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çon 2 : 1975년 12월 9일 (2) : Questions
다음은 '75년 12월 9일 라깡의 세미나 이후 이루어진 Q&A세션 담화문입니다.
LACAN
자, 제가 오늘 말씀드린 것 중에, 여러분에게 논쟁의 여지가 있어 보였던 것이 무엇입니까?
Stuart SCHNEIDERMAN
이건 매듭 자체에 대한 질문은 아니고요, 좀 더 역사적인 질문입니다. 처음에 선생님께서 촘스키(CHOMSKY)에게서 뭔가를 발견하실 수 있으리라고, 또는 무언가를 떠올리게 해줄 수 있으리라고 믿게 만든 계기가 무엇이었는지요. 제게는 그런 생각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을 것 같거든요.
LACAN
그래서 제가 ‘숨이 막혔다’고 한 것입니다. 그건 분명합니다. 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우리에게는 항상 일종의 약점이 있지 않습니까? 일말의 희망이 남아 있는 거죠.
제 말은, 촘스키가 언어학을 다루고 있으니, 제가 상징계에 관해 보여주는 것과 관련하여, 거기서 뭔가를 감지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도 있었던 거죠. 즉, 그가 — 비록 잘못된 것이더라도 — 구멍의 흔적 같은 것을 간직하고 있으리라 기대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증상과 상징계로 구성된 전체를 ‘거짓 구멍’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바로 언어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증상은 존속하는 것이며, 적어도 우리가 ‘해석적 조작(manipulation dite interprétative)’ — 즉, 의미(sens)를 건드리는 방식의 조작 — 을 통해 증상에 어떤 변화를 줄 수 있다고 믿는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촘스키에게서 제가 본 것은, 바로 이 증상(symptôme)과 실재(le Réel)를 혼동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에게는 이것이야말로 정말로 숨이 막힐 정도였습니다.
Stuart SCHNEIDERMAN
실례합니다. 이건 어쩌면 좀 쓸모없는 질문일 수도 있는데요…
LACAN
쓸모없다구요(oiseuse)?
Stuart SCHNEIDERMAN
네, 쓸모없습니다. 제가 미국인이어서 그런지…
LACAN
그렇죠! 당신은 미국인이시군요. 감사합니다!
저는 단지 이렇게 확인할 뿐입니다. 또 한 번, 저에게 질문하는 사람은 미국인이라는 점 말입니다.
결국 제가 미국에서 받은 것 — 다시 말해, 어떤 이들이 저의 담화(discours)가 헛되지 않았다는 점을 어떤 방식으로든 저에게 보여주었다는 사실 — 에 대해 제가 얼마나 만족했는지를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Stuart SCHNEIDERMAN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파리에서 여러 담화들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습니다만, 촘스키가 수학적 논리학의 전통 속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점 — 그는 하버드에서 콰인(QUINE)과 굿맨(GOODMAN)에게서 그런 영향을 받았죠 — 을 고려하면, 그에게서 선생님이 뭔가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상상하는 건 제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집니다.
LACAN
하지만 콰인은 전혀 어리석은 인물이 아닙니다, 그죠?
Stuart SCHNEIDERMAN
네, 맞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콰인과 라깡이라는 이름이 같은 문맥에서 나오는 것은 좀… 낯설게 느껴집니다. 주체에 대한 사유에 있어서는, 뭔가… 프랑스인들이 좀 더 이미지들을 많이 만들어내는 듯합니다… 저에게는 그런 사유 방식이 좀 부족합니다…
LACAN
그렇다면, 제가 프랑스 사람에게서 뭔가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결국은… 결국은 말입니다…
Roland CHEMAMA
저는 선생님께 어떤 것에 대해 질문드리고 싶었습니다…
그건 결국 선생님께서 오늘 이 자리에서도 보여주신, 몸(corps)과 말(parole) 사이의 번갈아가며 나타나는 방식에 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생님의 담화 속에서 저에게는 조금 이해되지 않는 지점이 있는데요, 그것은 선생님께서 실제로 한 시간 반 동안 말씀을 하신 뒤에, 누군가와 보다 직접적인 접촉을 원하신다는 욕망(désir)을 드러내신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저는 좀 더 일반적인 차원에서, 선생님의 이론에서 언어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몸이 하나의 교환의 매개로 작용하는 순간들, 다시 말해 이때 기관(organe)이 — 물론 아직 명확하진 않지만 — 담화 없이 실재를 파악하는 데 쓰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주체의 삶 속에는 이 둘 사이의 어떤 교대가 존재하지 않을까요? 제 느낌에는 선생님의 담화에는 일종의 탈육화(désincarnation)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담화는 언제나 다시…
LACAN
뭐라고 말씀하셨죠? 탈육화라고요…?
