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적 재앙 (4) - 희망

판도라의 상자... 열다.

by 철없는박영감

마지막에 남은 빛, 그리고 현대적 해석


희망의 패러다임


마지막은 역시 희망이다. 고대의 사람들에게 희망은 절망을 견디게 하는 힘, 고통을 버티게 하는 이유였다. '조금만 더 참으면, 끝내는 나아질 것이다'라는 믿음이 삶을 지탱했다. 현재가 아니더라도 지금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소중히 여겨 덕을 쌓으면 이승이 아니더라도 저승에서... 혹은 현생이 아니면 후생에서라도 복을 누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지면서 희망의 의미도 변했다. 내가 어릴 적 배운 희망은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였다. 목표와 꿈을 위해 불편을 감수하고 거슬림을 참고 견뎌 규격에 맞는 사회인이 되는 인내를 최고의 덕목이라고 배웠다. 그래야 성공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이름을 날리면 부모님이 좋아한다는 남을 행복하게 만들어서 인류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심겼다. (가스라이팅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래서 때마다 정신교육이라는 명목으로 바보 같은 반복 혹사 체험인 '극기훈련'이라는 것도 진행했다. 지금 그러면 가혹행위라고 학부모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지? 나는 그런 바보가 되기 싫어 유격훈련이 없는 대신 복무기간이 반년이나 더 긴 공군을 지원했다.


어쨌든... 그래서 인내와 끈기가 곧 희망의 다른 이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열에 아홉이 좋아도 한두 가지가 거슬리면 '그냥 스트레스 더 받기 전에 도망쳐라, 벗어나라, 선을 그어라, 손절해라'라는 메시지가 지배한다. 희망은 더 이상 버티는 힘이 아니라, 끊어내는 선택으로 변질된 것이다.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뭔가 좋고 나쁜지 판단할 수 없다.)


이실직고 좀 하자면, 한때 열광하며 좋아하던 아이돌에게서 탈덕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그들을 계속 파다 보면 꼴 보기 싫은 멤버가 꼭 하나씩 나타나고, 처음엔 좀 눈에 거슬리는 행동이 보기 싫다 정도였다가 나중에는 저 놈 때문에 더 못 보겠네가 되어버렸다. 멤버 구성은 변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사회적으로도 맥시멀리즘에서 미니멀리즘, 욜로에서 요노로 바뀌었다. 필요한 무언가를 구하기보다 필요 없는 뭔가를 들이지 않는 방식으로 말이다.


희망은 없다


여기서 말하는 '희망은 없다'는 단순히 희망이 사라졌다는 절망의 선언이 아니다. 애초에 판도라의 상자 속에 봉인되어 없었어야 한다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즉 희망이라는 외부적 기대에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는 역설적 표현이다. 희망은 누군가가 주는 빛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내는 불씨일 때만 의미가 있다.


오늘날의 사회는 인터넷과 SNS, 가상공간과 아바타가 판을 치는 시대다. 가짜와 가면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희망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여주고, 보여주는 대로만 본다'는 말처럼, 희망은 현실을 견디게 하는 힘이 아니라 오히려 고문이 된다. 희망을 붙잡는 순간 더 비참해지고, 최악의 경우 무력감에 빠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진다. 생각을 멈추고 AI나 로봇보다 못한 인간이 되어 폐기된다.


현실의 사건들은 이 사실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미국에서 벌어지는 ICE 단속 현장은 간접 경험만으로도 희망을 잃고 무력감에 빠지게 만든다. 실제 삶에서 그런 일이 닥친다면, 희망은 더 이상 빛이 아니라 그림자가 된다. 우리는 그럴 뻔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희망은 없다'는 선언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길을 만들어야 한다는 각성이다.



※ 아래는 Copilot 버전입니다.



� 챕터 5: 희망 – 마지막에 남은 빛, 그리고 현대적 해석


희망의 패러다임


마지막은 역시 희망이다. 고대의 사람들에게 희망은 절망을 견디게 하는 힘, 고통을 버티게 하는 이유였다. *“조금만 더 참으면, 끝내는 나아질 것이다”*라는 믿음이 삶을 지탱했다. 현재가 아니더라도 지금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덕을 쌓으면, 이승이 아니더라도 저승에서, 혹은 현생이 아니면 후생에서라도 복을 누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지면서 희망의 의미도 변했다. 내가 어릴 적 배운 희망은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였다. 목표와 꿈을 위해 불편을 감수하고 거슬림을 참고 견뎌 규격에 맞는 사회인이 되는 인내를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다. 그래야 성공한다고 믿었고, 그렇게 이름을 날리면 부모님이 기뻐한다는 소명의식까지 심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일종의 가스라이팅 같기도 하다.)


그래서 때마다 정신교육이라는 명목으로 ‘극기훈련’이라는 반복적 혹사 체험도 진행됐다. 지금 같으면 가혹행위라며 학부모들이 들고일어났을 것이다. 나는 그런 바보가 되기 싫어 유격훈련이 없는 대신 복무기간이 더 긴 공군을 지원했다.


어쨌든, 인내와 끈기가 곧 희망의 다른 이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열에 아홉이 좋아도 한두 가지가 거슬리면 *“스트레스받기 전에 도망쳐라, 벗어나라, 선을 그어라, 손절해라”*라는 메시지가 지배한다. 희망은 더 이상 버티는 힘이 아니라, 끊어내는 선택으로 변질된 것이다. (좋고 나쁨을 단정할 수는 없다.)


이실직고하자면, 한때 열광하던 아이돌에게서 탈덕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도 비슷하다. 계속 파다 보면 꼭 꼴 보기 싫은 멤버가 하나씩 나타나고, 처음엔 단순히 눈에 거슬리는 행동이었지만 나중에는 *“저 놈 때문에 더 못 보겠다”*가 되어버린다. 멤버 구성은 변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사회적으로도 맥시멀리즘에서 미니멀리즘, 욜로에서 요노로 바뀌었다. 필요한 무언가를 구하기보다 필요 없는 것을 들이지 않는 방식으로 말이다.


희망은 없다 (다듬은 버전)


여기서 말하는 *“희망은 없다”*는 단순히 희망이 사라졌다는 절망의 선언이 아니다. 오히려 애초에 판도라의 상자 속에 봉인되어 없어야 했다는 표현에 가깝다. 즉, 희망이라는 외부적 기대에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는 역설적 선언이다. 희망은 누군가가 주는 빛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내는 불씨일 때만 의미가 있다.


오늘날의 사회는 인터넷과 SNS, 가상공간과 아바타가 판을 치는 시대다. 가짜와 가면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희망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여주고, 보여주는 대로만 본다”*는 말처럼, 희망은 현실을 견디게 하는 힘이 아니라 오히려 고문이 된다. 희망을 붙잡는 순간 더 비참해지고, 최악의 경우 무력감에 빠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진다. 그렇게 생각을 멈추고 나면, 인간은 AI나 로봇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해 버린다.


현실의 사건들은 이 사실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미국에서 벌어지는 ICE 단속 현장은 간접 경험만으로도 희망을 잃게 만든다. 실제 삶에서 그런 일이 닥친다면, 희망은 더 이상 빛이 아니라 그림자가 된다. 우리는 그럴 뻔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희망은 없다”*는 선언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길을 만들어야 한다는 각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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