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학에서의 정신분석의 기능에 관한 이론적 입문>
범죄를 규정하며 병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오히려 그것들의 상징적 성격이다(p.156). 아직까지도 사회적 위기가 닥칠 때마다 공리주의의 망령이 우생학(혹은 발생생물학)의 목소리를 빌어 예비범죄자를 가차 없이 색출하거나,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설정하여 예비적 제도와 기관을 항체, 범죄를 바이러스에 등치시키는 오류는 여전히 계승된다(p.159-160). 법정의 문이 심리학자들에게 먼저 열리고(p.164), 이후에는 정신의학적 분석에 인격적 부(不)동일성(p.163)에 대한 해명이 온전히 의탁되면서 이 경향성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색감을 잃지 않고 굳게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정신의학적 평가란 문제 행위가 문제라는 점을 확인시켜준다는 것(p.165) 외에 아무런 기능을 할 수 없다.
한편 실정법이 종교재판소를 대변하며 등장하는 모습이란, 프로이트가 문명이라 부른 총체와 개인의 갈등으로 드러나는 주관적 동의의 가상성이 고발되는 풍경이며, 이야말로 정신분석의 탐구 대상이 된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죄의식의 발생을 ‘발생적’ 또는 ‘객관적’ 형태들로 환원시키려는 일부 이상한 사람들의 시도(p.154)에 동조하여 그 권위가 종교의 변형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반면, 정신분석은 오히려 주체의 증언에 근거하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으로써 법과 책임의식의 근원을 설명한다.
그러나 그 현대적 근원이란 아이러니하게도, 신의 심판적 지위를 계승한 법정의 뒤편에서 남모르게 외쳐 들려오는 ‘신의 죽음 소식’과 관련된다. 왜냐하면 신이 죽어야만 개인은 비로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명령의 충실한 개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삿대질에 죄인이 죽고 사는, 그 왕좌에 유령을 앉히자 우리는 그 어떠한 명확한 형태로 금지를 정초할 수 없게 되었으며, 금지의 공백은 곧 모든 것의 금지를 의미하게 되었다. 따라서 현대인이 온갖 죄악의 제스처를 떠맡으면서도(p.155), (라깡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정초되었다고 지적한)인권에 내포된, (또 다시)신화적 개념으로서 사회적·인격적 동일성을 동시에 요구받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정신분석은 이 화해불가능한 두 진리의 교차를 위한 해결책으로서,(혹은 일방적으로 한쪽 편을 들기 위하여), 정신분석의 근원적 목적인 ‘잘 듣기 위한 실천’으로 돌아갈 것을 요청한다.
분명히 많은 도착증과 범죄 테스트를 받으러 보내지는 주체들이 다양한 도착증과 연관성을 보인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연관성은 오직 각 개인의 사례에서 나타나는 대상에의 고착, 발달의 정체, 자아의 구조가 갖는 문제들, 신경증적 억압의 기능으로서만 정신분석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p.176
범죄학이 소외시킨 인간성이란 바로 이 주체로부터 들은 증언이 풍기는 잔혹함이며, 잔인성 자체가 인간성을 함축한다. (p.173) 우리는 각 개인의 사례에서 각 증언의 비명을 귀 담아 들어야 하는데, 물리적인 것을 다루는 학문들에서의 이론이 인식의 운동 자체인 내적 일관성이라는 요구를 벗어날 수 없다면, 개별 사례의 의미 문제를 회피할 수 없거나 스스로를 진리의 위상으로 제시할 수밖에 없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p.149)
<일탈과 범죄의 경중>
강간, 폭행, 살인 등 전쟁범죄와 같이 극악무도한 만행을 자랑하는 인간들과 그 외 사람들을 구조적으로 분리할 근거란 없다. 도리어 범죄가 위협에 불과하다는 인식은 도덕적 힘들에 의해 구성되는 ‘방어벽’을 부수어버리는 ‘본능들의 본출’을 포함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p.173)
그러나 한편으로는 신경증자의 ‘가벼운 일탈’, 혹은 ‘위반’이라 불릴법한 범주의 언행이란 정교한 담론적 테크닉에 의해 자아의 방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것처럼 비추어지기도 한다. 예컨대, 지인들을 만나 토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집단적 의식을 거행한다고 가정해보자. 의식이 이루어지는 동안은 10분동안 쉬지 않고 서로의 부모를 욕보이고, 더러운 말을 하고, 인종차별과 젠더 혐오를 서슴치 않고 내뱉는다. 그러고 나서 본격적으로 ‘이성적 대화’를 진행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됐다, 우리는 충분히 더럽고 할만큼 했다. 이제 제대로 이야기해보자”
