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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멋대로 Jan 31. 2024

연봉협상에 대처하는 자세

2. 회사와 나, 우린 제법 안 어울려요


드드드.


핸드폰 진동음이 묵직하게 울린다. 평소와는 다른 기운이다. 심상치 않다. 심장 박동이 조금 빨라진다. 들어왔나. 기대감이 고조된다. 딱히 지켜보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무표정을 유지한다. 슬쩍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 본다.



입금 *,***,***원

최**님 00/00 07:00 243701-**-***122

OOOOO  전자금융입금 *,***,*** 잔액*,***,***



역시나, 은행 푸시 알림이다. 또렷이 찍힌 일곱 자리 숫자. 한 달 치 노동의 대가다. 빤히 보이는 숫자를 훑고 또 훑는다. 매달 받는 알림이지만 때마다 새롭다.


월 급여는 완충재고 쿠션이다. 누구나 제 잔고 위에서 굴러먹고 사는 인생 아니던가. 바닥이 다 느껴질 만큼 낮게 깔린 잔고에 폭신한 월급을 더하면, 딱딱한 세상에 막바로 부딪을 걱정이 사라진다. 몸과 마음이 편안하다.


연봉협상일이 그러고 보니 얼마 남지 않았다. 이직해 들어온지 만 1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다. 꼬박꼬박 받는 액수의 크기가 조금이나마 커진다는 생각에 ‘행복회로’가 또 바삐 돌아가기 시작한다. 몇 퍼센트나 더 받게 될까. 그 돈으로 무얼 더 할 수 있을까. 꿈과 희망에 폭삭 젖는다.




직장인에게는 임금이 전부다. ‘회사 내 최고의 복지는 연봉 인상’이라는 우스개가 웃기지만은 않다. 물론 노동의 목적은 돈 이외에도 여러가지다. 저마다 다양한 의미와 가치를 품는다. 다만 최소한의 물질적 토대 위에 피는 꽃이다. 지력을 잃고 가문 토양에는 생명도 정신도 깃들지 않는다.


나날이 돈을 더 받아낼 궁리를 하게 된다. 조직에서 버티는 이유는 오직 그뿐이다. 돈이야말로 자의든 타의든 가장 큰 버팀목이다. 당장 이 회사에서 큰 돈 받아먹을 생각이 없더라도, 버티고야 마는 이유는 지금의 고단을 발판 삼아 나중에 더 많은 재화를 안정적으로 쥐기 위해서다.


모두가 경력연차와 승진에 목 매는 이유도 다름 아니다. 그에 따른 대우, 즉 더 많은 돈이 따라올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다. 물론 절대라는 건 없다. 연차와 직급 상승이 높은 수준의 급여를 백 퍼센트 보장하지는 않는다. 결국 한 해에 한 번, 연봉협상이라는 월급쟁이만의 ‘포춘쿠키’를 까 봐야 안다. 그래야 1년 분의 길흉화복을 명확히 셈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생애 첫 연봉협상이다. 과연 내 길흉은 어찌 될 것인지, 때가 되니 온 신경이 쏠린다. 막무가내식 운영으로 연명하던 회사를 순회할 때는 해 볼 일 없던 고민이다. 사장 내키는 대로 급여를 고무줄처럼 늘이고 줄이는 곳에서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꿨다. 달에 오만 원 푼돈 올려주고 생색은 거지 똥구멍 털어먹듯 하는 곳이다.


그에 비하면 여기선 마음이 놓인다. 적어도 지난 나의 성과를 적절히 반영하여 새 연봉을 산정해 줄 것 같다. 이직 후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열심히 했다. 뭘 하는지, 왜 해야 하는지 도무지 납득이 안 가는 일도 많았다. 혼란스러워도 쳐 내라고 하니까 쳐 내고, 시키는 업무를 말 없이 주구장창 해 냈다.


누가 보든 말든 야근도 자발적으로 자주 했다. 퇴근 시간이 지나면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와 남은 업무를 들춰 봤다. 고단하지만 더 나은 내일, 더 나은 대우를 생각하며 버텼다. 분명 알 사람은 알아 줄 거라 굳게 믿었다.




뻔한 얘기지만, 이윽고 마주한 현실은 아주 너저분했다. 방긋 웃는 표정을 한 현실의 가면을 천천히 들춰내자 음흉하고 저열한 낯이 가만가만 드러나기 시작했다. 시작은 연봉협상 몇 주 전 진행된 팀장 면담에서부터였다.




"그래, 일은 잘 하고 있지?"




"네. 하하.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는 하고 있습니다."




