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신과 여성(/)의 주이상스
먼저 모든 x가 Φx의 기능(역자 주 : 팔루스의 기능)인 측면, 즉 인간이 속하는 측면에서 출발합시다. 여기에 속하는 것은, 요컨대 선택에 따른 것입니다. 여성들이 그것을 기쁘게 여긴다면 자유롭게 그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누구나 팔루스적 여성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팔루스 기능이 남성들이 동성애자가 되는 것을 막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성들이 스스로를 남성으로 자리매김하고 여성을 접하는 데에도 역시 그 기능이 역할을 합니다.
남성의 경우는 간단히 넘어가겠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제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여성에 관한 것이고, 여러분이 이미 제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서 남성의 경우에 대해 머릿속에 남아있으리라 가정하기 때문입니다. 남성에게는, 즉 팔루스 기능에 ‘아니오’를 말하는 어떤 것, 즉 거세를 제외하면, 여성의 몸의 향유, 다시 말해 사랑을 나누는 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분석 경험의 결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성이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여성에 대한 욕망을 가질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는 모든 방식으로 여성을 욕망할 수 있으며, 이 조건이 성립되지 않더라도 그렇습니다. 그는 여성을 욕망할 뿐만 아니라, 사랑과 놀라울 만큼 닮은 온갖 것들을 여성에게 행합니다.
프로이트가 주장한 바와는 달리, 여성을 접하는 것은 - 여기서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채 수컷으로 존재하는 동시에 말하는 존재인 그를 의미하는데 - 남성입니다. 그는 자신이 여성을 접한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제가 지난번에 언급한 신념들, 즉 ‘함께 묶인(vincés)’ 신념들은 결코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접하는 것은 그의 욕망의 원인, 제가 ‘대상a’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행위입니다.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그 이름이 암시하듯 시(poésie)입니다. 그러나 시와 행위 사이에는 큰 간극이 존재합니다. 사랑의 행위는 수컷의 ‘다형적 도착’이며, 이는 말하는 존재의 특성입니다. 이 점은 프로이트 담화의 맥락에서 가장 확실하고, 일관되며, 엄격한 것입니다.
저에게 아직 반 시간이 남아 있으니,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여성 측면에서의 문제를 여러분에게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제가 쓴 것이 아무 의미가 없거나 - 사실 이 결론은 그 작은 책에서도 다루어지고 있으니 그 책을 참고하시길 부탁드립니다 - 혹은 제가 “¬∀xΦx”(역자 주 : 원문에는 수학기호 모든(tout, ∀) 에 금이 하나 더 그어져 있어 전부는 아니다(pas tout)를 의미하게 됩니다)라고 쓸 때, 이는 새로운 기능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부정은 수량사에 걸려 “전부는 아니다(=pas-tout)”로 읽혀야 합니다. 이것은 어떤 말하는 존재가 여성의 깃발 아래 서게 될 때, 그것이 바로 그가 팔루스 기능에 대해 ‘모두’가 아닌 상태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정의하느냐고요? 무엇일까요? 바로 여성입니다. 단, “여성(La femme)”이라는 말은 반드시 ‘La’(역자 주 : 프랑스어에서 여성형 정관사)를 지워야만 쓰일 수 있습니다. “La femme”는 없습니다. 이는 정의된 관사로 보편적 대상을 지칭하는 경우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여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미 이 용어를 꺼내들었고, 다시 한 번 사용을 주저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녀의 본질은 “전부가 아니다”에 있기 때문입니다.
제 학생들은 제 강의에 관심을 보이는 수준이, 그저 어떤 하급자가 석사 학위를 따려는 욕망에 의해 움직일 때보다도 훨씬 낮습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가 “결여의 기표”, “기표의 결여를 나타내는 기표” 또는 팔루스에 대한 여러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la’에서 기표를 지시하고 있습니다. 이 기표는 매우 흔하면서도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증거로서, 제가 이미 조금 전에 남성과 ‘여성’에 대해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 “la”는 기표입니다. 저는 이 la를 통해 반드시 그 자리를 표시해야만 하는 기표를 상징화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비워질 수 없습니다. 이 la는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유일한 기표입니다. 그리고 이 기표는 “여성”의 지위를 기반짓는 역할을 하며, 그녀는 ‘전부가 아니다’에 속해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La” femme(보편적 여성)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여성은 사물의 본성, 즉 말의 본성에 의해 배제된 존재일 뿐입니다. 현재 여성들이 그토록 불평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녀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말하는지도 모른다는 것이 저와 그녀들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사물의 본성에 의해 배제된 것은, 바로 그녀가 ‘전부가 아니다’라는 조건 때문에 팔루스 기능이 지시하는 향유와는 또 다른 추가적 향유를 갖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제가 “추가적(supplémentaire)”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만약 “보충적(complémentaire)”이라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다시 전체(=tout)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여성들은 그 향유를 ‘모두가 아니다’라는 조건에서 자신의 것으로 삼으며, 실제로 말하자면, 우리가 흔히 하는 말과는 달리 결국 여성이 남성을 지배한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대중들은 – 제가 아는 대중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모두 있지는 않지만 꽤 많이 알고 있습니다 – 여성을 “부르주아”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냐면, 남성이 여성에게 종속된다는 뜻입니다. 남성이 그녀의 발아래에 있다는 것이지요, 그녀가 아닌. 팔루스, 즉 그녀가 “그의 남자”라고 부르는 것, 라블레 이후로도 알 수 있듯이 그녀에게 이는 무관심한 대상이 아닙니다.