일면 도착적으로 보이는 기술이 청소년의 일탈부터 우리가 주말마다 가볍게 술을 먹고 마시는 행위까지 두루 적용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힘들다. 이 기술은 다음 두 가지 사실을 보증한다. 하나는 범죄와 위반의 심급에서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신에 제물을 바치는 행위처럼, 초자아의 억압에 속죄적 제물 의식을 거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테크닉이 없다면(혹은 그런 의식적 기술이 무력해지는 임계점을 넘어) 주체에 가해오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란 어떤 방식으로든 더 큰 장력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문명은 처벌을 다른 사람에 대한 본보기로 간주하면서도 교정의 목적으로 흡수하려는 공리주의적 경향(p.163) 때문에 문명의 차원에서 개인에 그 충격을 흡수할 기회를 제공하리란 기대는 더더욱 하기 쉽지 않다. 공격적 긴장이란 충동이 좌절될 때마다 그처럼 좌절된 충동을 흡수하며, 자아의 변증법이 중단되는 것에 의해 범죄 유발적인 것이 되는 유형의 대상을 만들어낸다.(p.167-168)
정신병적 주체가 법이 있는지도 모른 채 위반하는 반면, 신경증자나 도착증자의 위반은 명령을 의식적 차원이든, 무의식적 차원이든 인식한 채 위반한다. 6-70년대 미국의 유명 살인마 에드먼드 켐퍼는 정신병적 주체가 아니었다. 그는 살인동기에 관해 설명할 때 매혹적 이미지 속에서 자기를 잃을 때 엄청난 향유를 느낀다는 고백(p.176)을 하게 된다. 특히 그의 어머니에 관해서 말이다.
“제 어머니는 매우 화나있고, 배고프고, 슬픈 여성이었습니다. 어머니를 미워했지만, 한편으론 사랑하고 싶었어요. (...) 피해자들은 제 어머니를 재현했다기보다는 어머니가 좋아했던 것, 탐했던 것, 어머니에게 중요했던 것을 의미했고, 전 그걸 파괴했습니다.(...) 끔찍하고 격노하는 듯한 충동을 제 내면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환상적인 열정이란 저를 완전히 압도했습니다. 마치 마약, 술과 같았죠. 조금으로는 부족해요. 처음에나 만족스럽죠.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적응하면서 (술처럼) 점점 더 많이 마셔야 해요. 같은 원리죠. 그래서 감히 총을 꺼내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켐퍼는 결국 어머니를 살해하기 이른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어머니를 살해한 것은 결코 충동적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적이고 차분한 과정이었다. 그녀를 살해하리라는 사실을 일주일 전에 알았고, 어머니를 살해한 과정을 매우 이성적이고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고 묘사한다. 이성적이지 않았다면 그 고통과 계속 살아야 했기 때문이며, 한편으론 자신으로 인해 피해자가 계속 나타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에게 살해란 신경증자의 도착적 해소와 마찬가지로 자아를(한편으론 초자아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자아란 곧 초자아와 분열하여 양립하는 한편, 동면의 양면처럼 한쪽이 부재하면 둘 다 파괴되어 버리는 비극이다. 체포된 켐퍼는 2번이나 자살을 기도했고 교도관의 제지로 실패했다.
<유영철의 사례>
「살인을 멈추지 못하고 사체를 매장하고 와서야 깊은 숙면에 빠졌다. 외로움을 잊고 긴 시간을 자게 되었다. 깨어나서는 날아갈 듯이 개운했다」(2004년 11월21일字 편지 中)
유영철은 「가장 공포스러웠던 순간은 死體를 토막 내고 있다가 아들의 전화를 받을 때였다」고 고백했다. 살인마 유영철이 「나도 인간이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 것은 아들의 목소리였다. (2005년 월간조선)
한국에서 판매금지 서적으로 지목된 ‘살인중독’은 유명한 연쇄살인마 유영철과 기자가 나눈 편지를, 즉 주체의 증언을 담았다. 유영철의 편지가 거짓으로 일관된 변명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편지에는 그가 왜 20여 명을 죽이는 끔찍한 범행에 나섰는지 엿볼 수 있는 단서들이 무수히 담겨 있었다.