면담을 시작하는 빤한 질문에 더 빤한 답으로 응했다. 얼마간 큰 의미 없이 겉도는 말을 주고 받았다. 팀장은 원래 팀원이 가진 애로사항에 별 관심이 없는 인물이다. 이따금씩이라도 팀원 한 명씩 들여다보는 일이 없다.


이번 면담은 정기 인사 평가를 위해 통상적으로 거쳐야만 하는 절차였기에 가진 자리다. 치레에 치우친 소리는 금세 관두고, 그가 슬쩍 본론을 꺼내 놓았다. 그런데 그 내용이 충격적으로 예상 밖이었다.




“참, 회사 인사평가방식이 얼마 전에 바뀐 거 알아? 상대평가 방식이야. 이제부터 팀원 중에 누군가는 반드시 낮은 등급을 받게 된다는 말이지. 그래서 미안한 얘기인데, 이번에는 네가 낮은 등급을 받게 될 거야.”




심장이 일순 덜그덕거렸다. 대리석 바닥에 아무렇게나 집어 던진 스테인리스 개밥그릇처럼, 기분 나쁘게 카랑대는 소리를 냈다. 애써 끌어올려 고정시킨 입꼬리가 살살 제 위치를 찾아갔다. 팀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반문했다.




“네? 왜..요? 혹시 제가 특별히 일을 못한 게 있나요?”




“아니. 너는 이번에 충분히 잘 해줬지. 그런 건 아니고, 그냥 한 명씩 돌아가면서 이렇게 받게 됐다 생각하는 게 편할 거야. 내년에는 또 다른 사람이 대신 낮은 등급 받게 될 거고. 나도 참 이 방식이 맘에 안드는데,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 야. 이번만 이해해 줬으면 좋겠네.”




상상 너머의 생뚱맞은 소리에 사고가 흐려졌다. 무슨 말이지 이게. 돌아가면서 평가등급을 낮게 받기로 했다는 말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등급이란 게 실은 실질적인 의미 없이 단순히 지난 한 해 업무역량을 보여주고 참고하는 지표일 뿐인 건가. 그렇게밖에는 그의 말을 이해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아.. 그러면요 팀장님, 제가 전에 이런식으로 인사평가를 받아 본 일도 없고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 혹시 낮은 등급을 받는다고 별다른 불이익은 없는 건가요? 진급에 불리하다든지 뭐 그런.”




“아니. 너 이번에 진급 연차도 아니고 불이익 볼 건 딱히 없을 거야. 그냥 사정을 미리 알고 있으라고 말해주는 거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네 그러면 알겠습니다. 그냥 등급만 그렇게 나오는 거라면 뭐 괜찮겠네요. 하하.”




얼마 뒤, 나는 팀장 말대로 업무평가등급 ‘C’등급을 받아들었다. 별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팀장이 밑밥을 잘 깔아 둔 덕분이었다. 들었던 대로 손해 볼 일 없다면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이다. 평소처럼 평온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날아든 연봉협상 내용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확실히 그랬다.




새 연봉협상 내용은 업무 중에 개인 카카오톡으로 전자고지됐다. 막상 열어 보려고 하니까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열람을 위해 개인정보 입력을 하면서 갖은 생각을 했다.


얼마일까. 얼마나 더 줄까. 코로나에다 뭐에다 전 세계적으로 죄 앓는 소리를 해 대는 판국에 파격적 인상은 상상도 하지 말자. 과욕과 설레발은 실망의 어머니. 그래, 현실적으로 5% 정도 보는 게 맞겠지. 그 정도로 만족하자. 예방 주사를 놓기 시작했다.


이제 간보기를 끝내고 현실을 마주할 차례다. 스피또를 긁는 마음으로 개인정보를 넣고 내용 열람을 눌렀다. 표 위에 어지럽게 늘어선 숫자들이 보인다. 내용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만 보자. 어디 있나. 눈에 힘을 바짝 주고 열심히 눈을 굴렸다.



‘아! 여기에 있네. 음, 이게 작년 연봉이고. 이게 올해 연봉... 어, 어? 이게 뭐야?’



믿을 수 없는 문구가 눈에 꽂혔다.



*귀하의 202X년

급여인상률과 인상액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상률 2%

-인상액(월) **,*** 원

-인상액(년) ***,***원



강한 충격에 휩싸였다. 시신경이 일을 잘못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면서 몇 번이고 다시 들여다 봤다. 2%라고? 뭔가 잘못됐다. 안 그래도 낮게 책정된 연봉에 2% 인상이면 한 해 물가 상승분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 아닌가. 겸손하게 바랐던 5%의 절반도 안 됐다.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인사팀 면담을 신청했다. 납득 불가능한 수치에 이의를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속을 짓이기는 불덩이를 최대한 숨기고는 조목조목 따졌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했다, 이런 성과를 냈다고 명확히 이의를 전달했다.