다만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녀는 그 팔루스를 다룰 다양한 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지키는 방법 또한 다양합니다. 그녀가 팔루스 기능에 있어 ‘전부가 아니다’라는 사실 때문에 그 기능에서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닙니다.
그녀는 거기에 완전히 속해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무엇인가 더가 있습니다. 이 ‘더 있음’에 주의하십시오. 그것을 너무 성급하게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제가 그것을 더 잘, 혹은 다르게 지칭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결단을 내려야 하고, 빠르게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향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향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상, 이것은 몸의 향유입니다. 그것은 –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 왜 책의 제목으로 삼아보지 않겠습니까? 다음 번 갈릴레 출판 시리즈에 적합할 것입니다. “팔루스를 넘어선(au-dela phallus)”이라는 제목 말입니다. 참 귀엽지 않나요? 이것은 여성 해방 운동(MLF)에 새로운 실질적 기반을 제공할 것입니다. 팔루스를 넘어선 향유…
여러분은 아마 눈치챘을지도 모릅니다 – 물론 여기서 저는 이곳저곳에 보이는 몇몇 남성들, 그 유사 남성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저는 대부분의 남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을 미리 판단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간혹 문 두 개 사이를 지나가듯 느낄 때가 있습니다. 여성들에게는 그것이 그녀들을 흔들거나 돕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요. 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블로흐와 폰 바르트부르크의 어원 사전을 보면, 그 두 단어(역자 주 : 흔들다secouer와 돕다secourir) 사이의 관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서가에는 그것이 없을 거라 확신합니다. 하지만 이 두 단어의 관계는 결코 우연히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여성에게는 그녀만의 향유가 있습니다. 그 ‘그녀’는 존재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녀만의 향유가 있습니다. 아마도 그녀 자신조차 그것에 대해 아는 것이 없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느낄 때, 그녀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그것이 일어날 때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여성에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이른바 불감증이라는 주제로까지 나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유행이라는 것을 감안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물론, 이런 모든 것이 프로이트의 담화 안에서도, 그리고 궁정식 사랑에서도 불행히도 자잘한 논의들에 의해 가려졌습니다. 이런 논의들이 큰 폐해를 불러왔습니다. 클리토리스적 향유에 대한 사소한 논의와, 우리가 할 수 있는 한으로 부르는 또 다른 향유, 바로 제가 지금 논리적 경로를 통해 여러분에게 접근시키려 하고 있는 그 향유 말입니다. 아직까지 다른 경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성이 이 향유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제 주장이 어느 정도 가능성을 가지는 이유는, 여성들에게 무릎 꿇고 간청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난번에도 언급했지만, 여성 분석가들에게 말이죠. 그들에게 이것을 우리에게 말해달라고 간청하지만, 정작 결과는 침묵! 우리는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향유를 “질적 향유”라고 부르거나, 자궁의 후방 극점과 같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런 건 그야말로 헛소리입니다. 만약 여성이 단순히 이 향유를 느끼기만 하고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것은 이른바 불감증이라는 문제에 대해 많은 의심을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또한 하나의 주제, 하나의 문학적 주제입니다. 잠시 멈추고 생각해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사실 저는 스무 살 때부터 줄곧 그것만 해왔습니다. 사랑이라는 주제에 관해 철학자들을 탐구하는 일 말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사랑의 문제에 집중한 것은 아니지만, 그 생각은 어느 순간 찾아왔습니다. 바로 제가 조금 전 언급한 루셀로 신부와 함께였지요. 그리고 그 뒤로는 신체적 사랑과 엑스타시적 사랑이라는 논쟁 전체가 등장했습니다. 그들이 말하듯이 말입니다. 질송(Gilson)이 이 대립을 썩 좋게 보지 않은 것은 이해할 만합니다. 그는 루셀로가 발견했다고 생각한 것이 실제로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미 문제의 일부였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랑이든 성 베르나르의 사랑이든, 읽을 줄만 안다면 그것은 동일하게 엑스타시적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필리아(Φιλια), 즉 우정에 관한 장들을 말이지요.
