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붉은색 얼룩무늬 군복을 입고 민가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언제 발각될지 모를 위기에 풀숲에 바짝 엎드려 주변 동태를 살핀다. 날은 어둑어둑 저물어왔고 몇 시간이 지나도록 주변 인기척이 사라지자 나는 7부 등선으로 기어올라가기보다 이곳에서 비트를 파고 기다려보기로 결심했다.
주석궁을 폭파하고 김정은 모가지를 따기 위해 이곳 평양에 도착한지 벌써 며칠이 지나있었다. 나와 나의 팀은 모진 훈련을 견디고, 이곳에서 죽음과 함께 조국이 부여한 사명을 완수하고자 패러글라이더를 타고 3일치 양식과 무장만 챙긴 채 평양으로 침투하던 중이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팀원들은 사망하였다. 결국 팀원이 내게 건넨 TNT폭약과 독약앰플, 그리고 내 개인무장을 제외하고는 어떤것도 남지 않은 채 지금 평양 인근 산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던 찰나였다.
어쩌다 이곳까지 온 것일까. 분명 당장 소총을 든 무리가 내 주위를 둘러싸도 이상하지 않건만, 마음은 평온하기만 하다.
회한 섞인 여러 기억의 파편들이 나의 얼룩진 철모 위로 덮여왔다.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을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종잡지 못하던 그때,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매맞는 일을 하루도 거르지 못했다. 거르지 못했다 함은 말 그대로 1년 365일, 내가 기억이 있던 최초의 순간부터 고등학교 진학할 무렵이었던가, 그때까지 쉬지 않고 맞았다는 말이다. 단순히 훈계 수준의 체벌로 끝날 때도 있었지만, 보통은 감정 섞인 히스테리적 발작에 가까웠다. 당최 예상할 수 없는 핑계와 체벌의 수준으로 나와 여동생은 늘 집구석에 틀어박힌 채 모진 학대를 견뎌야만 했다. 그저 말없이 맞기만 했으면 좋으련만 어머니는 항상 날 선 말들을 함께 쏟아내셨다. 주로 의미 없는 욕설이었지만 유독 반복되는 문구가 있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어머니 자신을 향한 자조이자 우리를 통해 비춘 운명, 피할 수 없이 다가온 한국사회의 따가운 시선에 무책임한 아버지와 함께 떠밀려온 자식에 대한 부담감, 그리고 자신과 같은 인생이 결코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대의명분으로써 정당화되어 우리에게까지 전달되기 이른 것이다. 어머니는 자주 이렇게 윽박 지르곤 했다.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새끼가!’
정말 별것 아닌 말도 매일같이 듣다 보면 말 그대로 브레인-워시(brain wash)되어 버린다. 그리하여 나와 내 여동생의 유년 시절 이름은 똑같았다.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새끼.’ 생각해보면 실로 그랬다. 일단 10대 청소년은 (적어도 대한민국 사회 내에서는) 아무런 정치적 권리도 인정받을 수 없으면서도, 부모의 욕망에 따라 형성되는 게 당연시되었다. 도리어 그들의 올바른 욕망의 노선에서 벗어난 인간들은 당시에 ‘비행청소년’이라 불렀다. 순진하기에 짝이 없지만, 난 한자와는 담을 쌓고 살았기에 그 비행(卑行)이 정말 그 비행(飛行)인 줄 알았다. 학교 담장을 넘어, 우리 어른들이 요구한 기준을 넘어 훨훨 날아가는 철새와 같은 인간들 말이다.
