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의 상자... 열다.
삶의 불가피한 시련과 불행
고통하면 아픈 것을 떠올리기 쉽지만 엄밀히 따지면 거리가 멀다. 그도 그럴 것이, 좀 이상한 방향이지만, 아픔도 자기가 좋아서라면 사디즘이나 마조히즘 같은 변태적 쾌락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통의 본질은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그래야 삶 그 자체가 고통이라는 넋두리가 어느 정도 이해 간다.
부족과 결핍이라고 이해하는 것도 고통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고대에는 재화가 부족했고, 신분제가 있었으며, 질병에 취약했다. 즉 제약이 많았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충분히 고통이라 할 수 있을 만했다. 난관이 많으니 사는 것은 당연히 고통스러웠으리라.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풍족해진 요즘도 사람들은 사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말한다. 그때는 인종이고, 지금은 인간인가? 아니면 그때는 영장류, 지금은 만물의 영장?
불행한 상태를 고통이라고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일단 행불행이 뭔지 기준이 명확하지 않고, 앞서 비유한 바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전후 세대는 고무신 하나만 있어도 행복했지만, 지금 그 나이또래의 어린 친구들에게 고무신은 박물관의 유물일 뿐이다. 만약 반대편의 꽉 막힌 도로를 보며 시원하게 달리는 고속도로 같은 것이 행복이라면, 불가피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니까 "OOO 때문에 고통받는다"라는 표현은 OOO은 갖고 싶은데 그걸 가지려면 XXX를 해야 하고, 그 XXX를 너무 하기 싫은데, OOO을 가지려면 XXX를 꼭 해야만 하니 고통스럽다. 이렇게 풀이될 수 있다. 요즘 가장 많이 들리는 이런 식의 표현이 "아파트 때문에 고통받는다"이다.
'아파트를 사려면 대출을 받아야 하지만, 대출금과 이자 갚는 건 너무 하기 싫고, 그래도 아파트를 가지려면 대출을 꼭 받아야 하니... 대출이자 급등 소식에 월급이 '텅장'을 스쳐 지나갈 것을 생각하면 힘이 빠진다. 대출금 갚느라 배곯게 생겼다. 투잡도 모자라 쓰리잡까지 뛰어야 할 지경이다. 아파트 때문에 너무 고통스럽다. 아파트 매매 계약서는 생명포기각서 같았고, 현대판 노비문서와 다를 바 없었다.'
뭐 이런 식이다.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면 좋겠는데... 아니지 벼락을 여섯 번 맞을 확률이라는 로또를 맞아도 아파트를 살 수 없다고 하니 이제는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경제력으로 분류된 보이지 않는 계층은 '자유(자발적)'라는 달콤한 이름으로 인도의 카스트 제도보다 더 강하게 우리를 옥죈다. '부익부빈익빈', '벼락거지'. 이 논리 때문에 아파트 투자 광풍이 불었다고 하는데, 다들 잘 아시다시피 실질적인 욕망은 '신분상승의 마지막 기회'라는 불안이 훨씬 크게 작용했다.
사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용이 된 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고, 주변인은 샘이야 좀 나겠지만, 콩고물이라고 떨어지길 기다려 볼 만하다. 딴 세상 이야기처럼 전혀 상관없는 사람에게도 이런 소식은 살아갈 희망을 주는... 꼭 내가 아니더라도 후대에게 기대해 볼 만해서 지금 내가 좀 고생스럽더라도 꾹 참고 견디게 하는 요소가 된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게 없다. 사회 시스템이 안정되고 안전하고 평등한 사회가 되었다지만, 이 말인즉슨 사회가 그만큼 경직되었다는 말과 진배없다. 요즘 세상을 바라보면, 꼭 추억보정필터 때문이 아니더라도 더 삭막하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느낌인 걸까?
※ 아래는 Copilot 버전입니다.
� 챕터 3: 고통 – 삶의 불가피한 시련과 불행
고통이라고 하면 흔히 ‘아픔’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그것은 통증이다. 아픔은 자발적으로 선택하면 다른 의미를 갖는다. 누군가는 그것을 쾌락으로 전환하기도 한다. 사디즘이나 마조히즘 같은 변태적 쾌락은 바로 그 예다. 따라서 고통의 본질은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해야 하는 상태에 있다. 그렇기에 “삶은 곧 고통이다”라는 오래된 잠언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고통을 단순히 부족이나 결핍으로 이해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고대에는 재화가 부족했고, 신분제가 있었으며, 질병에 취약했다. 난관이 많으니 삶은 당연히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풍족해진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삶이 고통스럽다고 말한다. 이는 고통이 단순히 물질적 결핍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불행한 상태를 곧 고통이라고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행복과 불행의 기준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전후 세대에게 고무신 하나만 있어도 행복이었지만, 오늘날의 아이들에게 고무신은 박물관의 유물일 뿐이다. 상대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고통은 단순히 아픔, 즉 통증에 가까운 개념이다.
결국 “OOO 때문에 고통받는다”라는 표현은 이렇게 풀이될 수 있다. OOO은 갖고 싶은데, 그것을 가지려면 XXX를 해야 하고, 그 XXX가 너무 하기 싫은데도 OOO을 가지려면 반드시 해야만 하니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요즘 가장 많이 들리는 예가 “아파트 때문에 고통받는다”라는 말이다.
“아파트를 사려면 대출을 받아야 하지만, 대출금과 이자를 갚는 건 너무 하기 싫다. 그래도 아파트를 가지려면 대출을 꼭 받아야 하니... 대출이자 급등 소식에 월급이 ‘텅장’을 스쳐 지나갈 것을 생각하면 힘이 빠진다. 투잡도 모자라 쓰리잡까지 뛰어야 할 지경이다. 아파트 매매 계약서는 생명포기각서 같았고, 현대판 노비문서와 다를 바 없었다.”
경제력으로 분류된 보이지 않는 계층은 ‘자유(자발적)’라는 달콤한 이름으로 우리를 옥죈다. ‘부익부빈익빈’, ‘벼락거지’라는 말은 단순한 풍자가 아니라, 현대 사회의 구조적 불안을 드러낸다. 아파트 투자 광풍의 실질적 욕망은 단순한 재산 증식이 아니라, 신분상승의 마지막 기회라는 불안이 훨씬 크게 작용한 것이다.
예전에는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있었다. 용이 된 당사자는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희망을 주는 이야기였다. 꼭 내가 아니더라도 후대에게 기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었기에, 지금의 고생을 참고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이야기가 사라졌다. 사회 시스템은 안정되고 안전하며 평등해졌지만, 그만큼 경직되었다. 그래서 오늘날의 삶은 오히려 더 삭막하고 답답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