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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석 Jun 01. 2020

5,800만원에서 2,400만원으로

무엇을 찾아 떠난 걸까

2015. 11. 27


10월부터 100명이 채 안 되는 작은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7월부터 학교 선배의 권유로 비교적 나의 성향에 부합하는 스타트업을 부랴부랴 알아본 결과였다. 예~전 말로는 벤처 기업이라고도 했던 형태의 회사들이 미국에서 시작된 새로운 붐을 타고 스타트업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당시 스타트업에 대한 이미지는 변화에 민감하고 대개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직원들 간의 민주적인 의사 결정을 통해 조직을 발전시켜 나간다는 점이었다. 또한, 대기업에 들어가는게 바늘 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웠던 시절이었기 때문에(지금도 그러하지만) 이런 부분들이 젊은층에게 더욱 핫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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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조직은 몇 만명이 함께 하는 거대한 프로세스에 의해 운영되었기 때문에 나는 작은 부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안에 있으면 거대한 조직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조금씩이나마 체감할 수 있다. 적어도 내가 머물렀던 조직은 거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속하고 탄탄했다. 과연 대기업은 다르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몇몇 사건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곳에 나의 목소리를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은 없다. 늘 지시받고 항상 무언가를 요구받으며, 근무를 하면 할 수록 거대한 조직을 돌리기 위한 '괜찮은 부품'이 되어 간다. 많은 사람들이 '괜찮은 부품'으로 평가받기 위해 경쟁하고, 경쟁에서 이기면 기뻐한다. 내 스스로가 '괜찮은 부품' 역할을 꽤나 수행한다고 생각했을 무렵, 내가 가지고 있던 다른 기능(?)들이 점차 퇴화되어 사라져감을 느꼈다. 슬펐다.


수 만 명이 함께하는 조직에서 일개 부품은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차장 말에 따르면, 조직을 변화시킬 수 있을 정도의 부품이 되기 위해서는 10년, 20년 이상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뒷말이 더 씁쓸했다. 지금도 부품이지만, 20년 뒤에도 여전히 부품이라고. 훌륭한 부품. 그나마 녹슬어서 버려지지 않고 훌륭한 부품이 된다면 다행이라고.


내가 90년대생이라서 새로운 생각의 회로를 가지고 있는걸까?


평생 부품처럼 살다 녹이 슬어 버려지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채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그게 과연 유쾌한 삶일까. 내 선배들, 내 윗세대들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행동하는 것일까. 속으로 서글프지는 않을까. 늘 궁금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다들 어른스럽게 묵묵히 견뎌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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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묵묵히 견디지 않았다. 한 번 사는 인생을 그렇게 날릴 수는 없었다. 한 때 유행했던 YOLO를 맹목적으로 따랐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 인생이 너무나도 비참했다. 가진 건 없었지만, 적어도 내가 머무는 조직에서 내 목소리를 드러내며 나의 존재를 인정받고 조직과 함께 성장하고 싶었다.


새로운 조직으로 들어가는 건 쉽지 않았다.


이미 나는 대기업이 요구하는 형식적이고, 보여주기식 위주의 면접에 익숙해져 있었다. 어떻게든 나를 포장해서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어 보여주어야 했다. 그것도 1분, 3분, 5분 등 아주 짧은 시간 내에.


나의 면접 스킬은 스타트업에서는 먹히지 않았다.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는 그럭저럭 통과했다. 대체적으로 자유 양식의 자기소개서를 요구했는데, 사진도 넣고 은행을 때려치고 스타트업에 들어가려는 이유를 그럴싸하게 적었는지 서류 통과는 무난하게 할 수 있었다. 꽤나 많은 곳에서 면접을 봤는데 첫 면접을 마치고 난 뒤에 젊은 면접관 한 분이 나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상석씨, 우리가 면접을 보려는 건 상석씨가 어떤 분인지 알기 위함이에요, 그런데 면접을 진행하면서 상석씨가 저희 질문에 대해 약간은 방어적인 태도를 보인다는걸 느꼈습니다. 혹시나 다른 곳에서 면접을 보게 되면 진솔하게 대답하는 태도를 보여주면 더 좋을 것 같네요. 스타트업은 대기업과는 달리 소수의 인원으로 유지되는 조직이기 때문에 직원들의 개인적인 성격과 업무 스타일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대기업은 직원에게 지시만 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이곳에서는 지시와 피드백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조직이기 때문이죠."


내가 개선해야 할 점을 정확하게 짚어주었다. 대기업 면접에서는 무언가 지적을 당하거나 질문을 받으면 빠른 시간 내에 그에 대한 변명을 해야 했다. 그래서 많은 취준생들이 서로 스터디를 하며 면접 질문을 주고받는 연습을 하고 어떠한 질문을 받아도 당황하지 않고 대답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대기업 면접관들은 빠른 시간 안에 면접자들을 판단해야 했고, 면접자들의 답변이 느리거나 적절한 답변이 제시되지 못 하면 그 면접자가 어떠한 사람인지와는 관계없이 마이너스를 준다. 물론, 대기업 인사과의 직원들이 사람을 평가하기 위해 얼마나 전문성을 쌓아서 판단하는지는 모르겠다. 면접자가 걸어들어오는 그 몇 초로 그 사람을 판단한다는 말도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과정에는 개인의 진솔함보다는 답변의 순발력과 논리력이 우선시된다는 것은 확실하다.


스타트업에서 진행되는 면접은 대개 장시간 동안 진행된다. 나 혼자 1~2명의 면접관과 대화를 나누는 데에도 보통 1시간이 걸렸다. 그러니 내가 가진 생각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다. '일'에 자체에 대한 나의 태도, 그리고 해당 스타트업의 산업 분야에 대한 나의 시각과 견해, 현재 해당 스타트업의 사업에 대한 이해도 등 다양한 주제로 면접관들과 대화하게 된다. 대화가 진행되면서 내가 가진 장점과 단점이 드러나게 될 것이고, 장점이 더 크다면 나는 이 회사에서 일하게 될 것이다.


많은 스타트업 면접을 봤지만 최종까지 통과되는 회사는 없었다. 아무래도 은행을 그만둔 이유를 너무 솔직하게 말해서였지 싶었다. 스타트업도 조직이라면 조직이고 나름의 체계를 두었을 것이다. 또한, 아무리 스타트업이라고는 하지만, 실리콘밸리에도 존재한다는 수직적인 조직 문화가 한국 기업에 없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은행을 그만둔 이유를 긍정적인 어투로 바꾸어 표현해야 하나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무렵 드디어 어느 회사에 최종 합격하게 되었다. 적어도 그 때는 무언가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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