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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석 Feb 26. 2021

히로시마, 그 3명의 젊은 사장님

첫 날, 의외의 만남

2021년. 지금은 히로시마로 가는 직항 항공편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4년 전에는 에어서울에서 한국과 일본 중소도시를 연결해주는 직항편을 운영했다. 이제는 에어서울도 없고, 일본 중소도시를 바로 연결해주는 모험을 감수하는 항공사도 더이상 찾아볼 수가 없다. 코로나가 끝나더라도 아마 없을 것 같다는 안타까운 예감이 든다. 아무튼, 몇 년 전에도 적어놓았지만 그 때의 나는 한 학생의 권유로 에어서울이라는 새로운 저비용 항공사를 알게 되었고, 오픈특가를 진행한다는 소식도 접하게 되었다. 선결제 후일정. 그렇게 히로시마 여행이 시작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선호를 받는 노선이 아니다보니 노선이 많지 않았고, 그나마 있는 노선도 애매한 시간대에 배정되어 있었다. 아주 이른 아침, 아니면 늦은 저녁. 하루를 날릴 수는 없으니 아주 이른 아침을 선택했다. 8시에 이륙이었으니 6시까지 가야했고, 공항버스 첫 차를 타야 했다. 부랴부랴 준비하고 이륙까지 마쳤다. 아침에 일어나면 '대체 휴일까지 일찍 일어나면서 이게 무슨 고생이람'이라는 후회가 밀려오지만, 막상 공항에 도착하면 잠이 사라지고 들뜨게 된다.



인천에서의 날씨는 별로였지만, 히로시마의 날씨는 환상이었다. 오전 11시 전후로 도착했다. 일본 어느 시골 마을의 미세먼지 하나 없는 깨끗한 날씨. 머릿속으로 상상만 해봄직한 그런 날씨가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서둘러 시내로 갔다. 버스와 JR선이 있었는데, 사진을 뒤져보니 JR선을 타고 간 것 같다. 일본을 몇 번 가보니 공항과 중심지를 어떻게 오갔는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기억이 오래되니 더 심해진다. 왕복 3만원 정도. 아마 이 날 티켓을 구매하면서 3천엔인가 땅바닥에 흘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흐흑.


지금은 호텔을 더 선호하지만, 그 때는 게스트 하우스를 고집했다. 아니다, 해외 여행을 가면 게스트 하우스를 자주 가고 한국에서는 호텔을 잡는다. 마치 코로나 때문에 취향이 바뀐 듯한 느낌이 든다. 히로시마역에서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게스트 하우스를 예약해두었다. 일본어를 못 하기 때문에 불상사에 대비하기가 어려웠고,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 늘 역 근처에 숙소를 잡아두었다.



캐리어를 들고 걸어가면서도 사진을 찍었다. 셀카도 찍고 현지인들에게는 평범해보이는 모든 걸 담았다. 도로 한 가운데에는 전차가 다녔고, 건물에는 해석할 수 없는 일본어들이 가득했다. 한국에는 전차가 없으니 신기했고, 일본어는 해석할 수 없으니 미지의 세계였다. 얼마 되지도 않는 숙소까지의 거리가 꽤나 오래 걸렸다.


게스트 하우스의 입구는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사장님이 여성 분이신가보다' 생각하고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여성 직원이 날 맞아주었다. 내가 한국 여권을 꺼내든걸 보고는 영어로 말을 걸어 주었다. '생각보다 영어를 엄청 잘 하시네' 생각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키 하나를 주며 짐칸에 짐 정리를 하라고 안내해주었다. 직원이 방을 안내해주고 밖으로 나갔다. 4명이 한 방에 머물렀었나. 2명이 더 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전부 유럽인들이었다. 첫날 얼굴을 본 뒤로 다시는 본 적이 없다.


직원이 안내해주고 밖을 나가며 다른 여성 직원과 대화를 하는데, 갑자기 그 내용이 어렴풋이 머릿속에서 해석되기 시작했다. 그럴리가 없는데.


'어? 이 사람들.. 설마'


바로 뒤따라나가서 나도 말을 걸었다.


"당신들 어떻게 중국어를 할 줄 아세요?"

"응?? 한국인 아니신가요? 어떻게 중국어를 할 줄 알죠?"


우리는 한국어도 아니고 일본어도 아닌, 중국어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두 직원은 놀라워 하며 나를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엄청 유창한 것도 아니지만 못 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랬나보다. 나는 중국에서 중국어를 배운 적이 있고, 한국에서 역사교육을 전공하며 중국어를 가르치는 강사라고 소개했다. 직원은 세 명이었는데, 모두 여자였고, 대만에서 건너왔다. 지금은 더욱 심각해졌지만, 최근 대만은 경기 침체로 인해 젊은층이 일자리를 구하기 쉽지 않다. 3-4년 전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고, 이런 상황에서 3명의 젊은 청춘들이 합심해서 일본으로 건너온 것이다.



아무튼, 구사할 수 있는 언어로 소통한다는 것이 이렇게 소중할 줄이야. 그 3명의 젊은 사장님은 나와 한국에 대해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30분 가량 대화를 나눈 뒤에 한 사장님이 나를 보내주어야 한다고 이야기를 꺼내주었다. 그렇다. 나는 손님이었고 여행객이었다. 그들은 날 붙잡아서 미안하다며 길을 안내해주었고, 대화를 나누다가 내가 별다른 여행 코스가 없다는게 들통나면서 코스를 짜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날 같이 맥주를 마시기로 약속했다.


그들은 이렇게 날이 좋을 때 미야지마를 가야 한다고 이야기해주었다. 미야지마는 일본에서 3대 절경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특정 시간대에는 물에 잠겨서 들어갈 수가 없고, 신사로 가는 길목에는 사슴들이 뛰놀며.. 그렇다고 한다. 그래서 첫 일정으로 미야지마를 다녀오기로 마음 먹고 길을 나섰다. 미야지마구치역에 내리면 유명한 장어덮밥집도 소개받았다. 든든한 대만 친구들 덕분에 순조로운 여행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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