Roland CHEMAMA
…담화에서, 신체로의 탈육화 말입니다. 그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바입니다.
말하자면, 단순히 이 두 가지 사이에 실제로 번갈아 작동하는 어떤 놀이(jeu d’alternance)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언어 없이요.
그 구멍이란 것이, 실재와의 어떤 신체적 직접 접촉에서 비롯되는 건 아닐까요?
제가 말하는 건 사랑과 향유(jouissance)입니다.
LACAN
바로 그것이 지금 다뤄지는 핵심입니다.
하지만 이런 구도에서는 실재를 제3자로 간주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기대할 수 있는 어떤 응답은, 실재에 대한 호소에 속하는 것이며, 그것은 몸에 연관된 것이 아니라, 몸과는 다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몸과 멀리 떨어진 그 어딘가에서,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린 공명(résonance) 또는 화음(consonance)이라 부를 수 있는 무언가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공명은 바로 실재의 차원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재는…몸이라는 한 축과, 언어라는 또 다른 축 사이에서…화음을 이루는 것이 바로 실재입니다.
X
조금 전 선생님께서는 촘스키가 언어를 하나의 기관으로 만들었다고 말씀하셨고,
그로 인해 선생님께서 숨이 턱 막히는 듯한 충격(soufflé)을 받았다고 하셨죠.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혹시 선생님께서는, 언어가 아니라, 리비도를 하나의 기관으로 삼고 계신 게 아닌가요?
저는 ‘라멜라의 신화’를 떠올렸고, 여기서 영혼이라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실마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즉, 언어와 기관 사이에 간극을 설정하지 않으면, 예술이라는 차원에서 이를 복원해낼 수는 없지 않을까…
그리고 그럴 경우, 선생님께서 기관을 리비도의 수준에서 절단(couper)하시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이건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리비도가 하나의 기관이라는 생각은… 좀처럼 납득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놀라운 점은…
LACAN
리비도는, 그 이름이 암시하듯, 구멍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몸과 실재의 다른 양태들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X
매우 흥미로운 점은, 선생님께서 말씀하실 때…
LACAN
바로 그것이 제가 예술의 기능에 접근하려는 지점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네 번째 항으로서 공백으로 남겨진 것에서 암시됩니다.
그리고 제가 예술이 증상 자체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할 때, 제가 시도하려는 것은 그것을 실체화하는 것입니다.선생님께서 ‘라멜라 신화’를 언급하신 것은 적절하며, 저는 이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바로 이 맥락 속에서 저는 계속 논의를 이어가고자 합니다.
X
질문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떤 글에서 리비도는 왕복(invagination aller-retour)의 경로를 따라 특징지어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이미지가 오늘날에는, 마치 공명 속에 갇힌 줄(corde)처럼 작동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줄이 배를 만들며, 아래로 꺼졌다 다시 위로 올라가며, 동시에 매듭을 만들어내는 방식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쭙고 싶은 것은…
LACAN
아니요, 바로 그 점에서 줄이라는 이미지, 그 은유가 매듭을 만든다는 것에서 유래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겁니다. 제가 시도하고 있는 것은, 이 은유가 참조하는 바가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입니다. 줄이 떨릴 때 그 속에 배와 매듭이 생긴다는 것은, 우리가 결국 매듭을 참조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은, 실제로 말해진 것 이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사람들은 은유의 효과를 항상 축소시키려 합니다. 즉, 은유를 단순히 환유(métonymie)로 환원해버리는 거죠.
X
선생님께서 세 개의 보로메오 매듭 — 즉 실재, 상상계, 상징계— 에서 네 개의 매듭, 즉 증상이 추가된 것으로 넘어가실 때, 그 자체로서의 세 개의 보로메오 매듭은 사라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LACAN
전적으로 정확한 지적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매듭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증상에 의해서만 유지됩니다.
