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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깡 세미나 23 : 증환 (1)

Leçon 1 : 1975년 11월 18일 (1)

by 숨듣다

저는 세미나 포스터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증환(le sinthome). 이는 이후에 증상(symptôme) 이라고 쓰이게 된 것을 옛 방식으로 표기한 것입니다.

제가 감히 이러한 철자 수정을 허용한 것은, 그것이 분명 하나의 시점을 표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시점이 바로 프랑스어 안으로의… 제가 라랑그(lalangue), 즉 저만의 라랑그라고 부르는 것의 주입이며, 그리스어의 주입이기도 합니다.


이 언어에 대해서 조이스(JOYCE)가 <젊은 예술가의 초상(Portrait de l’Artiste)>에서 완전히… 아니, 사실 그것은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 아니라 <율리시스(Ulysses)>의 첫 번째 장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화(hellenise) 하는 것입니다. 즉, 동일하게 헬라어를 주입하는 것인데, 무엇에 도입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게일어(gaélique)에 대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것이 아일랜드와 관련되어 있긴 하지만, 조이스는 영어로 글을 써야만 했습니다. 그는 영어로 글을 썼지만, 그 방식이… 제가 이 자리에도 참석해 있기를 바라는 필립 솔레르스(Philippe SOLLERS)가 텔 켈(Tel Quel) 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영어를 이렇게 썼습니다. 즉, 영어의 라렁그 자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방식으로 말입니다.


사실, 저는 영어가 원래부터 그리 단단한 실체를 갖고 있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어로 글을 쓰는 것이 쉽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조이스는 그가 영어로 집필한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한 저자가 이렇게 말하게 만든 요소를 덧붙였습니다. 즉, "엘랑그(élangue)", 즉 élangues라고 써야 한다는 것이죠. 엘랑그(élangues)란, 제가 추측하기에 고양감(élation)을 지칭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양감이야말로, 우리가 정신의학에서 조증(manie)이라고 부르는 어떤 증환(sinthome)의 원리에 해당한다고 말해집니다.


실제로 그의 마지막 작품인 <피네건의 경야(Finnegans Wake)>는 그런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오랜 시간 동안 대중의 관심을 끌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한때, 자크 오베르(Jacques AUBERT)의 끈질긴 요청—정말이지 끈질긴 요청이었습니다—에 이끌려 조이스 심포지엄을 개회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저는 본래 올해 진행하려던 계획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작년에 저는 여러분께 이 세미나의 제목을 <넷, 다섯, 여섯 (quatre, cinq et six)>으로 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결국 "넷(4)"만을 선택했고, 이에 만족합니다. 왜냐하면 "넷, 다섯, 여섯(4, 5, 6)"으로 했다면 저는 분명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선택한 "넷(4)"이 덜 무겁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는 본의 아니게 프로이트(Freud)의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제가 과거에 발표했던 바에 따르면, 프로이트가 "그의 무리"라고 부른 이들의 횡설수설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것을 저는 설명한 바 있습니다. 굳이 그들을 이름으로 부를 필요는 없겠지요. 그들은 빈(Wien)에서 열리던 모임을 따라다녔던 사람들로, 저는 "올바른 논리(la bonne logique)"라고 부르는 길을 걷지는 않았습니다.


자연이란, 단적으로 말해 "하나가 아닌 것 (pas-une)"이라는 점에서 그 특성을 갖습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접근하려면 이런 방식을 취해야 합니다. 즉, 여러분이 무언가에 관심을 가지면서 제외(exclure)한 것을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이름 붙여진(nommé) 것이라는 점에서 구별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보았을 때, 자연이라는 것은 자연 밖의 것(hors-nature)의 잡동사니(pot-pourri)로서 자신을 확언하는 것 이외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명제의 장점은, 여러분이 "이름 붙이기(nommer)"가 자연의 법칙으로 보이는 것과 대립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즉 인간에게 있어서 자연적으로—물론, 여기서 자연적(naturellement)이라는 말은 전적으로 보류해야 합니다—성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논리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론이란, 이것이 인간만의 특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성(sexe)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보다는 각각의 경우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도록 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박테리아에서 새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저는 이미 박테리아와 새를 언급한 바 있습니다.

