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대군(百萬大軍)

내 위업을 보아라, 강대한 자들아. 그리고 절망하라! - 퍼시 셀리

by 숨듣다

남자는 머릿속이 복잡해져 눈을 뜬 채로 밤을 보내고 있었다. 자기가 죽어버리면 곧장 신나 보험회사에 달려갈 여자와 아버지에 대한 존중이란 눈꼽 만큼도 찾아볼 리가 없는 자식 새끼들이 어찌나 괘씸한지, 지난주에 가족들과 대판 싸우고 나서는 분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딸이란 년들은 집에서 정치 이야기 좀 하지 말라며 왕왕 짖어댔고, 아들놈은 대학 기숙사에 들어가더니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다. 이따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TV에다 나지막히 화를 내는 남자에 여자는 혀를 찼다. 그러면 남자는 어머니가 자기를 야단 친 기억에 여자를 겹쳐두고 사소한 반응에도 불같이 화를 내기 일쑤였다.

남자는 심리적 곤궁에 처할 때면 자장가처럼 사관학교 시절부터 자신의 군생활 일대기를 눈앞에 펼쳐두곤 했다. 그가 한밤중에 하는 작업이란 그런 자위행위였다. 귓가를 때리는 북소리, 총소리, 행진대열에 환호하는 소리가 재생되며 남자는 왠지 느슨하고 여유있는, 여느 노파와 다를 바 없이 보였다.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단숨에 구름이라도 걷어차올릴 수 있을 것 같던 그 기개와 패기는 아직 마음 한편 어디에 있었다. 군복을 입고 있을 시절에 허공에, 제 부하를 향해 화풀이하듯 윽박 지르며, 가끔은 동기들과 연홍색 스탠드 아래서 성욕을 배출하며 끓어오르는 정열을 담지 않고 뱉어둘 곳이 있었지만, 빼빼 말라 배만 둥그러니 튀어나온 볼품 없는 몸매의 아저씨에게 정열권(熱情權)은 택도 없는 소리였다.

“교활한 속물 같으니라고” 남자는 조용히 속삭였다. 누구를 특정해서 지껄이지도 않았고 자신도 모르게 나지막이 뱉은 말에 오히려 남자 스스로 놀랐다. 살다 보면 불현듯 부끄러운 기억이 찾아오고 ‘악’ 소리를 내지르기도 하지만, 남자는 그 어떤 장면도 상상하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찾아오는 학교 시절의 기억. 남자는 명예와 신의를 볼모로 자신에게 수도 없이 가학적인 말들을 내뱉던 선배들을 기억해냈다. 도무지 학부생의 향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던 곳에서 국제신사를 자처했음에도 남자는 이렇다 할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한 번은 하계훈련 중에 자신의 동기가 졸다 엎어져 논두렁에 굴러떨어졌는데, 그 동기생은 훈련이 끝나고 복귀해서는 학교의 수치라며 명예위원회에 여러 번 출두한 일이 있었다. 룸메이트였던 남자도 참고인 자격으로 위원회에 출석해 동기생이 얼마나 성실하게 생도 생활에 임해왔는지 에둘러 변호하였다. 하지만 선배들은 항상 가학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귀관은 나약해빠진 정신상태의 동기생을 옹호하는 일이 응당 생도로서 할 일이라 생각하는건가? 이곳에 불려온 이유를 아직도 모르는 것 아니야!”

떽 소리 지르는 선배 앞에서 남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참을 수 없던 기억, 도대체 불합리 속의 합리를 가르친다면서 불합리에 머리 조아리지 않으면 미친 듯이 폭언을 쏟아놓는 시스템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상황을 여러 번 겪는데도 은근히 즐겼다. 자신도 모르게 말이다. 언젠가 나도 저들처럼 선배생도의 자격으로, 후배들을 일렬로 세워두고 일장 훈계를 늘어놓는 권위를 지닌다니! 물론 대놓고 이런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 일생을 지내오면서, 아마도 동기생들과 생도 시절을 안주거리로 삼았을 때, 학교에서 느꼈던 감정들을 터놓고 이야기했을 때 언젠가 술김에 내뱉었던 심경이었다. 남자가 복장 검열을 받겠다고 수 시간을 복도 중앙현관에 도열해 부동 자세로 서있었을 때도, 매 여름마다 반복되는 훈련 교관들의 가혹한 얼차려 구령에도, 그는 피학 충동을 멈출 수 없었다. 그것은 다가올 가학의 권위에 대한 소유욕이었으며, 일평생 자신의 삶을 일구도록 추동한 도착적 쾌락이었다.

남자는 스스로 변태적 쾌락의 구조를 모를 정도로 나이브하진 않았다. 오히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찾아오는 죄책감을 외면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형편없이 사판(沙版)을 만들어 보고하는 중대장이 열 올려 브리핑을 준비할 때면 표독스러운 몸짓으로 힘껏 사판을 걷어차고는 아무 말 없이 나오기를 10번도 넘게 반복하곤 했다. 몇 번인가 울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신 앞에서 계집처럼 엉엉 울 때도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다. 그것은 자신의 행실을 반성한다는 의미라든가, 안쓰러운 중대장의 면(面)을 살려준다든가, 그런 인간적인 동기가 전혀 아니었다. 남자는 대대장실로 들어가 옅은 미소를 띄우며, 지신이 이토록 대단한 성취를 이루기 위해 긴 세월의 고통을 기쁨으로 전환하는 방법을 발견했노라, 선언했다. 남자는 사무실 의자에 몸을 눕히고 지난 날에 대한 승리를 선언하면서도 자신의 남근이 꼿꼿이 서있다는 사실만큼은 애써 무시했다. 위원회에서 룸메이트의 잘못을 자신에 귀책하던 선배의 자태처럼 말이다.

