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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없는박영감 Sep 01. 2023

이인증 (depersonalization)

익숙한 이의 낯선 위로

    새벽 1시 39분, P가 몸을 억지로 일으킨다. 잠 깨기 너무 싫은데 몸에서 보내는 신호를 무시할 수가 없다.

 '정말 일어나기 싫은데... 이대로 조금만 참으면 신호가 끊길 것도 같은데...'

하지만 자율신경계의 외침을 무시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어젯밤 기억을 더듬어 방바닥을 발로 쓱 쓱 쓸며 실내화를 찾는다. 집안은 캄캄하고, 눈은 뜬 것도 감은 것도 아니지만 무의식 중에 육감이 발동했는지 사방이 다 보이는 것 같다. 배를 긁으며 욕실등 스위치를 켠다. 문을 여니 환한 빛이 눈꺼풀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시각을 자극한다. P는 피하듯 얼굴을 돌리며 목을 긁는다. 잠깐의 적응 후, 변기 뚜껑을 연다. 아직도 눈은 반쯤 감긴 상태다. 입안이 건조해서 끈적한 타액이 입술 사이에서 쩝쩝 소리를 낸다.


    욕구가 해소되자 정신이 좀 든다.

 '고작 이 몇십 초 시원하자고 꿀잠을 방해하다니...'

P는 버틸 줄 모르는 나이 들어버린 몸뚱이가 원망스럽지만 누구를 탓하랴. 세면대에 물을 틀어 손을 씻고, 가글을 하고, 세수를 한다. 숨이 쉬어지는지 확인하듯이 어푸어푸 소리를 내면서 얼굴에 물을 끼얹다가 마지막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거울을 본다.


    P는 다른 사람의 몸에 뇌만 이식되기라도 한 것 같은 이질감을 느낀다. 마치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정신은 가만히 있는데, 거울 속의 P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휑한 두피를 이리저리 살피며 속상해하고, 눈가에 주름을 만지며 손으로 눈을 찢어 보기도 한다. 하지만 촉각도, 후각도 전혀 없고 자신을 녹화해 놓은 영상을 보듯 오로지 시각만 남아있는 세계를 넋 놓고 본다. 자신의 행동을 몸 밖에서 관찰하고 있는 유체이탈 상태라고 해야 할까? 아니다. 그것보다는 자신이라는 것은 인지했지만, 인정하지 않는 상태가 더 맞다. P는 자신에게 질책받고 있는 것 같았다. P는 머릿속이 하얘진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P는 질책을 받으면 머릿속이 하얘졌다. 잘못한 것이 없어도,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에 오인받아도, 원인제공자가 따로 있어도 일단 누군가로부터 질책을 받으면 위축되고, 말문이 막히고, 자기 잘못 같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그제야 뭘 잘못했는지, 왜 혼났는지 의문이 생기고, 뒤늦게 억울함이 밀려와 서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침 팀장 회의에서 P를 향한 이사의 질책이 시작됐다. P는 역시나 머리가 하얘지고 말문이 막혔다. 입이 있으면 말을 해보라는 채근에 정신만 아득했다. 30분을 넘게 깨지고 난 뒤 겨우 회의가 끝났다. P는 자리에 돌아와 정신줄을 놓지 않으려고 한참 애썼다. 정신이 돌아오고 천천히 생각해 보니,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C팀장의 업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C팀장의 얼굴이 보였다. 회의 시간 내내 바로 옆에서 입 다물고 가만히 있던 것이 괘씸하고 화도 났지만, 이사실에 찾아가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그렇게 했다가는 상사의 질책에 끈질기게 시시비비를 따지는 집요한 부하직원으로 낙인찍히기 때문이다. 설사 회의 중에 자신의 업무가 아니라고 해명했어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았다. 깨려고 작정하고 깨는 경우에는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서라도 깨고야 마는 것이 상사들의 특징이라는 것을 P는 잘 알고 있었다. P는 또다시 자신의 바보 같은 성격 탓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나중에 이사는 회식날 술 권하러 온 P에게 다 잘돼라고 한 말이었다며 기억도 못 할 말을 내뱉고 있을 것이다. P는 쓰디쓴 술을 세상에서 제일 달콤한 듯 마시며 건배를 하고 있겠지…


    P는 매 맞으며 자란 아이였다. 유순한 성격 탓에 만만했던 P는 곧잘 화풀이 대상이 되곤 했다. 자기 잘못이 아닌 일에도 자주 매를 맞았다. P의 엄마는 어린 P의 변명을 용납하지 않았다. 어린 P가 변명하기도 전에 엄마는 매를 들었고, 울고 불며 변명해도 매 맞는 시간만 길어질 뿐이었다. 매 맞는 시간이 끝나면 어린 P는 그런 엄마를 빠르게 용서했다. 그나마 비빌 언덕은 거기뿐이었으니까... 어쩌면 어린 P는 그냥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그냥 자기는 희생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고... 그냥 자기는 갈 데가 없는 아이라고... 그냥 자기는 학대받아 마땅한 아이라고... 아마도 나중에 엄마는 어린 P를 품에 안고 다 잘돼라고 한 사랑의 매였다고 기억도 못 할 말을 내뱉고 있을 것이다. 어린 P는 엄마의 품이 세상에서 가장 소름 끼치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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