결과는 싱거웠다. 수용 불가. 분노를 표출하는 일개미에 대한 인사팀의 답변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창사이래 단 한 건도 노동자의 연봉협상 이의에 수긍한 역사가 없다며 완고한 태도를 유지했다.




“사실 말이 좋아 연봉협상이고, 그냥 연봉 통보라고 보면 돼요. 협상은 야구 선수 같은 사람들이나 하는 거지, (웃으며) 직장인들이 하는 게 아니에요.”




물정 모르는 안타까운 꼬맹이에게 세상을 알려주는 식으로 제 나름대로의 ‘명대사’를 날리는 인사담당자를 보며 허탈하고 무안해졌다. 알루미늄 호일을 구겨 만든 창으로 강철 티타늄 다이아몬드 아다만티움 합금 코팅 방패를 뚫으려 한 격이었다.


그래도 작으나마 대화를 통해 얻은 소득은 있었다. 낮은 임금인상률의 결정적 사유를 알아냈다. 다름아닌 업무평가등급이었다. C등급을 받았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할 계제 자체가 없던 것이었다.


아무런 불이익이 없을 거라던 등급에서 보란듯 발목을 잡아채인 데 대한 또 다른 차원의 분노가 시작됐다. 돌이켜보면 나의 무지 탓이지만, 당시로서는 업무평가든 연봉협상이든 난생 처음 겪어 본 바라 평가 등급이 연봉 책정에 직결되는 지표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팀장이 나를 기만했다는 생각에 속이 화끈거렸다. ‘뭐? 돌아가면서 한 명씩 낮은 점수를 받아? 불이익이 없어?’ 한 차례씩 돌아가면서 평등하게 겪는 불편이란, 학창 시절에 번갈아가며 청소 당번을 맡는 수준에 그쳐야 한다. 다달이 꽂히는 급여 하나 바라보고 사는 직장인에게 연봉에 영향을 줄 만한 내용을 가지고 이런 장난을 쳐서는 안 된다.


목구멍 뒤쪽에 불을 땐 기분에 어떠한 업무도 불가능했다. 남은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팀장을 찾아갔다. 화를 지나치게 꾹꾹 참아 오히려 맥 빠진 말투로 심정을 드러냈다.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 그런데 아무런 보상도 없이 이런 결과가 나와서 힘이 엄청나게 빠진다. 왜 사전에 확실히 말을 안 해 줬느냐’ 물었다.




“내가 그걸 얘기 안 해줬나? 해줬던 것 같은데. 몰랐구나.”




내놓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기가 찼다. 팀장은 그저 적당히 난처한 말투로 미안하다, 그런데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으로 일관했다. “봐라, 내가 이렇게 바쁜데 내 연봉도 형편이 없어. 나는 솔직히 1억은 넘게 받아야 되지 않을까.” 어처구니 없는 말을 위로랍시고 늘어놨다. 더 이상의 대화에 의미는 없었다. 아무 소득을 얻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방이 벽으로 느껴졌다. 회사든 팀이든, 정해둔 연봉에 대한 이의에 관심을 기울일 용의가 애저녁에 없었다. 뼈아프게 깨달았다. 말본새만 다르지 이들이 내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단 하나였다.




“건방지게 까불지 말고 주는 대로 받아. 네가 싫으면 어쩔건데?”




실제로 연봉협상 내용을 살펴보면, 이의가 있어 기한 내 서명하지 않을 경우에 인상 없이 직전 연봉 수준을 따른다는 경고문구가 쓰여 있었다. 현실적으로 보면 협박에 가까운 내용이다. 잔말 말고 수긍하든가, 적은 돈이나마 올려받지 말든가.


열심히 하면 인정받고, 인정에 따른 보상이 주어진다는 생각 역시 귀여운 환상이었다. 환멸이 났다. 여기도 힘 빼 봤자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는 곳이었다.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인사담당자와 팀장이 내게 전한 말만 곱씹어도 자명했다.




정확히 그 주 주말, 나는 결혼식을 올렸다.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부풀어 있어야 하던 때에 내 기분은 처참했다. 엉킨 마음으로 신혼여행을 하며 여러 생각을 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마음가짐을 가질 것인가. 어떻게 회사 생활을 이어나갈 것인가.


단박에 모든 내용이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앞으로 이 회사에서 내가 뭔가를 열심히 하게 될 일은 없다’는 것. 어떤 결과가 따르든지간에, 회사가 나를 대우하는 만큼만 일해야겠다 다짐했다. 힘 없고 억울한 노동자가 택할 수 있는, 가장 쉬우면서도 짠한 방법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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