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만 잘 들어도 자다가 떡이 생기던데…

시켜서 별생각 없이 그냥 한 건데…

by 철없는박영감

지점장 눈빛이 이상하다. 지점실적이 전국 최하위여서 대기발령 형식으로 본사에 소환돼 일주일간 감옥 아닌 감옥살이를 하고 와서 신경이 날카로울 텐데 나를 보는 눈에서 꿀이 떨어진다.

"그래서 오늘은 어디 어디 간다고?"

"네? 아… OO ENT 원장님이랑 점심 약속 있습니..."

"그래? 그럼 오늘은 OO동 계속 있을 거야?"

"네... 아마도..."

느낌이 싸하다. 일부러 사무실에서 제일 먼 동네로 오늘 일정이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멀어 봤자 차로 10분 거리지만... 나는 여태까지 전혀 관심 없던 직원 A였는데 오늘은 갑자기 계속 말을 붙인다.

"그래? 다니면서 내가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하고. 잘 다녀와."

"네.. 잘 돌다 오겠습니..."

갑작스러운 관심에 생각이 많아져서 대충 얼버무리듯이 대답했다. 그런데 갑자기 사무실 전 직원을 상대로

"자! 여기 봐! 이제 갓 들어온 신입사원도 나가서 잘 놀다 오겠다잖아! 얘처럼 즐겁게 다니란 말이야 마음가짐이 벌써 다르잖아!"

전국 최하위인 지점 내에서도 바닥 수준의 실적이라서 항상 직원 A, 아니 직원 F 취급받아왔는데 오늘은 무언가 이상해도 단단히 이상하다. '잘 돌다...'를 '잘 놀다...'로 잘못 알아들었나 본데, 선배들 눈빛이 따갑다. 지점장 눈에 웃음꽃이 피니까 마치 아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 같다.


처음 이 회사에 합격도 그랬다. 메일에는 떨어졌다고 했는데 며칠 뒤에 추가합격됐으니 나올 수 있냐고 인사팀 담당자에게 전화가 왔다. 회사로 갔더니 나를 포함해서 5명 정도가 추가합격자로 와 있었다. 이미 신입사원 교육이 시작된 지 며칠이 지난 뒤였다. 교육장에 수십 명의 동기들 앞에 마치 전학생 B처럼 추가합격자라고 소개 됐다. 약 한 달간 영업사원 교육이 끝나고 다른 동기들은 간택되어 각 지점으로 발령이 났는데 우리 5명은 불러주는 지점이 없어서 계속 교육을 받았다. 교육은 전국의 지점을 하루씩 방문해서 선배들의 영업현장을 같이 다니는 것이었다. 대전, 부산, 광주... 처음에는 전국구로 보내더니 점점 교통비가 많아져서 그랬는지 경기, 서울권을 한 달 정도 다녔다. 이 때는 교육생 C정도 됐겠다. 그러다가 겨우 현재의 지점으로 발령이 났다. 입사 동기 형 한 명이 한 달 만에 나갔다고 했다. 추가합격은 결국 5분 대기조였다. 금방 그만두고 나갈 신입사원을 급하게 땜빵하는 역할이었다. 그래도 그때는 이런 거 저런 거 안 가리고 돈을 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전역 후 바로 복학하지 않고 공시생으로 몇 년 노량진에서 썩었더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무엇이라도 일단 시작해야 했다. 처음으로 아무 기대도 안 받는 아무개가 되었다. 항상 어디를 가도 가만히 있어도 하다못해 줄반장 일이라도 맡았다. 그런데 지금은 직원 A, 추가합격자 B, 교육생 C의 아무개이다. 발령을 받아서 가게 된 지점에서 배정받은 지역은 본사 근처의 병원들이었다. 모든 영업사원들이 꺼리는 지역이다. 그리고 모든 영업사원의 이목이 쏠리는 지역이다. 왜? 본사에서 가까우니 회사 임원들이 괜히 연말에 현장경영한다고 나오는 가까운 이 지역이고, 간혹 회사 중역들이 아파서 회사 근처 병원에 간다고 하면 지점장은 아침부터 나와서 쪼아댔다. 그래서 오래 붙어있는 직원이 없었다. 게다가 아이러니하게도 본사 근처 지역이 전국에서 실적 최하위였다. 사수는 본사 근처니 잘만하면 임원들 눈에 뜨일 수도 있고, 가까워서 다니기도 편하고... 이런저런 사탕발림을 갖다 붙였지만 결국은 본인도 지점장이 시켜서 억지로 떠안고 있던 지역이었다. 뭐 어쩌겠는가... 몇 달간을 욕 들어먹어가면서 꾸역꾸역 다녔더랬다. 회사에서 거들떠보지도 않는 지역이다시피 하다가 신입이라도 들어와서 담당자랍시고 일주일에 한 번씩 얼굴 들이대니 친한 원장님들도 하나둘씩 생겼다. 하지만 친하게 된 건 친하게 된 거고, 일은 일이라서 여전히 실적은 최하위였다. 아침 조회시간마다 깨지기 일쑤였고, 나중에는 거의 욕받이가 되어있었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진심 어린 욕을 면전에서 대놓고 먹은 적은 처음이었다. 그러다가 지점장이 실적 최하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본사로 소환됐다.