박테리아에서 새까지, 이들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적인 창조(la création divine)라고 불리는 것 속에서— 물론 이것이 신적(divine)이라는 것은, 그것이 명명(nomination)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박테리아는 이름 붙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조롱하던 신이, 즉 원초적인 인간이라고 가정된 존재에게 각각의 생물을 처음으로 이름 붙이라고 제안했을 때조차, 박테리아는 이름 붙여지지 않았습니다. 이 최초의—솔직히 말해—망령됨(déconnage)에 대해서 우리가 남긴 흔적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한 가지 결론뿐입니다. 즉, 아담(Adam)—그의 이름이 이미 그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퍼스(Peirce)의 지시(index)의 기능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조이스가 농담으로 말한 바에 따르면, 아담은 본래 마담(Madame)이었고, 그가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인 것은, 당연히 그녀의 언어로였을 것입니다. 그녀라는 존재를 저는 에비에(ÈVIE, e.v.i.e)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저에게는 그렇게 부를 권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히브리어에서 의미하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히브리어가 정말로 하나의 언어인지에 대해서는 별개의 문제지만요.) 즉, "생명들의 어머니(la mère des vivants)"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에비에(ÈVIE)는 분명, 곧바로 그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이름 붙이기(nommer)"를 했다고 가정된 후, 이를 실제로 처음 사용한 것은 바로 그녀, 즉 뱀과 이야기하기 위해서였으니까요.


이른바 신적인 창조는 따라서 말장난(parlote), 그리고 제가 말한 바 있는 말하는 존재(parlêtre)로 중첩됩니다. 이를 통해 에비에(ÈVIE)는 뱀을, 여러분께서 허락하신다면 "세르-페스(serre-fesses)"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로 만듭니다. 이는 이후에 균열 혹은 더 적절하게는 남근(phallus)으로 지칭되는데, 왜냐하면 "하지 말아야 할 것(faut-pas)", 즉 잘못(faute)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것이 하나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 제 증환(sinthome)의 강점입니다. 영어에서 sin은 바로 그것, 즉 죄(péché), 최초의 잘못(première faute)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여러분이 이렇게 많은 수로 참석하신 것을 보니, 아마 제 이야기(bateaux)를 이미 들어보신 분들이 몇 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멈추지 않는 균열, 즉 계속해서 커지는 균열이며, 이는 단지 거세(castration)의 멈춤을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지속됩니다.


이 가능한 것이란, 제가 언젠가 말했던 것인데… 여러분이 주목하지 않으셨겠지만, 저 자신도 쉼표를 넣지 않은 채 이를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이 가능한 것에 대해, 저는 예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멈추는 것이다, 쓰기(s’écrire)를 멈추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쉼표를 넣어야 합니다. 즉, "멈추는 것, 쉼표, 쓰는 것을."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만일 제가 언급했던 그 담화가 마침내 등장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더 이상 가상(허상)이 아닐 담화라면, 그렇다면 쓰여지는 길을 걷는 것이 멈추게 될 것입니다. 진실이 노련함(savoir-faire)의 산물이 되는 것이 불가능할까요? 아닙니다! 그러나 진실은 그 경우에도 반쯤 말해진 것(mi-dite)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S1이라는 기표(signifiant)로 구현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표에는 최소한 두 개가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오직 단 하나의 여성만이 —신화가 그녀를 유일한 존재(singulière)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신화적인— 즉, 제가 조금 전에 언급했던 이브(ÈVE)입니다. 그녀는 금지된 나무의 열매, 즉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맛보았기에, 의심할 여지 없이 소유되었던 유일한 여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에비에는 소크라테스보다 더 필멸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그 여성은 신의 또 다른 이름이며, 그렇기 때문에, 제가 여러 번 말했듯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리한 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단수가 그의 논리 속에서 작용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논리에서 인정되는 것과는 달리,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인간이 아니라고 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도시가 살아남기 위해 죽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게다가, 중요한 점은, 그 순간, 그는 자신의 아내가 말하는 것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여러분을 위해 이 공식을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제가 오르가논(Organon)에서 발견했던 μεπαντες(me pantes)라는 표현을 이용하여 말입니다.


사실, 저는 오르가논에서 다시 그 표현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분명 그것을 읽었으며, 제 딸이 여기 와 있는데, 그녀가 직접 그것을 짚어 주었고, 그녀는 그것이 어디에 나오는지 찾아주겠다고 저에게 맹세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표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배제했던 보편적 개념 παν(pan)과 대립하는 것으로, 여성을 단 하나로 규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여성은 "모두가 아니다(n’est toute)"라는 형식 속에서만 존재하며, 우리의 라랑그(lalangue)에서 비롯된 모호함(equivocation)이 이를 더욱 날카롭게 만듭니다. 즉, "하지만 그건 아니야(mais pas ça)"라는 형식 속에서 말입니다.


