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의 상자... 열다.
인간 존재의 필연적 한계
모두가 죽는다는 명제만큼 절대적으로 '참'인 것도 없다. 만인에게 평등한 것이 바로 죽음이 아닐까? 재벌도, 저명한 과학자도, 노벨 평화상 수상자도 죽음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다. 죽고 나면 뼈 같은 무기질과, 머리카락 같은 일부 단백질, 그리고 결국은 썩어 없어질 유기물만 남는다. 즉 시체만 남는다. 그가 살아온 행보와, 사상과, 저서는 우리의 기억 속에나 남을 뿐이다.
그런데 죽음은 왜 재앙이고, 생에 대한 미련을 못 끊고 영생을 꿈꿀까?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이유는 알 수 없다'가 정답인 것 같다(~이다.라고 마침표를 찍고 싶지만). 그저 산 사람 기준으로, 죽은 이는 더 이상 삶을 영위할 수 없으니 괴롭지 않을까라고 막연히 추론할 뿐이다. (칫 언제는 사는 게 고통이라더니...) 남은 자들의 곡소리를 들어봐도, 돌아가신 분에 대한 생각을 찾긴 쉽지 않다. 음... 명복을 빈다는 정도? 나머지는 대부분 '나만 두고 가면 어쩌냐? 앞으로 너 없이 어떻게 사냐?'같은 남은 자신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아니 표현이 그렇다. 관용적인 곡이라고 해두자. 과거에는 며느리들의 능력평가 항목 중에 상갓집에서 얼마나 곡을 잘하냐가 평가 요소이기도 했으니 훈련된 것일 수도 있다.
알고 있듯이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는 그 어떤 연구도 할 수 없다. 그냥 끝이니까 가설을 증명할 수 없다. 종교적 사후 세계, 죽었다가 되살아났다는 각 종 미스터리 사건은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 수준이 많고, 되살아났다는 미스터리 사건은 '바이탈 사인'이라고 하는 생명의 증거가 잠시 사라졌다가 돌아왔다는 건데... 사건 자체도 조작의 냄새가 많이 나고, 부활자들의 증언도 재각각이라... 마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서와 같이 뭔가 신비적인 혹은 무속적인 영향을 행사하기 위한 '가스라이팅'式 끼워 맞추기가 아닐까 의심해 본다.
망상
그래서 고전적으로 죽음이 재앙인 이유를, 진짜 망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으로, 상상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오늘날의 죽음이 거의 대부분이 자연사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 아닐까?이다. 과거에는 잦은 전쟁과 기근 같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고려장, 제물, 인신공양 같은 인위적인 '죽음'이 고통과 관련되어 있었다.
생산되는 물자는 고정적인데 아이가 많이 태어나거나 일할 수 없는 노인이 많아지면? 그런데 우리 가족이라면? 그 가족이 권력자라면? 이런 고민이 발전해서 옆 마을을 침략해서 뺏어오자면 전쟁이 나는 거고, 뺏어올 물자도 없으면 기근이 발생하는 거고, 마을 자체에서 인구수를 조절해서 버티자고 하면 고려장이 되는 거고, 거기에 종교적인 믿음까지 합세해서 성스러운 희생으로 미화시키면 제물이 되고 인신공양까지 하는 거다. ~라는 망상을 해봤다.
오늘날에는 인간다운 죽음을 논하는 수준이 됐고, 거기다 기대수명은 120, 130... 150까지 보는 사람도 많다. 옛 말에 '백 년도 못 살면서, 천 년의 근심을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제는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오래 살게 되면서 오늘날의 죽음은, 그래서 선택의 문제로 넘어가고 있다. 또 다른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는 말이다. 영생이 도리어 재앙이 되어버린 사회.
사형이라는 타인의 선택에 의한 죽음도 있고, 존엄사라는 자신의 선택에 의한 죽음도 있다. 뭐 극단적 선택이라는 가슴 아픈 사연도 많아지고 있다. 진짜 멋모를 때는 나는 그런 생각을 절대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신기하게도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런 '죽음의 선택'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못 만나봤다. 이런 생각의 가장 큰 원인은 '희망'이 아닐까? 희망의 유무가 죽음의 선택의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내일 마지막으로 '희망'이라는 고전적 재앙을 살펴보고자 한다.
※ 아래는 Copilot버전입니다.
� 챕터 4: 죽음 – 인간 존재의 필연적 한계
모두가 죽는다는 명제만큼 절대적으로 ‘True’인 것도 없다. 만인에게 평등한 것이 바로 죽음이다. 재벌도, 저명한 과학자도, 노벨 평화상 수상자도 죽음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다. 죽고 나면 뼈 같은 무기질과 머리카락 같은 일부 단백질, 결국은 썩어 없어질 유기물만 남는다. 즉 시체만 남는다. 그가 살아온 행보와 사상, 저서는 우리의 기억 속에만 남을 뿐이다.
그런데 죽음은 왜 재앙일까.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이유는 알 수 없다’가 정답일지도 모른다. 산 사람의 기준으로, 죽은 이는 더 이상 삶을 영위할 수 없으니 괴로울 것이라고 막연히 추론할 뿐이다. 남은 자들의 곡소리를 들어봐도 돌아가신 분에 대한 생각보다는 ‘나만 두고 가면 어쩌냐, 앞으로 너 없이 어떻게 사냐’ 같은 남은 자의 걱정이 앞선다. 과거에는 곡을 잘하는 것이 며느리의 능력 평가 항목이 될 정도였으니, 죽음을 둘러싼 애도조차 사회적 관습의 일부였음을 알 수 있다.
죽음은 연구할 수 없는 영역이다. 종교적 사후 세계나 되살아났다는 미스터리 사건은 믿거나 말거나 수준에 머문다. ‘바이탈 사인’이 잠시 사라졌다가 돌아온 것일 뿐인데, 조작의 냄새가 짙고 증언도 제각각이다. 마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처럼 끼워 맞추기식 해석에 불과하다.
망상
고전적으로 죽음이 재앙인 이유를 상상해 보면, 오늘날의 죽음이 대부분 자연사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운 것 아닐까. 과거에는 전쟁과 기근, 고려장, 제물, 인신공양 같은 인위적인 죽음이 고통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생산되는 물자는 고정적인데 아이가 많이 태어나거나 노인이 많아지면? 가족이 권력자라면? 이런 고민이 전쟁과 기근, 고려장과 제물로 이어졌다. 종교적 믿음이 합세하면 성스러운 희생으로 미화되며 인신공양까지 이어졌다. 죽음은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사회적·경제적·종교적 맥락 속에서 고통과 맞닿아 있었다.
오늘날에는 인간다운 죽음을 논하는 수준이 되었고, 기대수명은 120, 130, 150까지 바라보는 시대다. ‘백 년도 못 살면서 천 년의 근심을 한다’는 옛말은 이제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오래 살게 되면서 죽음은 선택의 문제로 넘어가고 있다. 또 다른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이다. 영생이 도리어 재앙이 되어버린 사회.
죽음은 타인의 선택에 의한 사형일 수도 있고, 자신의 선택에 의한 존엄사일 수도 있다. 극단적 선택이라는 가슴 아픈 사연도 많아지고 있다. 신기하게도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죽음의 선택’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사람은 만나기 어렵다. 이런 생각의 가장 큰 원인은 결국 희망이 아닐까. 희망의 유무가 죽음의 선택의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마지막으로, 내일은 ‘희망’이라는 고전적 재앙을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