지점장 본사 소환이라는 조치가 취해지고 지점 분위기는 말이 아니었다. 대장이 없어진 패잔병 같은 지점 직원들은 나날이 의욕이 떨어지고 실적은 더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러다가 사수였던 선배가 안 되겠는지 신입들을 집합시켰다. 군대식으로 까이다가, 마지막즈음에 '저렇게 지점장님 고생하시는데 위로 문자라도 보내봤냐'라고 하면서 오늘부터 하루에 문자라도 한 번씩 보내드리라고, 그냥 본인도 지나가는 말로 혼냈다. 다른 동기들은 다 한 귀로 흘려 넘겼나 보다. 그런데 나는 예전부터 '일을 못하면 시키는 거라도 잘해야지'라는 정신이 조금 있어서 그날부터 점심시간이 지나고 졸릴 타임에 점심 맛있게 드셨냐? 뭐 드셨냐? 고생하신다? 등등 지점장에게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물론 답장은 없었다. 대기발령 중에는 문자도 금지였다. 그리고 대기발령 종료 후 아침 같은 상황이 발생한 거다. 그 뒤로 지점장은 자주 내가 다니는 지역으로 같이 점심 먹자고 찾아왔고, 온 김에 병원도 같이 다니면서 원장님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눠주었다. 코빼기도 안 비치던 회사에서 신입이 일주일에 얼굴 한 번씩 들이미는 게 다였다가 이제는 지점장이라는 사람이 와서 얘기도 해주니까 점점 회사 평판이 좋아졌다. 그리고 실적도 차츰차츰 올라가기 시작했다. 항상 목표를 못 채우던 지역이었는데 그만두기 전까지 그 어렵다는 지역에서 목표 100% 달성을 하고 인수인계를 해주고 나왔다. 이 지역에서 실적 100% 채운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대학 신입생 때도, 매일 같이 오늘은 이 선배, 내일은 저 선배를 만나며 술자리를 가졌다. 그때는 매일매일이 신선한 Freshman이었으니까. 하루는 졸업예정자로 취업에 성공하고 나머지 학점을 이수하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강의를 들으러 오는 누나와 술자리를 하게 됐다. 매주 화요일에 학교에 오는데 학생회장 형이 나에게 장난으로 화요일마다 삐삐에 음성메시지를 남겨드리라고 했다. (아... 추억의 삐삐! 나이대가 짐작이 가죠?) 또 '시키는 거라도 잘하자'정신으로 매주 화요일 음성메시지를 남겼다. 나중에 누나에게 엄청나게 이쁨 받았는데, 가정 먼저 고학번 선배들과 교수님들에게 내 칭찬을 많이 해줘서 예쁨을 받았고, 또 일 년간 매주 화요일은 맛있는 안주로 배부르게 술을 마실 수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학교 다닐 때도 뭔가 시키는 일은 하기 싫어도 다 했던 것 같다. 중학교 때 '피구왕 통키'라는 만화영화를 TV에서 방영했는데, 그... 사나이 가슴을 울리는 뭔가가 있는 만화영화였다. 그래서 진짜 좋아했는데... 마침 딱 그 시간에 EBS시청하기 방학숙제가 주어졌다. 친구들도 아무도 안 하는 숙제라서 나도 같이 안 하려고 했는데 숙제 목록을 본 엄마가 그래도 숙제는 해야지라며 엄하게 '피구왕 통키'시청을 금지시켰다. 그래서 동생은 안방에서 만화영화를 보고, 나는 거실에서 볼이 퉁퉁 부어서 EBS를 봤다. 보면서 그냥 보기 심심해서 노트에 조금씩 정리를 했다. 그리고 개학하고 학교에 제출했더니 선생님들 사이에서 여태껏 이런 애가 없었다며 난리가 났다. 선생님들도 이 숙제를 해오는 친구를 한 번도 못 봤다는 거다. 그래서 개학날 상으로 공책을 20권 넘게 받아왔다. 나는 시키는 일만 했는데... 말만 들었는데... 누군가의 기억에 아무개로 기억되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만나서 대화하다 보면 항상 뭔가를 하던 아이로 기억됐다. 나에게 무언가를 시킨 사람이 무안해할까 봐 그냥 말을 잘 들은 건데 진짜 자다가도 떡이 생겼다.


이제는 알게 되었다. 누군가가 '시킨다는 것'은 본인이 귀찮거나, 안 해봤거나, 못해봤거나, 하기 꺼려지는 일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그래서 시킨 사람도 별로 결과를 기대하지 않는데 그걸 해오면 기억에 남는 것이다. '시킨 일이라도 잘하자' 그것도 열심히 하다 보면 남들이 모르는 블루오션이 펼쳐질 수 있다. 지금은 '시킨 일'뿐만 아니라 '권유한 일', '추천한 일'까지 범위가 넓어졌다. 누군가 '해볼래? 해보는 게 어때?'라고 권유하면 범법행위나 돈 드는 일 아니면 일단 한번 해본다. 망하더라도 그냥 재미로... 난 떡 무지 좋아하니까… 회사에서 쫓아내서 마지못해 은퇴하시는 공장장님이 마지막 술자리에서 내 노래방 18번이 듣고 싶으시단다. '그 아픔까지 사랑한 거야' 그냥 그 자리에서 바로 불러드렸다. 사모님이 진짜 하냐고 화들짝 놀란다. 떡하나 주세요. 그럼 안 잡아 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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