여기 있는 몇몇 사람들은 이것에 대해 그래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문학이 이것을 둘러싸고 쏟아졌는지 말입니다. 드니 드 루즈몽(Denis de Rougemont)을 보세요. 그의 《사랑과 서구L'amour et l"occident》라니, 장난이 아니죠! 그리고 또 한 사람, 그다지 바보 같지도 않은, 뉘그렌(Nygren)이라는 이름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가 쓴《에로스와 아가페》도 있습니다. 결국 기독교는 마침내 이렇게 발전하게 됩니다. 신이 향유하는 존재를 발명하게 된 것입니다!
어쨌든 어떤 진지한 저술을 읽다 보면, 그 중 몇몇 여성 저자들에게서 미묘한 연결고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제가 이 점에 대해 언급할 수 있는 부분은, 한 매우 친절한 분이 그 책을 읽고 저에게 가져다준 덕분입니다. 저는 그 책에 바로 뛰어들었습니다. 그것을 반드시 여기 적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그 책을 사지 않을 테니까요. 그것은 바로 안트베르펜의 아데비지크(Hadewijch d’Anvers), 한 베긴(Béguine)이자 사람들이 다정하게 신비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입니다.
저는 신비주의(mystique)라는 단어를 페귀(Péguy)처럼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신비주의는 정치가 아닌 모든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매우 진지한 무엇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이들은 대개 여성들이거나, 성 요한 드 라 크루스 같은 뛰어난 인물들입니다. 왜냐하면 남성이라고 해서 반드시 ∀xΦx의 측면에 서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성 또한 ‘전부가 아니다(pas-tout)’의 측면에 설 수 있습니다. 여성들만큼 훌륭한 남성들도 있습니다. 그런 일은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런 남성들은 그로 인해 또다른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들의 팔루스를 넘어, 그와 관련해 그들을 짓누르는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너머에 있는 향유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느끼고, 그것을 체험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신비주의자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이미 다른 신비주의자들에 대해서도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들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대체로 팔루스 기능의 측면에 속했습니다. 예를 들어 안젤루스 실레시우스(Angelus Silesius)가 그렇습니다. 그의 관조적 눈을 그를 바라보는 신의 눈과 혼동하는 것, 그것은 결국 향유의 도착(perverse)으로 귀결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야기하는 아데비지크에 있어서는, 성녀 테레사의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에 가서 베르니니(Bernini)의 조각상을 보십시오. 그녀가 향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무엇을 향유하고 있을까요? 신비주의자들의 본질적인 증언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체험한다고 말하지만,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신비주의적 절규(jaculations mystiques)는 잡담도 아니고, 쓸데없는 말도 아닙니다. 그것은 요컨대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최고의 것입니다. 페이지 가장 하단의 각주로 다음을 추가해야 합니다. “자크 라깡의 『에크리』(Écrits)”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같은 차원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써 여러분 모두는 자연스럽게 제가 신을 믿는다고 확신하게 되겠지요. 하지만 내가 믿는 것은, 여성의 향유가 ‘더 있음’(en plus)이라는 것입니다. 단, 그 더 있음에 대해서는 내가 잘 설명하기도 전에 여러분이 하나의 장막(écran)을 씌워야만 합니다.
지난 세기 말, 프로이트 시대에 시도되었던 것, 샤르코(Charcot)와 그 주변 인물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찾으려 했던 것은 신비주의를 그저 정액의 문제로 환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그것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향유라는 것은 체험되지만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무엇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외(外)존(ex-sistence)(역자 주 : 존재라는 뜻의 existence에서 라깡은 접두사 ex를 떼어냈다.)의 길로 안내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왜 대타자(Autre)의 한 면, 즉 신이라는 면을 여성의 향유가 지지한다고 해석하지 않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기표의 존재(l’être de la signifiance) 덕분에 일어나며, 그 존재의 유일한 자리는 내가 대문자 A로 표시하는 대타자의 장소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벌어지는 이중시각(biglerie)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그곳에 아버지의 기능이 기록되며, 그것이 거세(castration)에 관계된다는 점도 드러납니다. 따라서 이것은 두 개의 신을 만들어내지도 않지만, 동시에 단 하나의 신을 만들어내지도 않습니다.
다시 말해, 키르케고르(Kierkegaard)가 실존을 하나의 작은 유혹자의 모험 속에서 발견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는 거세하고 사랑을 포기함으로써 실존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왜 안 되겠습니까? 레기네(Régine) 또한 실존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차적 선(善)에 대한 욕망, 즉 작은 a에 의해 유발되지 않는 선(善)입니다. 어쩌면 레기네를 통해서 그는 그것의 차원을 얻었을지도 모릅니다.
1973년 2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