그가 초자아의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아들에 관한 이야기, 자신의 살해에 관한 고백은 그가 일면 보여준 (자칭)영웅적, 혹은 ‘사이코패스’적 면모와 달리, 도착적 행위 전후로 찾아오는 우울감과 불안, 공허함과 죄책감을 보여준다.
컴컴한 방에 들어가면 어둠이 싫고 혼자 불 켜는 것도 싫고 답답할 때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곤 했어요. 어떤 엄청난 일, 무시무시하도록 나를 압도시키는 일, 비가 내려도 온통 잠기도록 왔으면 바랐었고, 번개가 쳐서 전부 불 태워 버렸으면 했고, 태풍이 오면 온통 집어 삼켜 버렸으면 했어요. 그런 광기들이 있었기에 파괴의 유혹을 강렬히 느끼고 미친 듯이 사람을 害(해)하고 그로 인해 나로 모르게 도취되어 버리고. 카타르시스적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정말 내 몸 속에는 몇 방울의 광적인 피가 흐르고 있는 것 같아요.
나는 이 나이에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기쁨의 절정과 괴로움의 극치까지 모두 느껴 봤기 때문에 더 이상 바라는 게 없어요.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러한 분노의 폭발은 더 큰 공허감과 외로움을 일게 했을 뿐 정작 나의 어두운 감정을 해소시키고 정화시키진 못했어요. 나의 그릇된 사고방식이 내 정신의 건강까지 다 앗아가 버린 거죠. (2014년 10월 13일자 편지)
에드먼드 켐퍼도, 유영철도, 제프리 다머 등 여러 연쇄 살인마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에 대한 불만을 자주 내비추었다. 범죄적 자동강박에 사로잡힌 인간들은 유형화를 시도하게끔 만드는 보편적 유인들이 몇 가지 있는데, 이제는 범죄 유발요인으로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유년시절의 기억이 특히 그렇다. 그들이 ‘사회’라고 통칭한,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는 거대한 괴물이란 대체로 오이디푸스적 가족소설에서 떠도는 아버지의 유령을 가리키는 듯하다.
女子 하면 떠오르는 相(상)이 있냐구요? 저는 상당수 사람들이 선택했다는 「황진이」도 아니고 제 그림 상대 「엄지」도 아니고 소설 속의 「베아트리체」도 아니에요. 두 말할 나위 없이 「아이 엄마」라고 말하고 싶네요. (...) 남이 들으면 이해가 안 가겠지만, 그건 사체를 토막 내는 와중에 아들 녀석에게 전화가 온 순간이었어요. 전화벨 소리에 놀란 게 아니라 당황하는 내 목소리를 듣고 『감기 아직 안 나았어 아빠?』 하며 물어보는 말이 『아빠, 난 다 알고 있어. 그러지마』 하는 것 같아 등골이 오싹 했었어요. (2014년 10월 17일자 편지)
다시 말하자면 이러한 주체들의 위반이란 결코 정신병적 주체처럼 모르는 채 자행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범행이 사회 통념과 법 질서로부터 크게 벗어나있다는 사실을 유념하고 있었고, (위선적으로나마) 반성의 기미를 내비치기도 한다.
性매매 토론 글귀에 「유영철이가 사람을 더 죽이게 놔두지 왜 잡았냐」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제 사건이 미화되고 옹호되어선 안 됩니다. 정말로 세상을 바꿔 놓지 못할 바엔 저 같은 어쭙잖은 인간이 또 나와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살인이라 해도 목적 없는 살인은 없습니다.
정신분석의 실천이 늘상 그러하듯이 주체의 의식적 차원의 증언을 온전히 신뢰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분명히 주목해야할 것은, 그들의 변명 방식이 신경증자와 전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다. 여봐라는 듯이 흔들고 다니는 살찐 가슴과 엉덩이(2004년 11월 4일자 편지)에서 드러나는 ‘유혹하는 어머니’의 근친상간적 환상에 대한 의식적 거부는 물론이고, 그가 살해를 통해 ‘카타르시스적 쾌락’을 느꼈다고 고백했다가 자신은 ‘쾌락만을 좇는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며 부유층, 더 나아가 ‘사회를 살해하려 했다’며 대치되는 증언은 명백히 신경증자의 그것이다. 아마도 증언에서 드러나는 이 반복강박의 징표들을 법의학이 ‘명함’이라 부르는 것, 범죄자가 남기는 종종 명백한 ‘서명’과 동일한 위상에서 파악할 수 있을테다.
