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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없는박영감 Feb 13. 2023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당신은 까마귀인가요? 백로인가요?

 '차라리 몰랐다면 더 좋았을 것을... 왜 생각이란 걸 해서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게 편하지. 매뉴얼 있으면 그대로 따라 해. 그게 편해. 가만히 놔두면 흉터 없이 지나갈 텐데 꼭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지. 그걸 꼭 해봐야 아나. 생각은 그냥 생각으로 묻어두는 게 차라리 낫지.'

제품 개선 회의 3시간을 회사 다이어리에 이렇게 낙서하며 때운다. 까마귀들이 우는 소리가 유난히 시끄럽다.


 임원이 회의를 소집한다. 각 팀장들이 들어간다. 고인 물들끼리 모여서 이제 흐르자고 한다. 그동안 자기 자리에서 망부석이 되어 팀원이 작성한 보고자료에 틀린 숫자, 오타나 지적하고 PPT 글씨 크기나 고민하던 사람들이 모여서 저런 회의를 하려니 다들 먼 산만 본다. 다른 사람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서로 어색하고 스마트폰이라도 보면 딴짓한다고 혼날 게 뻔하니 눈에 초점을 푸는 게 낫다 싶다. '나만 아니면 돼' 바람이 회의실에 분다. 누구 하나 말이 없어 답답한 임원은 회사에 놀러 다니냐며 회의실 밖까지 들릴 정도로 호통을 친다. 아무 성과 없이 겨우겨우 회의시간이 지나가고 각자의 팀에 돌아온 팀장들은 팀원들을 불러 모은다. 위에서 제품 개선 아이템을 내라고 하니 막내는 회의실 예약하고 각자 아이템 열 개씩 찾아서 참석하라고 한다. 그리고 해산.


 예전에는 이렇게 해산하면 같이 탕비실에 몰려가서 종이컵에 커피 한 잔씩 타들고 나가서 담배 피우며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척이라도 했었는데, 이제는 그냥 자기 자리에 돌아와서 컴퓨터 앞에 앉아 '조용한 퇴사', '퇴직금 계산'을 검색한다. 막내는 회의실 예약만 하면 자기 할 일은 끝이라고 생각하고 얼른 예약시스템에 접속하지만 이미 다른 팀에서 전부 선점해 놨다. 발 빠른 팀장들은 팀원들 소집하기 전에 이미 회의실 나오면서 전화로 회의실 예약을 지시해 놨다. 뭐 어쩌겠는가. 이번에도 지방에 있는 연구소 세미나실을 예약해야지. 금요일 오전에 회의하고 오후에 돌아오면서 바로 퇴근하면 불금을 더 길게 즐길 수 있어서 좋다. 팀원들에게 금요일 오전 연구소 세미나실로 회의실 예약완료라고 메일로 공지한다. 그리고 연구소 총무팀 직원에게 전화해서 회의실에 마이크와 빔프로젝트 세팅을 부탁하고 다과도 부탁한다. 마지막으로 올라오면서 식사할 주변 맛집을 검색한다. 이번에는 토종닭 백숙이 좋을 것 같다. 이런 걸 왜 내가 다해야 하나 싶지만 또 MZ 어쩌고 하면서 눈으로 욕하는 그런 분위기가 싫어서 '그래 해주자!'라는 심정으로 준비한다. 이 정도면 완벽한 것 같다. 이 이상의 요구는 들어줄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다. 나는 이 정도 했으니 아이템은 상사들이 알아서 준비해 오겠지라고 생각하며 식당에 예약을 한다.


 팀장은 책상의자에 기대앉아 히죽히죽 웃고 있다. 지난번에 회의실 의자 바꿀 때 총무팀장에게 잘 말해서 본인도 좋은 의자로 바꿨다. 허리를 딱 받쳐주고, 메쉬소재라 통풍이 잘된단다. 아직은 잘 모르겠는데 비싸고 좋은 거라고 하니 만족스러운 것 같다. 유튜브가 없었으면 회사생활이 정말 힘들었을 것 같다. 팀원들이 에어팟 끼고 있으면 그렇게 보기 싫었는데 이제야 에어팟이 불티나게 팔리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자기도 팀원들 안 보이게 살짝 한쪽귀에 블루투스 이어폰을 낀다. 팀원이 다가오면 얼른 통화하는 척을 한다. 그리고 이어폰을 빼며 고개를 들어 들을 준비가 됐다는 듯이 살짝 미소 짓는다. 회의실이 다 차서, 금요일 오전 연구소 세미나실 밖에 안 남았다고 한다. 새벽에 일찍 출발해야 하는 게 좀 못마땅하지만 운전이야 대리급이 할 거고 자기는 뒷자리에 앉아서 자면 되니까 알았다고 한다. 상무님이 이번에 회장님께 잘못 찍히면 불똥이 튈지 모르니까 이번 회의는 신경을 좀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팀원들에게 상무님이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중요성을 잘 설명했고 생각할 시간도 넉넉히 줬으니 금요일 회의 때 나오는 아이템 중에서 좋은 것을 고르면 될 거다. 팀원이 4명인데 40개 아이디어 중에서 좋은 거 없겠어라고 생각하며 연구소 주변 맛집을 검색한다. 대한민국 5대 짬뽕맛집이 있단다. 여기가 좋을 것 같다.