초등학생 때는 서울 치고는 네 개의 반밖에 없는 촌농네스러운 학교에서 자랐기에 그런 무리를 볼 일이 없었건만, 중학교에 가서 비행청소년 무리를 처음 마주치게 되었다. 그들을 보고 들었던 양가적 욕망이란, 한편으로는 저들과 같이 부모의 요구 따위는 아는 척 시늉도 안 하며 살고 싶다는 부러움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분명 뭔가 ‘할 줄도 아는 것 없는 새끼’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주먹으로 상대방을 설득하는 능력이 탁월하든가, 축구, 농구와 같은 스포츠 한 종목에 능하든지, 하다못해 허세로 상대방의 기를 꺾어버리는 처세술을 일찍이 터득한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결심했다.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새끼’로서 내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란 부모의 욕망에 재촉되어 들어가는 것 뿐이었다. 그러면 적어도 부모가 시키는 것만큼은 할 줄 아는 새끼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조금 들자 눈치를 보고 남의 표정을 읽는 연습도 어머니를 통해 단련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나와 여동생의 유치원 개구리 시절이나 초등학생 때는 (예외없이 볼따귀나 발차기 같은 체벌이 날라들긴 했지만) 어느 정도 유치한 요구가 허용되었던 시기로 여기셨던 것 같다. 그러나 중학교에 입학하자 신체적으로 성숙하기 시작했던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어머니의 폭언과 물리적 충돌은 더욱 잦아졌다. 따라서 나는 갈등 비용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그리고 ‘부모가 시키는 것이라도 할 줄 아는 새끼’가 되기 위해 그녀의 잠정적 요구 리스트를 하나씩 정리해둘 필요성을 느꼈다. 내 보통 또래들과는 다르게 사회에서 ‘이 새끼,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따위 면박을 주는 인간들에게조차 불만감에 들이받기보다 빠르게 수긍하고 들어가는 모습도 아마 이때 체득했을 테다.
나는 정말이지 어머니의 충실한 개였다. 어머니는 앞서 언급한 대의명분, 즉, 자신 혹은 내 아버지(후자에 더 많은 무게가 실렸다)와 같은 인생을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당시 내 많은 또래 아이들이 그랬듯이 학구열에 미쳐있었다. 난 아직도 어머니의 손을 잡고 구의역에서 시청역 인근 영국문화원까지 왔다갔다했던 그 순간들이 기억난다. 대체로 오만하고 권위의식에 불친절하기 그지 없었던 영국 선생들과 한바탕 씨름을 벌이고 나면, 어머니는 우리의 노고를 치하하기라도 하시는 듯 아무런 폭력 행사도 없이 우리 손을 꼭 잡고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보다 더 먼저 기억에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어떻게 엮인 인연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어머니는 동네 동년배 아줌마들과 친해져 자식들을 위한 학습지 교사를 한 명 고용하기로 정했다. 나는 당시 공부따위에는 흥미가 없었고 ‘어떻게 구름다리를 더 빠르게 극복할 것인가’를 연구하던 시기였다. 당연히 성적은 그중에서 꼴지였고, 나는 학습지 시간이 끝날 때마다 회초리를, 때로는 주먹과 함께 가격해오는 어머니의 원망 섞인 말에 꼼짝없이 당해야만 했다.
따라서 나에게 더 좋은 성적을 위한 여정은 상당히 어린 시절부터 요구되어 왔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리고 나는 그 압박에 견디다 못해 초등학교 5학년 시절, 막연하게 꿈꾸던 태권도 사범의 꿈을 접고 어머니께 학원을 다니겠다고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평소 내 태도를 알고 계셨는지, 내심 기뻐하시는 게 보이면서도 몇 번이고 확실하냐고 물어봤다. 그리고 한 번 공부하기로 결심했으면 더 이상 돌아갈 길은 없을 것이라고 신신당부했다. 지금에야 그 말이 조금은 와닿지만, 아마 어머니가 전하고자 했던 뜻으로서는 아닌 거 같다.
그렇게 나는 수학 학원을 다니기 시작혀먼서 수학이라도 잘하는 새끼로 진화했다. 학원 선생들도 나를 두고 빈말로 칭찬하는 것 같진 않았다. 실제로 학원을 다니기 시작한지 얼마 안 돼서 특목고반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실망했다. 내가 기억하기론 그때 내게 주어진 최고의 옵션은 당연 민족사관고등학교나 과학고였지만, 과학 성적은 그닥 높지 않아 학원 강사들이 특목고를 권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운 좋게 외국어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욕망을 충실히 이행했지만, 한편으론 그때부턴 어머니를 추상화하는 작업이 한창 진행중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현실적인 어머니와 나의 관계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지만, 어머니의 명령은 그 이후로도 지금까지 나를 충실히 지배해왔다. 나는 사춘기가 찾아오면서 어머니에 의도적으로 반항하기 시작했다. 내 언성이 높아지자 어머니는 지지 않겠다는 듯이 더 윽박질러대며 나를 다그쳤다. 하루는 참다 못한 내가 욕설과 함께 고성을 내질렀다.
“에라이 씨발 진짜, 언제까지 네 맘대로 해야 속이 시원한데? 내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네 뜻대로 살아줘야 속이 시원하겠어? 대체 원하는 게 뭔데! 씨발, 씨발, 씨발, 개씨발 진짜! 이렇게 사느니 걍 쳐뒈져버리는게 나아!”