마치 우리가 "모두 가능하지만, 그건 아니야!"라고 말하듯이. 이것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하지만 그건 아니야(mais pas ça)"야말로, 제가 올해의 세미나 제목으로 '증환'을 제시한 이유입니다. 현재로서는, 즉, 지금 이 순간, 문자의 장(instance de la lettre)이 형성된 바에 따르면… 그리고 제가 이미 말씀드렸듯이, 앞으로 더 효과적인 것이 나온다 하더라도,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은 증환을 이동시키거나, 심지어 증환을 증식시키는 것뿐일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마다캉 증환(sinthome madaquin)"이 있습니다.


cf. 역자주 : madaquin은 영어의 mad(미친)과 maroquin(모로코산 가죽)의 합성어로 보입니다. 즉, "광기(folie)" 혹은 증환(sinthome)과의 관계를 암시하는 말장난(Witz)일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여러분이 원하는 방식으로 쓸 수 있습니다. 즉, m.a.d.a.q.u.i.n을 증환 뒤에 덧붙여 쓸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조이스는 이 증환 때문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철학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우리가 지금까지 이보다 더 나은 것을 만들어낸 적은 없습니다. 이것이 유일한 진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조이스가 그것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자크 오베르의 저서를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조이스는 어떤 것, 즉 그가 "아름다움"이라고 부르는 것을 대단히 중시했습니다. 그리고 이 '마다캉 증환' 속에는 그가 claritas라고 부르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조이스는 그것을 존재의 광휘(La splendeur de l’Être)로 대체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약점입니다. 그것이 단순히 개인적인 약점일까요? 저는 존재의 광휘라는 개념이 별로 와닿지 않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조이스는 증환을 마다캉주의(madaquinisme)에서 떨어뜨렸습니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 그가 정치에서 분리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그 반대입니다. 그가 만들어낸 것은, 바로 "상톰 룰(sinthome Rule)"입니다. 이는 "홈 룰(Home Rule)", 즉 프리먼스 저널(Freeman’s Journal)이 아일랜드 은행(Banque d’Irlande) 뒤에서 지지했던 정치적 운동과 연결됩니다. 그리고 이는 우연처럼, 북서쪽(Nord-Ouest)에서 등장합니다. — 이는 일반적으로 해돋이가 일어나는 방향이 아닙니다.


하지만, 비록 조이스의 저작에서 우리는 이에 대한 갈등을 볼 수 있을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증환이 굴러간다(역자주: 내지는 작동한다)(sinthome-roule)", 즉 조이스가 결합시킨 바퀴 달린 증환(sinthome à roulettes)입니다. 이 두 용어는 분명 다른 방식으로도 명명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조이스의 예술이 보여준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하여 이렇게 명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올해 우리가 그를 다룰 이유는, 조금 전에 제가 말씀드렸듯이, 제가 그를 소개했고, 그를 "증환"이라 부르는 것 이상의 더 나은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으며, 제가 앞서 말했듯이, 철자를 변형하여 그에게 적절한 이름을 부여한 것입니다.


두 개의 철자 표기 모두 그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그가 하나를 선택했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서 그는 저와 마찬가지로 이단자(hérétique)입니다. 왜냐하면 haeresis(이단)이라는 것은 본래 선택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번 선택했다고 해서, 그것이 이후 확인(confirmation)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이단이란, 증환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한 뒤, 이를 논리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증환의 실재(Réel)에 다다를 때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며, 그 지점에 이르면 더 이상 목마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요… 분명한 것은, 조이스가 이를 본능적으로 행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보다 더 불리한 조건에서 시작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더블린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였으며, 더구나 페니안(Fénian), 즉 극단주의자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이스는 두 개의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두 가문에서 태어난 존재입니다. 단지, 작은 꼬리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자신을 남성이라 믿게 될 뿐입니다.