 메일을 열어봤더니 금요일 오전 연구소 세미나실로 회의가 잡혔단다. 차장은 부장이야 집 앞으로 데려다주면 그 길로 들어갈 거고 이 참에 팀원들 데리고 진정한 불금을 보내야겠다 생각한다. 요즘 MZ들은 잘못 건드리면 안 되니까 오피스 절친인 과장을 우선 꼬시기로 한다. 와이프들끼리 연락하고 지내는 사이라서 꼭 포섭해야 한다. 과장에게 '이번주 OO클럽 ㅇㅋ?'라고 카톡을 보낸다. 답이 없다. '으흠...' 헛기침으로 과장에게 대답을 재촉한다. 잠시 후, '콜! ^^'이라고 카톡이 온다. 차장은 와이프에게 금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지방에서 회의가 잡혔다고 카톡을 보낸다. 알았다는 회신을 받고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OO클럽 실장 전화번호를 찾아서 문자를 보낸다. 거짓말이 들통나면 안되니까 완전범죄를 위해 와이프에게 출장준비는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라는 카톡을 보내며 자상한 남편 코스프레를 한다.


 헛기침 소리에 과장이 뜨끔하다. 분명히 1/n 하자고 할 텐데. 요즘 대출금 갚느라 힘들어 죽겠는데 안 따라갔다가는 배신자 소리 들을 게 뻔하고... 대답을 망설이는데 헛기침 소리가 점점 노골적이다. 차장이야 집값 오르기 전에 수도권에 아파트 잘 사서 떵떵거리고 살겠지만 나는 아니다. 아이가 커 갈수록 점점 돈 들어갈 일만 남았는데 월급만 빼고 다 오르는 것 같아서 안 그래도 심란하다. 내가 차장이면 당장 집 팔아서 편하게 살겠구먼라고 생각한다. 에라 모르겠다. 가족을 위해 돈은 벌어야지라고 생각하며 차장에게 카톡을 보낸다. 책상 위 가족사진에 아이가 활짝 웃고 있다. 오늘 집에 들어가면 내 앞에서 저렇게 웃어주면 좋겠다.


 벌써부터 허리가 아픈 것 같다. 아직 삽십대인데 허리디스크가 심해졌다. 이번에 지방 회의면 또 내가 운전해야 할 텐 데라는 생각으로 대리는 머리가 아프다. 막내에게 운전을 맡기고 싶지만 부장은 허락하지 않는다. 얼마 전 다른 팀 신입사원이 회사차로 사고를 냈는데 나이가 어려서 보험금이 어마어마하게 나왔단다. 차장도 옆에서 거든다. 자기들이야 회사차 뒷좌석에 앉아서 졸면되지만, 부장 픽업, 차장 픽업하려면 도대체 몇 시에 나와야 하는 건지 계산해 보니 답이 없다. 또 그 새벽에 차 꺼내겠다고 기계식 주차장 관리인이 나와있을 리도 만무하고 차리리 집에 끌고 가는 게 낫겠다 생각한다. 자기가 부장 되면 절대 이런 건 부하직원 안 시킨다고 생각하며 막내를 불러낸다. 내일은 자기가 운전할 테니까 회사차 끌고 갔다가 내일 새벽에 회사로 나와서 같이 가자고 제안한다. 새벽에 주차장 문 닫았을 것이 뻔하고, 자기는 원룸 살아서 차 가지고 가도 주차할 곳이 없으니 그렇게 하자고 설득한다. 막내의 '이걸요? 제가요? 왜요?' 스킬 시전에 주먹을 부르르 떤다.


 금요일 오전 연구소 세미나 실에서 회의가 시작됐다. 결국 회사차는 대리가 자기 집 근처 길가에 주차했다가 불법주차 단속 딱지가 붙었다. 다음 달 월급에서 차감될 거다. 막내는 모르는 척이다. 그게 더 얄밉다. 부장은 오는 내내 단속 딱지가 부끄럽다며 휴게소에 들러서 떼고 가자고 했다. 철없는 차장과 과장은 휴게소는 역시 찐 감자라며 막내를 데리고 간식을 사러 갔다. 결국 딱지 제거는 대리 몫이 되어 시린 손을 호호 불어가며 생수병으로 물을 부어가며 겨우겨우 딱지를 긁어냈다. 도착한 세미나 실은 썰렁했다. 아마도 한동안 쓰지 않아서 온기가 없는 것 같다. 부장은 연구소장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차장과 과장은 담배를 피우고 오겠단다. 막내와 어색해져 있는데 막내가 세미나 실을 보더니 총무과 직원에게 전화해서 다과가 없다고 항의한다. 대리와 있는 게 어색해서 업무 하는 듯이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3시간째, 회사 다이어리에 낙서 중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지금 그냥 이대로 어딘가로 사라지고 싶다.


 여러분은 까마귀입니까? 백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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