몇 년을 참아온 울분이 한꺼번에 터져나오면서, 그리고 욕을 뱉는 순간에도 나는 일이 잘못 되어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참지 못하고 내질렀지만 내심 어머니가 충격 받고 회심의 순간이 찾아오길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눈을 뻘겋게 충혈되면서 한밤중 소복 입고 찾아온 귀신마냥 실핏줄이 터진 듯 나를 노려보며 씨익씨익 대기 시작했다. 거칠어지는 숨소리와 함께 어머니도 이성의 끈을 놓고 주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식칼을 꺼내들었고, 나는 그 순간 재빨리 내 방으로 피신해 방문을 걸어 잠갔다.
저 밀려드는 광기를 막을 수 있는 수단이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방문을 부수고 들어오지 않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에 문을 난도질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체중을 싣어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 방문 문고리는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버튼식 잠금이 있었는데, 엿가락 같은 구멍 사이로 젓가락을 쑤셔 넣으면 열린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어머니의 한쪽 손에는 젓가락이, 한쪽 손에는 식칼이 들려 있었다.
공포에 목이 잠겨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여자는 나를 한동안 노려보다가 성큼성큼 다가와 멱살을 잡고 대동맥에 식칼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나지막히 속삭였다.
“쥐방울만한 새끼야, 한 번만 더 대들어봐. 너 뒈지고 나도 같이 뒈지는거야. 알았어?”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나는 고개만 끄덕거렸다. 방문을 쾅 닫고 나간 어머니 뒤로 풀썩 주저앉았고, 나는 또 하나 건진 타이틀에 속이 썩어 들어가다 흘린 눈방울 위에 쓰러져 그대로 잠들었다.
나는 그 뒤로 부모라는 작자들과 내면의 결별을 선언했다. 사춘기의 반항이 한창이었지만, 이를 악 물고 의외로 공부에 다시 뛰어들게 된 것도 이 사건이 결정적이었는데, 기숙사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것만이 이 집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여러 비극과 희극이 겹쳐 빚어낸 작은 성공 덕에 그처럼 남들이 우러러 볼만한 무엇을 획득했던 최초의 순간을 겪어낼 수 있었다.
물론 내가 특목고, 그중에서도 외국어고등학교에 진학한 것은 탈출이라는 이미지에 환상을 덧입혀준 여러 경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는 한국사회의 잔혹한 굴레를 체감한 것은 물론이요, 당시 영어학원에서 뚱한 표정의 서양인들을 접했기 때문이다.
이 인간들은 당최 한국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지금도 불분명한데, 왜냐면 선진 문물을 전하러 온 선지자 노릇을 하지도 않았고, 어떤 경제적 압박에 쫓기듯이 한국으로 피신온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올 수 있었기 때문에, 해볼 수 있기 때문에 우연히 대한민국 학원 영어 강사라는 직종을 택했고, 모종의 자유란 그렇게 무심한 성격을 지니고 있을지 모른다는 단서를 남겨주었다.
그 신비감은 영어실력이 늘어가며 그들과 대화를 나눌수록 더 짙어졌다. 마땅한 성교육이라곤 받아본 적도 없는 우리에게 섹스라든지, 여자를 헌팅한다든지, 온갖 비속어를 섞어가며 제 무용담을 풀어놓는 것이 꼭 수업시간의 한 켠을 차지했다. 물론 모든 외국인 선생이 그랬던 것은 아니고 대부분은 성실한 노동자를 자처하려는 듯 보였지만, 고국과 이토록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오만한 제스쳐를 취하며 사장과 맞먹으려는 듯한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반권위열사로서 서양 백인! 지나치게 순진했던 나에게 그들은 예수의 화신과도 같았다. 그러나 ‘권위의 철폐’라는 슬로건에 꽂힌 열망 뒤편으로는 분명 어머니가 자리 잡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순간까지도, 그리고 후에 대학에 진학하는 순간조차도, 한순간도 어머니의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다는 걸 잊은 적이 없다. 분명 나는 의식적으로 어머니의 침울한 자기파괴본능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런 구원자들을 여럿 찾아 헤매었으나, 이곳, 남한사람들이 들락거릴 일 없는 오지의 한복판에서 죽을 위기에 처하기 전까지는 분명 어머니가 예비한 진로를 따라 충실히 그녀를 만족시켜주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