정신분석이 범죄를 단순히 두둔하기 위한 실천이 아니라고 변명을 시도한다면, 오이디푸스적 범죄유형에 적용할 수 있는 (통상적 의미의)치유적 해볍이란 아마도 도착적 기술로써만 근본적으로 자신의 횡단을 가로지를 수도 없으며, 궁극적인 쾌락에 도달할 수도 없으리라는 진리를 상기시키는 데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정신분석이 그러한 치유 과정에 동참하기 시작한다면, 범죄를 탈현실화하지만 범죄자를 비인간화하지 않는다는 정신분석적 특권은 필히 포기하게 될테다. 그 시점에서 정신분석은 근본적 대의를 상실했기에 더이상 같은 이름이 아니라 다른 이름의 실천으로 불려야 마땅할 것이다.
내 둘째형도 그랬지만 왜 죽으려고 물에 뛰어드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신발을 가지런히 놓아두는 것일까? 가는 마당에 굳이 왜 그런 행동을 보이는 것일까? 사람이 떠날 때만큼이라도 신발을 가지런하게 하고 싶은 마음은 인간의 마지막 본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2004년 11월 7일자 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인을 멈추지 못하고 사체를 매장하고 와서야 깊은 숙면에 빠질 수 있었던 것은 날 괴롭히는 악마와 귀신들과 싸워 이겼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중간 중간 내가 행한 일들이 정말 잘못되었다는 내면의 부르짖음도 분명 있었지만, 이미 내 육체는 썩어 들어가고 있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잃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2004년 11월 21일자 편지)
초자아와 대상 a
생체적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초자아는 우리를 괴롭힌다. 앞서 말했듯이 초자아와 자아는 서로를 즐기는 은밀한 밀착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곧이곧대로 명령에 따르는 척 하면서도 어느 순간 돌변해 공허한 아버지의 왕좌에 무자비하게 난도질한다. 그리하여 죽은 아버지를 소환하며, 소외의 실현에 의해 생산되는 불일치(p.167)를 표상한다. 범죄와 일탈의 층위에서는 ‘죽음충동’이라는 용어를 ‘자아 충동’으로 인식하여 척도를 부여하는 작업(p.167)은 실로 타당하다. 의식적 고통과 무의식적 향유는 동시에 찾아오며, 고통을 끝내기 위해 자아의 자살을 기도하면 무의식도 함께 죽음을 향해 내달린다.
"그는 멋대로 하라고 말했고
나는 법대로 하라고 들었다.
모든 건 그 오인에서 시작된 것이다.
나는 법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니가 알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도대체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멋대로 해도 된다고 말했다.
그가 다른 곳을 바라볼 때 나는 그가 바라보는 것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가 보는 그것을 파괴하고 싶어졌다.
나는 그가 바라는 것을 없애고 그에게 처벌 받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의 법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의 욕망이 알고 싶었다.
나는 법을 파괴하고 싶어졌다. 그가 다시 법을 말해주길 원했다.
그는 다시 말했다. 멋대로 하라!
나는 다시 법대로 하라! 고 들었다.
도대체 그 법이 무엇입니까?
뭘 원합니까?
그는 침묵했다. 나는 그의 침묵 속에서 하나의 환청을 들었다.
그가 이렇게 말했다고 믿고 나는 듣게 되었다.
너는 사랑 말라.
이것은 나의 법이 되었다.
(‘25.1.10. 발제문 발췌)"
초자아란 이토록 잔혹하게 주체의 운동을 추동하며 죽음을 향한 레이스에 불을 붙인다. 자끄 알랭 밀레가 초자아를 대상a에 위치시키려 했던 노력이란, 우리가 상징적 차원에서 범죄행위라 부르는 범주에서 명백해진다. 침묵하는 아버지, 죽은 아버지, 유령처럼 떠도는 아버지는 그저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킬 뿐이지만, 오인과 오해의 방식으로 방어를 둘러대는 자아와의 변증법 속에서 주체의 자동 반복강박이 발생한다.
<참고자료>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504100079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5041000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