X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분석에 있어 치유에 대한 희망이라는 측면에서 문제가 제기되는 듯합니다…
LACAN
네 번째 항에 대한 근본적인 제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즉, 정신분석이라고 해서도, — 왜냐하면 프로이트는…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경로를 통해…이것을 진술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 원초적 억압(Urverdrängung)이 있으며, 그 억압은 결코 폐지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상징계의 본성상 항상 구멍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과 관련되어 있으며, 제가 겨냥하는 것도 바로 그 구멍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구멍을 원초적 억압 속에서 인식합니다.
X
또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은, 선생님께서는 보로메오 매듭이 하나의 모델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점을 좀 더 분명히 설명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LACAN
그것은 하나의 모델로서 작동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매듭은, 상상이 도달할 수 없는 무언가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기 때문입니다.
제 말은, 그것은 상상을 진정한 의미에서 저항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즉, 매듭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상상이 그 자체로 저항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위상수학에서 접근하는 수학적 방식도 불충분합니다.
제가 말이지요 — 휴가 동안의 제 경험을 조금 말씀드리자면 — 저는 이 점에 대해 계속 집요하게 사유해왔습니다.
즉, 이것이 어떻게…
이 매듭이 어떻게 하나의 매듭을 구성하게 되는가 — 그것은 단지 두 요소 사이의 매듭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여기에는 단 하나의 요소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세 겹 매듭(nœud à trois)’이라는 이 매듭, 가장 단순한 형태의 매듭, 여러분이 만들 수 있는 그 매듭은 바로 이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 끈으로나 만들 수 있는 그 가장 단순한 매듭, 그것이 바로 이 매듭입니다. 겉모습은 다를지라도 동일한 매듭입니다.
저는 이 점에 집착하여 사유해왔습니다. 제가 — 말하자면 — 찾아낸 발견이기도 한데요, 바로 이 매듭으로부터, 지금 여러분께 보여드린 형태로부터, 보로메오 매듭이 ‘외존한다(ex-siste)’는 것을 증명하기는 매우 쉽다는 점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떤 표면 위에, 곧 매듭에 관한 어떤 서술도 가능하게 해주는 바로 그 이중 표면 위에, 동일한 매듭을 배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간단히 실현할 수 있습니다 — 즉, 어떤 표기(writing)를 통해서 말이지요. 그 표기란 이런 것입니다: 매 단계마다, 제3의 ‘세 겹 매듭’을 연속적으로 통과시키는 것 —
그건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상상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그것을 찾아내야 했지요.
즉, 동형적인 매듭을 ‘하부 매듭’ 아래로 통과시키고, 동시에 ‘상부 매듭’ 위로 통과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단계마다 반복하면 됩니다.
이렇게 하면 아주 쉽게 하나의 보로메오 매듭이 구성됩니다.
세 겹 매듭으로 네 겹 보로메오 매듭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까요? 저는 이에 대해 — 말 그대로 머리를 싸매고 — 두 달쯤을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네 개의 세 겹 매듭을 보로메오 방식으로 얽는 방법이 외존(ex-siste)한다는 것을 증명해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아무것도 증명하지는 않죠! 외존하지 않는다(ex-siste pas)는 걸 증명한 것도 아니니까요!
