여 만든 선의가, 오히려 솔직한 목소리를 불편하게 만들고 배제하는 순간이 있다. 반대로 예민하고 섬세한 프로 불편러들을 배려하던 선의가, 안목을 과시하고 잘난 척하려는 일부 유사 '프로 불편러'들 때문에 결국 잡아먹히고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프로 불편러'는 그래서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된다. 안타깝게 진짜 이해는 바로 그 긴장 속에서 태어난다. 불화, 싸움이 없다면, 평화에 찌든다고 하던가, 그건 그것대로 죽은 사회다. 이해라는 평화는 불편을 견디며, 불완전한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에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해는 설명의 완벽함에서 오지 않는다.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을 서로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은 타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나를 더 깊이 이해받고 싶다는 갈망을 넘어, 나와 연결될 사람을 찾는다. 이해는 끝이 아니다. 연결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