그렇지만 "자연적으로(naturellement)" — 이 표현을 써서 죄송합니다 —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이스는, 만약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꽤 느슨한 꼬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예술이 그의 남근적 태도를 보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언제나 그러합니다. 남근이란, 제가 기생충이라고 부른 그것, 즉 문제의 작은 꼬리와 말(parole)의 기능이 결합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조이스의 예술은 그의 남근에 대한 진정한 응답자입니다. 그 외에, 그는 한낱 불쌍한 인간(hère)이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비쩍 마른 이단자(hère étique)였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조이스의 이단에서 진정한 즐거움을 찾는 조이스주의자들은 대학에만 존재합니다. 그러나 조이스 자신이 원했던 것은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그를 연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점은, 그가 이를 완벽하게 해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도 어떤 한계를 초월할 정도로 말입니다. 이 관심은 지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될 것입니다. 그는 정확히 300년 동안 대학에서 연구되기를 원했습니다. 그가 직접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대학 학자들이 나를 300년 동안 연구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얻을 것입니다. 신이 우리를 핵폭탄으로 날려버리지 않는 한 말입니다.


이 불쌍한 인간(hère)… 사실 "이(hère)" 앞에는 cet을 붙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aspiration(음절 강세)’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쌍한 인간(le pauvre hère)"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조이스는 자신을 영웅(héros)으로 인식했습니다. 스티븐 히어로(Stephen Hero), 그가 <젊은 예술가의 초상(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을 준비하면서 사용했던 제목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 제가 여러분께 보여드릴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걸 가져오지 않다니, 참 어리석군요. 여러분께서 직접 찾아볼 수 있도록, 적어도 한 번은 보여드릴 수 있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니콜 셀스(Nicole SELS)가 여기 계신데, 그분이 제게 짧은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흔히 "편지(lettre)"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그 내용은 대단히 구체적이었습니다. 그녀는 두 페이지에 걸쳐 이 책을 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현재 이 텍스트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제가 말한 비평주의란, 즉, 특정 집단의 사람들이 연구하는 내용— 모두가 대학 출신입니다.


사실, 대학에 입성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조이스 연구입니다. 대학은 조이스주의자들을 빨아들이고, 그들은 이미 대학에서 자리 잡고 있으며, 대학은 그들에게 학위를 부여합니다. 결국, 여러분은 비비(Beebe)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자크 오베르가 발음을 알려줄 겁니다. Bibe일까요, Bibi일까요?


(자크 오베르: 보통은 Bibi라고 합니다.)


Bibi라고요? 좋아요… 여러분은 조이스에 대한 논문을 싣고 있는 비비(Beebe)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이 논문은 특히 뛰어납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휴 케너(Hugh KENNER)의 글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아마도 그가 언급한 "마다캉 증환(sinthome madaquin)" 때문이겠지만, 그는 조이스에 대해 비교적 잘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도 여러 연구가 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여러분이 그것을 접할 기회는 없을 것입니다. 사실, 제가 이런 작은 주석을 작게 인쇄해 넣은 것은 실수였습니다. 말 그대로 "성직자의 실수(pas-de-clerc)"입니다. 저는 이 주석의 글자를 작게 만들었습니다. 다행히도 아주 작게 했지요. 여러분께서 니콜 셀스와 협력하여 이 자료를 복사본으로 제작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사실, 조이스의 영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것을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테니까요. 결국, 이 자료를 필요로 하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당연히 경쟁심은 존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쟁심은—맙소사—정당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젊은 예술가의 초상>, 더 정확히는 "한 예술가의 초상(Un Portrait de l’Artiste)"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술가(Artiste)" 앞에 "le"를 강조하여 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어에서 "le"는 프랑스어에서의 정관사와는 다소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이스를 믿어도 됩니다. 그가 "le"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바로 그 예술가가 오직 자신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단 하나의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As a Young Man", 이 표현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왜냐하면 프랑스어로 번역하면 "comme", 즉 "처럼"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 문제 되는 것은 "어떻게(how)"라는 것입니다.


프랑스어는 이에 대해 하나의 지표를 제공합니다. 즉, "comme"이 사용될 때, 그것이 부사로 활용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말할 때, "réellement"(실제로-실재적으로), "mentalement"(정신적으로), "héroïquement"(영웅적으로) 이러한 "-ment"를 포함하는 부사를 사용할 때, 그 자체로 충분히 어떤 암시적 의미를 갖습니다. 무엇을 암시하느냐 하면, 거짓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부사에는 거짓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석할 때는 이 점을 반드시 유념해야 합니다. 제 가까이에 있는 어떤 사람이 이런 언급을 했습니다. 즉, 언어(langue)라는 것이, 말(parole)의 도구를 지칭하는 동시에, 맛을 느끼는 미각 돌기(papilles du goût)를 지닌 기관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좋습니다. 저는 이에 대해 이렇게 반박하겠습니다.