어젯밤까지도 저는 그 생각만 했습니다. 제가 그것을 여러분께 증명할 수만 있었다면, 곧 외존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만 있었다면 말이지요…
가장 골치 아픈 건 이겁니다. 저는 그것이 외존하지 않는다는 증명도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저 실패한 것뿐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 네 개의 세 겹 매듭으로 이루어진 보로메오 매듭이 외존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히려 그것이 외존할 수 없다는 점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불가능성(Impossible) 속에서, 하나의 실재가 확보될 것입니다. 즉, 네 개의 세 겹 매듭으로는 보로메오 매듭을 구성할 수 없다는 사실, 이것이 하나의 실재에 도달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말씀드리자면, 언제나 그렇듯 제 방식대로, 제 '생각(pen-se)' 속에서 말하자면, 저는 그것이 외존한다고 믿습니다. 즉, 우리는 그것에서 실재에 부딪히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걸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저는 아무것도 보여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한 번 증명만 된다면, 여러분께 보여주는 것은 쉬울 것이니까요. 그런데 지금 제가 할 수 없는 바로 그것 — 보여주는 것 —,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하나의 사실입니다. ‘보여주는 것(montrer)’과 ‘증명하는 것(démontrer)’의 관계는 여기에서 뚜렷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X
조금 전 선생님께서 촘스키의 관점에서는 언어가 하나의 기관이 될 수 있다고 하셨고, ‘손(main)’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셨습니다. 왜 ‘손’이라는 말을 쓰셨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그 ‘손’이라는 말 아래에는, 아직 기술적이지 않은 어떤 대상, 즉 데카르트적 의미에서의 기술로 전락하기 이전의 무엇, 언어를 알지 못하는 기술, 혹은 언어와 결합되지 않은 기술이 전제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렇다면 주체와 언어의 관계를 기술하려는 이 시도는, 아마도 촘스키적 기술관과는 전혀 다른, 또 다른 기술 이론의 필요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LACAN
네, 바로 그 점이 제가 주장하는 바입니다.
악수(handshakes)라는 것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손(main)은 쥔다(poigner)는 행위 속에서 다른 손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만약 분석에서, 여러분이 제 세미나를 준비하는 데 제가 들이는 것만큼의 진지함을 쏟는다면, 그건 정말 훌륭한 일일 것입니다. 훌륭할 뿐 아니라, 훨씬 나은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분석에서 그러한 진지함이 필요합니다 — 제가 갖고 있는 그것처럼요.
그건 제가 며칠 전 이야기한 바, ‘상티멍딸(senti-mental)’과 관련된 것이기도 합니다.
역자주 : sentimental은 영어의 같은 철자 단어와 동의어(감정적인, 감성적인)이다.
sentir는 느끼다(sense), mental은 '정신적인'이라는 뜻의 형용사.
그것은 바로 절대적인 위험에 대한 감각(sentiment d’un risque absolu)입니다.
그렇습니다. 며칠 전 저는 여러분께 말했습니다. 그 세 겹 매듭, 제가 이렇게 그리는 그 매듭 말입니다…
보로메 매듭에서 나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방금 지적한 세 개의 점에서 끈을 연결해서요.
저는 또한 — 말하자면 — 그것이 완전히 설명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점도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두 달 동안 가장 단순한 매듭을 위해, 네 개의 세 겹 매듭(nœud borroméen à quatre)을 외존(ex-sister)하도록 노력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것을 외존시킬 수 없었던 사실은 제 어리석음을 증명할 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그것이 외존해야 한다고 믿었다고, 저는 심지어 그것에 대해 확신했습니다.
그날 저녁, 저는 좋은 놀라움을 맞이했습니다. 늦은 시간이었고, 사실 제가 조금 늦게 외출했기 때문에, 제가 해야할 일들이 좀 있었죠. 문 앞에서 톰(TOMÉ)이라는 사람을 맞이했습니다 — 그의 이름을 말하자면, 그리고 그는 저에게 그것을 가져왔습니다… 저는 매우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그의 소리 소리(SOURY SOURY)와 톰(TOMÉ)의 협업 결과물였고, 여러분, 이 이름들을 기억하세요. 그는 저에게 보로메오 매듭이 외존(ex-siste)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를 가져왔습니다.
이로써 제 집념이 정당화되었지만, 제 무능력은 여전히 애석하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사실을 혼합된 감정으로 맞이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무력함에 대한 후회와 성공에 대한 기쁨이 혼합된 감정 말입니다. 그보다 제가 느낀 것은 그저 순수하고 단순한 열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몇 주 후 그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이 저에게 어떻게 그것을 찾았는지 보고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그들은 사실 그것을 찾았고, 제가 그들의 발견을 잘못 옮기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기록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들의 발견을 중앙의 종이에 그대로 옮겼습니다. 그것을 거의 그대로 복제했습니다. 텍스트로 말하자면, 그것은 그들이 만들어낸 것과 거의 똑같습니다. 그것을 제가 평평하게 만든 경로를 제외하면 말이죠. 제가 그것을 평평하게 만든 경로가 이렇게 된 이유는 여러분이… 혹시 그들이 만든 그림보다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조금 더 잘 느끼게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