“돼지 같은 년” 남자는 킥킥대며 웃다가 또 알 수 없는 말을 뱉으며 표정이 굳었다. 전번과 달리 명확히 스치는 어머니의 이미지에 꽂은 말이었다. 어머니는 유년 시절 남자의 자존심을 으스러뜨리는 데 서슴지 않았다. 어머니는 남자가 잘못했을 때 그의 성기를 걷어차며 욕지거리를 일삼았는데, 그것이 남자의 마조히즘의 뿌리일지 모른다.

‘난 마조히스트는 아닌걸’ 이번엔 남자가 의도적으로 내면의 목소리에 응답했다.

‘그런 건 결국 옛날일 뿐인걸’이라고 말해도 남자의 양면적 쾌락은 이젠 얼굴조차 볼 수 없는 그 어머니를 소환하기 위한 장치였다. 남자가 언젠가 인도 여행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맨발로 걸어다니는 전라(全裸)의 수행자들을 본 적이 있었다. 남자는 수행자를 보고 놀라지 않는 자신에 되려 놀랐던 기억을 떠올렸다. 무엇이 그토록 낯선 광경에 소스라쳐 놀라지 않게 도왔던가. 그것은 남자가 꿈꿔왔던 삶의 양태로, 자연의 몸을 입고 세속의 것을 모두 내던지는 일을 한편으로 도모해왔기 때문이리라. 또 한편으로는 그 전라의 수행자도 꼿꼿한 남근을 갖고 있단 사실에 내심 사람 이치란 당연지사 그러하지 않나, 하고 남자는 어물쩡 넘기려 했었다. 그렇게 남자는 한쪽에서는 어머니에게 걷어차이는 상상을 하며, 혹은, 근본적으로는 동일하지만, 자신과 어머니의 위치를 바꾸어 놓아 반동적(反動的)이며 도착적 쾌락을 향유하는 한편, 다른 한쪽에서는 전라의 수행자처럼, 이 쾌락의 역설이 인과적으로 끌고 갖고 온 고통의 빚들을 외면하고자 인위적인 것들을 자신과 정반대에 대응시켜 숨어들고자 했던 셈이다.

이를테면 자신이 결혼한, 이 돈밖에 모르면서도 아둔하며, 젊은 시절의 광채도 잃은 여성은 그 강박적 환상의 모순을 한 데 모아두고 화풀이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숭고한 자연의 이치를 맘 속으로 숭상하던 그에게 여자는 항상 골칫덩어리였다. 잠들고 싶어도 이부자리를 집어 던지고 제 성기를 걷어차던 어머니처럼 말이다. 그의 배우자란 ‘모든 여자란 이처럼 뻔하고 지독하게 제 파트너를 골려주는 법만 수련하는가’ 의심이 들 정도로 남자를 옥죄는데 도가 텄다. 남자는 이 우울 장치를 어떻게든 꺼버리고 싶은 심경이었지만, 한 달에 한 번 그의 인내심이 극에 달할 때면 잠자리에서 회포를 풀었다. 남자는 이상하리 만큼 젊은이들만큼 성욕이 넘쳤는데, 특히 제 배우자의 입을 틀어막고 어쩔 줄 몰라하는 눈길을 보며 남자는 극도의 흥분감을 느꼈다.

멍청한 생각의 틈바구니에 끼어 우울해하던 남자는 어느덧 그의 속옷을 찢을 듯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남근의 존재를 직감했다. 우울감으로 시작한 남자의 공상은 늘 이런 식으로 남근을 움켜잡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는 바지춤에 손을 넣고 마구잡이로 찰흙덩이를 흔들기 시작했다. 이 늙은 남자에게 성적 자극제란 참으로 볼 품 없었는데, 제 입을 틀어막고 눈앞이 희미해졌다. 남자는 눈깔을 뒤집어 반쯤 가려진 스크린 아래로 집 천장이 보였고, 그 위로는 지나온 공상의 장면들이 스쳐갔다. 선배, 어머니, 전라의 수행자, 중대장, 안락사 당할 개새끼마냥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면서도 음탕하게 하반신을 흔들어대는 더러운 암캐, 아아, 나의 사랑, 우리 와이프! 그 외에도 흐릿하게 겹쳐 밀려들어오는 추억의 장면들! 그 어떤 것도 의식적으로는 남자의 더러운 몸뚱아리를 자극할 수 없었지만, 그가 혼자 있을 때면 그 마지막 장면 전후로 이따위 불순물들이 끼어들어온다는 것 쯤은 남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고고하게 망가져 가는 자신을 즐기던 남자에게 자신의 정신 작동원리에 의문을 제기할 틈이란 없었다.

남자는 제 똥꾸멍에서 방구가 뽁뽁뽁 새어나온다는 것조차 모르고 절정에 밀려들고 있었다.

나는 수행자, 나는 수행자! 아니, 나는 도살자! 네, 좆같은, 구녕을 걷어찰, 구원자!

...

흥분에 휘감겨있던 남자의 몸뚱아리가 축 늘어졌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어대다가 남자는 문득 고개를 든다. 살가죽은 중력을 이기지 못해 축 쳐지기 시작했고, 젊은 날의 눈빛의 총기는 사라져 있었다. 나잇값도 하지 못해 한밤중에 가족들조차 안 보는 틈을 타 자지나 흔들어대는 짐승 한 마리가 거울에 비췄다.

남자는 바지를 치켜 올린다.

“진짜, 말세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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