바로, "우리가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다(ce qu’on dit ment)."


(청중 웃음) 여러분께서 웃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웃을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에게 증상(symptôme)에 맞설 유일한 무기는 모호함 뿐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이런 사치를 부립니다. 즉, 이른바 "감독(supervision)"이라고 불리는 것을 하는데, 이는 스스로 분석가(analyste)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집니다. — 제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이 자신을 분석가로 허가한 것(s’autoriser d’être analyste)이죠.


이 과정에는 두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그들은 코뿔소처럼 행동합니다. — 즉, 아무렇게나 행동하며, 저는 그들을 항상 지지합니다. — 왜냐하면 그들은 항상 옳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그들은 모호함을 활용해야 합니다. — 이는 증환에서 해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 왜냐하면 오직 모호함을 통해서만 해석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 기표 속에서 어떤 울림이 존재해야 합니다.


놀라운 것은, 영국 철학자들이 이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그들을 "철학자)"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신분석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말이 어떤 효과도 가지지 않는다고 굳게 믿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틀렸습니다. 그들은 충동(pulsions)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것을 본능(instinct)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충동이란 것이 단순한 생물학적 반응이 아니라, 언어적 표현(dire)의 반향(écho)이 몸 속에서 울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상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언어적 표현이 울리려면, 즉 공명하려면— 여기서 저는 "마다캉 증환(sinthome madaquin)"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몸이 그것에 민감(sensible)해야 합니다. 그리고 몸은 실제로 민감합니다. 왜냐하면 몸에는 여러 개의 개구가 있으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귀입니다. 왜냐하면 귀는 닫힐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제가 "목소리(voix)"라고 부르는 것이 몸 안에서 반응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귀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눈(le regard)이 이에 강력한 경쟁자로 작용합니다. 더욱 기하학적으로 설명하자면, 플라톤이 중시했던 형상 때문에, 개인은 자신이 속한 방식대로 존재합니다. 즉, 몸으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몸은 강력한 시각적 매혹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는 오히려 눈먼 사람들을 부러워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한 맹인이— 만약 그가 점자를 사용한다고 가정한다면— 어떻게 유클리드를 읽을 수 있을까요?


놀라운 것은, 제가 지금 말씀드릴 내용입니다. 형상은 오직 껍질(sac)만을 드러낸다는 점입니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거품을 드러냅니다. 형상은 부풀어 오르는 무언가입니다. 그리고 저는 강박증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미 이에 대한 영향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강박증 환자는 다른 사람보다도 이것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최근 누군가가 저에게 상기시켜주었죠. 강박증이란, 마치 황소만큼 커지고 싶어하는 개구리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우화를 통해,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강박증 환자를 이 시각적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특히 어렵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집착의 대상인 껍질은 칸토어의 집합론에서 이미 나타나며, 심지어 논증되기까지 합니다.


여기서 이 껍질은 1과 0의 모호함에 의해 표기될 가치가 있습니다. 이것은 공집합(ensemble vide)을 규정하는 유일한 적절한 표현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표기법은 S1입니다.


이 표기는 다음과 같이 읽혀야 합니다. 즉, 그것은 하나(1)가 아니지만, 1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비어 있는 하나(1), 즉 텅 빈 껍질입니다. 그러나 공집합이든 아니든, 껍질은 여전히 껍질입니다. 즉, 그것은 외-존(ex-sistence)하면서도, 일관성을 유지하는 일자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빈 껍질은 여전히 껍질입니다. 즉, 그것은 "일자(un)"로 간주될 수 있지만, 그것이 '외-존'과 일관성을 통해서만 상상될 수 있는 것입니다.


몸은 그 자체로 하나의 그릇으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외-존'과 일관성을 실재적인 것(réel)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실재란 바로 그것들을 그러한 것으로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개념(Begriff)"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여기서 상상계(l’Imaginaire)는 실재(le Réel)와의 동질성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 동질성이 유지되는 것은 숫자의 구조, 즉 이항 체계, 1과 0에 의해서입니다. 이것은 2라는 개념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1이 0이 아닐 때, 1은 0에 대해 존재하지만, 그 자체로 0 속에 머물거나 거기에 의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칸토어의 집합론은 항상 두 개의 요소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집합은 결국 세 번째 요소가 됩니다.


즉, 최초의 집합과 그것과 분리된 대타자 사이에서 직접적인 결합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스타펠라 판본 p.6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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